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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의 하늘의 창(窓)] 뗏목 위의 혁명

 

제리코의 <메두사의 뗏목>

 

<메두사의 뗏목(The Raft of the Medusa)>이라는 제목의 그림은 난파선 생존자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루브르 박물관에 걸린 데오도르 제리코(Theodore Gericault)의 1819년 작품이다. 이 그림이 바다 위에 버려진 열 다섯명의 참혹한 생존 실화(實話)를 담았다는 걸 알면 더욱 충격적으로 작품이 그려낸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1816년 7월, 400여명이 승선한 ‘메두사’ 호는 아프리카 북서쪽 세네갈 해안을 돌다가 암초에 부딪혀 파선(破船)한다. 구명정이 부족한 상태에서 승선자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이들이 버려지고 임시방편으로 만들어진 뗏목에는 그렇게 유기된 이들 147명이 타고 2주일을 정처없이 떠돌게 된다. 그러다 근방을 지나던 선박 ‘아거스(Argus)’에 마침내 구조된 인원이 단 15명이었다.

 

프랑스 혁명(1789년) 이후 루이 18세의 왕정복고로 반동의 시기를 거치고 있던 당시, 이 사건은 프랑스 사회 전체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먼저 빠져나온 자들은 대부분 귀족과 부자들이었고 버려지고 죽어간 이들은 하급 선원, 노동자들이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 이후 변화되었다고 여긴 현실과는 달리 예전의 신분, 계급 대로의 생존 결과를 보게 된 것이었다. 구체제 “앙시앙 레짐(ancien regime)”은 생명과 죽음의 여전한 경계선이었다.

 

이들 생존자들의 삶과 죽음을 오가는 처절함은 이 <메두사의 뗏목>의 장면에 세세하고도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이미 죽어 있는 자들도 있고 더는 희망을 품지 못한 채 비탄에 빠져 있는 자, 신체의 일부가 사라진 인물도 보인다. 수평선 저쪽을 향해 뭔가 기대를 가져보려는 이들은 이 뗏목에서 서넛을 넘지 못한다.

 

제리코는 난파선에서 살아남은 이들과 직접 만나 이들의 생존기(生存記)를 듣고 작업에 들어간다. 그는 그림의 생생함을 표현하기 위해 시체 보관소에 가서 시신을 자신의 스튜디오에 갖다 놓고 죽은 이의 모습, 피부색까지 연구하면서 이걸 그렸다고 한다. 과거 낭만주의 시기에 주로 그려졌던 왕이나 귀족들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존재들이 그의 화폭에 자리를 채워갔다.

 

그건 승리한 자, 군림하는 자, 위세를 과시하는 자 밑에서 고통을 겪고 신음하는 이들의 현실을 조명한 셈이었다. 제리코가 그토록 심혈을 기울이면서 이걸 그린 것은 그런 시대적 현실에 팽팽하게 압축되어 있는 역사적 긴장상태가 작동했다고 하겠다. 프랑스 혁명의 체험과 그 이후의 우여곡절이 아니고서는 탄생할 수 없는 작품이다.

 

파탄나는 기성의 미학체계

 

<메두사의 뗏목> 그 자체로 돌아가 보자. 멀리 수평선에는 그림을 보는 입장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어떤 배가 지나는 걸 목격한 한 흑인 청년이 자신의 옷을 깃발처럼 흔들고 있고 대부분은 거의 나부러져 실신 상태에 있다. 돛에는 그나마 바람이 차 움직이고 있지만 노를 저어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는 형편도 아니다.

 

이 난파선은 거대한 메두사 호의 남은 조각들이며, 희망과 절망 사이에 존재하는 파편이다. 직면한 현실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암담하고 해결의 수단은 갖고 있지 못하다. “나의 도움이 어디에서 올까?”하는 성서 <시편(詩篇)>의 고독하고 절박한 간구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 그림 속 현실에서 오로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이는 흑인 청년 하나다. 뗏목의 운명을 가늠하는 존재가 이 인물로 완성되고 있다는 것은 사실 놀라운 “사건”이다.

 

포루투갈이 아프리카 북서부 해안을 끼고 노예무역을 한 게 16세기이니 뗏목의 청년이 누구인지는 구별이 어렵지 않다. 더군다나 세네갈 근방을 돌다 표류하는 상황에서 이 흑인 청년이 그림 전체의 중심에 놓여 있다는 것은 현실 인식에서 지진과도 같은 격동이 된다. 제리코는 당대의 당연하게 여기는 미학적 구도를 이렇게 파탄내고 있다. 왜 그런 걸까?

