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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의 하늘의 창(窓)] 미래를 향한 의식의 힘

『희망의 원리』와 미래

 

 

『희망의 원리』를 쓴 에른스트 블로흐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과거에만 머물러 있다고 비판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억압(repression)’에 대한 정신분석에는 역사적 이해가 빠져 있는 것도 아울러 짚는다. 융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역사의식의 부재를 비판한다. 물론 과거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작업에 프로이트가 유효하고 시간에 묶이지 않는 영혼의 깊이로 들어가는데에는 융이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에른스트 블로흐는 무얼 파고 들었던 걸까?

 

한마디로 그건 “미래를 향한 의식”이다. 인간은 거기에서 희망의 근거지를 발견하는 힘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블로흐는 “우리는 기다리는 법도 배우게 된다”며 “그런데 어린 소년은 상자에 들어 있는 물건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열어도 된다는 말이 나오기도 전에 그 상자를 어떻게든 뜯어 열고야 만다.”고 말한다. 기다림이 가리키는 시간이 채 오기도 전에 이미 주어진 것으로 여긴 권리 행사다.

 

이른바 “아직 오지는 않았으나 의식(Not-Yet-Consciousness)”이다. 현재에 만족할 수 없는 인간은 뭔가 찾으려 헤매기도 하는 강한 충동을 가진 존재다. 우리의 의식에는 아직 이뤄지지 않았으나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Already)” 여기는 흥분과 갈망이 솟아나는 순간 그건 유토피아를 향해 가는 동기로 작동한다. 희망은 그렇게 태어나 인간을 미지의 시간과 공간으로 이끌고 간다.

 

블로흐가 이 책을 쓰기 시작했던 시기는 나치가 지배한 1938년이었다. 그는 파시즘의 도래를 우려하고 경고했으며 그런 까닭에 결국 망명자의 처지가 된다. 마르크스주의자였던 그를 히틀러가 그대로 두지 않았을 것은 분명했다. 어두운 시대의 서막이었다. 그런 현실에서 모두가 좌절하는 상황을 토대로 쓴 책이라는 점은 그가 말하는 “희망”이란 그저 관념철학의 상상물이거나 감상적 기대가 아니었던 것이다.

 

'인식의 효모’ 그리고 모험

 

그건 좌절의 시대를 이기고 돌파하는 힘으로서의 희망을 말하는 것이었다. 좌절과 패배의 시간에 도리어 가장 간절한 것은 희망이고 그건 미래를 향해 움직일 수 있는 의식이다. 그렇지 않으면 주저앉게 되는 것은 필연이다. 이는 훗날 한나 아렌트가 말했던 “인식의 효모(fermenta congnitionis)”다. 하나 더 덧붙인다면 아렌트는 “인간이 인간답게 되는 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과 인격을 공공영역으로의 모험에 바칠 때 형성되는 것”이라고 한다.

 

블로흐와 아렌트의 말을 하나로 묶으면 미래를 향한 의식은 그런 점에서 공공의 모험이다. 그리고 이것은 마치 효모처럼 애초에는 미세하지만 점점 부풀어 사람들의 뇌리를 차지하기 시작하고 그로써 역사적 운동으로 발전해나갈 수 있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며 “너희들은 누룩처럼 번져라”라고 했던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거기에는 각자가 지고 갈 ‘십자가’라는 모험이 요구된다.

 

이 모험은 언제나 공포와 대치하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공포는 아렌트가 주목했던 것처럼 “사람의 사기를 꺾고 모든 사물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미래를 향한 의식의 모험은 이 공포를 이기는 과정이기도 하다.

 

『희망의 신학』 그리고 해방의 길

 

 

신학자 몰트만은 블로흐의 『희망의 원리』에 충격을 받고 1964년 『희망의 신학』을 출간한다. 영문 번역판이 1967년에 나오자 뉴욕 타임즈는 “‘신은 죽었다’ 신학”은 ‘희망의 신학’에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라고 썼다. ‘신은 죽었다’ 신학은 더는 서구 기독교가 말하는 신학이 존재할 자리는 없다는 선언이었다. 종교의 시대를 끝낸 세속화의 현실은 그런 주장이 먹힐 상황이었다.

 

이는 이미 니체가 선언한 바 있는 주장의 발전이었다.

 

”신은 죽었다. 신은 죽은 채로 그대로 있다. 우리가 신을 죽인 것이다. 모든 살해자들을 살해한 우리를 위로할 방법이 이제 있기는 한 것인가?”

 

결국 인간은 그 자신을 스스로 넘어서지 않으면 미래는 오지 않는다는 니체의 고백은 인간을 외롭게 만든 셈이기도 하다. 니체나 블로흐와는 달리 몰트만은 “십자가에 매달린 신(the crucified God)”이 바로 희망의 본토라고 강조하고 나섰다. 고난받는 하나님의 모습은 이성적 사유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미지다. 그런데 그것은 인간의 고난과 함께 하는 신이라는 설명에 이르면 인간은 홀로가 아니라는 생각에 미친다.

 

그리고 “십자가에 매달린 하나님 신학”은 그 고난의 절정에서 부활의 시간이 있음을 우리에게 일깨운다. 이로써 희망은 좌절의 늪에서 생명을 일깨우는 사건이 된다. 『희망의 신학』에 대한 뉴욕 타임즈의 논평은 바로 이런 논리에 주목한 결과다. 모든 능력을 가진 절대자라는 신에 대한 서구신학의 오랜 전통은 여기서 깨지고 고난과 좌절에서 태어나는 미래의식을 주목한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구티에레스의 『해방신학』과 제임스 콘의 『흑인신학』은 한 걸음 더 나간다. 『억압받는 이들의 하나님(God of the Oppressed)』에서 제임스 콘은 서구 신학의 진보적 논리도 제3세계의 인류가 겪고 있는 역사적 고통과 좌절에 눈을 돌리지 않았다고 반격한다. 따라서 교회에서 부르짖는 “아멘”은 “고난의 역사에 함께 하겠다는 결의”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몰트만은 이런 도전을 그대로 받아들여 자신의 신학을 새롭게 구성하게 된다.

 

몰트만이 『희망의 신학』을 썼던 시기는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의 세계적 확산과 조만간 터질 유럽의 1968 혁명의 내부 모순이 들끓고 있던 시기로 전쟁과 혁명의 시간이 겹쳐 진행된 소용돌이의 시대였다. 미국의 경우 인권운동의 물결이 파도를 이룬 상황에서 폭력과 희망이 엇갈린 때였으니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한 정신적 돌파구가 간절했다.

 

파시즘에 대항해온 희망, 전쟁과 제국주의 그리고 인종차별과 대결한 희망의 철학, 신학, 사상의 배태(胚胎)가 진행된 역사였다. 실로 하나의 시대정신, 사상은 이렇게 요동치는 현실과 마주하면서 끈질기게 싸우는 과정의 산물이다. 그것은 다시 블로흐와 아렌트로 돌아가자면 “미래를 향한 의식의 운동”이자 “모험”이기도 하다. 또한 몰트만과 제임스 콘을 더하자면 “고난받는 역사에 ‘아멘!’하고 동참하는 행동과 실천”이다.

 

기만당하지 않는 존재를 위해

 

 

게오르그 루카치는 그의 『역사와 계급의식』에서 레닌의 사상을 거론하는 가운데 그가 마르크스주의를 “실천(praxis)의 철학”으로 확정했다고 강조한다. 영국의 마르크스 사회학자 토마스 보토머어(Thomas Bottomore)가 언급했듯이 “마르크스