 

<혁명(Revolution)>이라는 탁월한 저작을 쓴 엔조 트라베르소(Enzo Traverso)는 그의 책 첫 장부터 이 그림으로 독자들을 이끌어 간다. 그는 제리코의 작품이 반동의 반격에 처한 프랑스 혁명을 어떻게 구해낼 것인가를 묻고 있다고 해석한다. 거대한 기세로 낡은 시대를 종결지었다고 여긴 혁명이 후퇴를 거듭하다가 난파선의 정치적 운명에 처했을 때 무엇이 요구되는지 이 그림이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말한다.

 

결국 난파된 현실 너머로 시선을 돌리는 용기를 가질 것인가의 문제가 여기에서 제기된다. 돌풍은 불고 수단은 없고 육체는 지쳐 있으며 희망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끊임없이 미래를 향해 시선을 돌리는 이들의 존재가 “메두사의 뗏목”에서 패배, 절망, 죽음이 지배하지 못하게 하는 힘이라는 논지다.

 

하지만 그건 현실의 거대한 압박감을 체험하지 않고 있는 관찰자의 입장에서야 하기 쉬운 일이지만 막상 그런 현실에 봉착한 이들의 삶에서 가능할까?

 

역사에 진입하는 대중의 각성

 

혁명은 과거의 족쇄에서 해방되는 사건이다. 혁명의 역사를 통과하지 않고 발전의 길을 열어나간 사회는 그 어디에도 없다. 그걸 경험하지 못한 사회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귀신처럼 살아있는 과거가 발목을 잡고 진전을 가로막는 일이 허다하다. 혁명은 그래서 모든 인간에게 자유와 희망으로 나서는 유일한 길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각성된 주체”다. 격렬한 변화의 시기에 대중들은 “역사의 소용돌이”에 자기도 모르게, 또는 강제적으로 아니면 의식적으로 진입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격변은 그 자체로 인식 혁명의 근거지’다. 충격적 변화를 겪어야 생각하게 되어 있고, 생각해야 의식의 차원에서 주체적으로 행동하게 되는 계기를 포착하게 된다.

 

 

망명한 혁명가로 <러시아 혁명사>를 쓴 트로츠키는 “혁명의 역사는 처음에는 자신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 대중들이  자신의 운명을 지배할 수 있는 권리의 영역으로 강제진입하도록 만든다. 이러면서 집단적인 의식혁명의 시동이 걸리게 된다.”고 갈파한다. 그런데 이 과정은 승리의 축제만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때로의 패배와 후퇴, 그리고 절망의 계곡을 지나는 걸 필연적으로 요구한다.

 

진짜로 의식이 깨어나는 것은 바로 이 시기다. “뗏목을 타고 난파당하는 비극”은 그 이전에는 평화롭게 바라보던 수평선 너머의 사건에 모든 존재의 기력을 담아 집중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처한 현실은 비록 남루한 뗏목이지만 거기에만 머물러 있지 않은 이들의 “정신적 월경(越境)”이 여기에서 목격된다.

 

제리코는 그 주체를 흑인 청년으로 설정했다. 이것은 모든 기성질서를 정당화하고 때로 신성시만든 정치신학의 붕괴이자 짓밟히고 버려진 존재의 위대한 주체의식의 출현이다. 계급적 멸시, 인종주의적 차별이 뭉뚱그려져 그 육체 자체에 존재하는 이가 “수평선 너머”를 바라보는 의식의 진격으로 뗏목 전체에 희망의 소식과 함께 운명을 바꿀 의지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군주(君主)는 누구인가? 그가 걸치고 있는 옷은 무엇인가? 그 군주는 인자한가? 우리 모두를 난파한 현실에서 전력을 다하여 구하려 하는가?

 

우리가 무너뜨려야 할 군주, 그리고 “촛불혁명”

 

 

우리는 매일 난파된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버려진 이들의 비극을 일상적으로 환기 당한다. 노동하던 현장에서 뜨거운 쇳물에 휩쓸려 종적이 사라지고 남들이 살 집을 짓다가 마른 하늘의 벼락처럼 온 세상이 무너진 자리에서 파묻혀 죽는다. 일회용품처럼 아주 쉽게 버려지고 정처없이 길바닥에서 헤매다가 숨이 멎으면 그 삶은 관료체제에 의해 기계적으로 정리된다.

 

 

우리를 지배하는 군주의 앙시앙 레짐은 “신자유주의”라는 옷을 입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를 해체하고 인간이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될 정치를 소멸시켜 권력자들을 선택하는 문제로 만들어버리고 돈으로만 계산되는 골목으로 우리를 몰아놓고 흥정을 벌인다. 불평등이라도 견디면서 그나마 주는 개평을 받아 살면 이 힘겨운 세상에서 생존자의 권리를 누릴 수 있다고 설득이라는 이름의 협박을 한다.

 

이렇게 길들여진 시민들은 자본의 전제적 지배 자체를 격파할 생각은 꿈도 꾸지 못한다. 그건 너무나도 불온한 일이며 신성한 영토에 함부로 잠입해 들어가는 짓이자 모두가 승인하는 정치신학을 배반하는 이교도(異敎徒)가 되는 길이라고 여긴다. 다 같이 타고 가는 줄 알았던 선박 메두사가 암초에 걸리면 누구는 빠져나가고 누구는  뗏목에 겨우 매달려 타고 가다가 운이 좋으면 사는 거라는 식의 법과 제도에 머리를 숙이고 산다.

 

별 수 없다고 체념하게 하는 것이 합리적이며 온건하고 중도적이며 시민적 양식이라고 교육받는다. 이에 항거하는 것은 그야말로 어리석고 겨우 지탱하고 있는 시민권마저 잃을 수 있다고 노골적으로 암시된다. 우린 이렇게 살고 있다.

 

 

프랑스 혁명은 100년의 시간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육체를 만들어냈다. 러시아 혁명은 결국 좌절하고 말았으나 남긴 유산은 그냥 역사의 쓰레기통에 버려지지 않았다. 거대한 지구적 제국의 현실 앞에서 “해방”이라는 주제를 망각하지 않도록 만들어주고 있기에 트로츠키를 다시 읽고 있는 엔조 트라베르소같은 지식인을 등장시키고 있다.

 

우리의 “촛불혁명”은 어떤가? 2016년의 광장은 열기로 가득찼고, 낡은 권력을 무너뜨린 승리의 체험으로 축제를 벌였다. “재벌개혁”의 구호도 지진처럼 울렸다. 그리고 5년이 흐른 지금 촛불혁명은 어쩌면 “메두사의 뗏목” 신세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함성은 희미한 옛사랑의 추억이고 동지는 간데 없으며 여기 저기 낡아버린 깃발만 나부끼는가?

 

아니다. 도처에서 난파당한 이들의 삶을 끌어안고 함께 하려는 이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역사를 퇴각시키려는 자들의 반동적 반격을 맞받아치면서 연대의 힘으로 생명과 평화, 평등과 진정한 존엄의 길을 열고자 하는 ‘메두사 뗏목의 흑인 청년들’이 우리에게 있다. 그건 인종의 명칭을 넘어 역사적 존재의 호명이다.

 

오늘날의 혁명은 신분과 계급, 인종과 성을 차별의 구조로 만들어 승선(乘船)의 질서를 만들고 난파의 위기에 처하면 하급 선원과 노동자, 흑인을 내버리고 자기들만 빠져나가는 메두사 자체를 공격해야 한다. 그것은 결코 불온하지 않으며 도리어 신성하고 존엄한 우리의 정치신학이다. 진정한 변화는 여기서 시작된다.

 

뗏목에 버려진 이들은 이제 언제 구원하러 올지 모르는 “아거스” 호를 찾을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배를 만들어야 한다. 버림당하는 일도 한두 번이다. 대선이 끝나도 정작 중요한 과제는 남아있다. 군주를 추방하는 일이다. 신자유주의라는 전제정치를 청산하기 위해 군주의 옷을 벗겨 군주제를 무너뜨려야 비로소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는, 자본주의 너머의 공화국이 탄생한다.

 

우리는 지금 뗏목을 타고 혁명하는 자들이다. 수평선 너머, 우리가 정작 봐야 할 것은 무엇인가? 바람이 아직도 몹시 불지만, 우리 자신이 곧 뗏목이 갈 해도(海圖)의 깃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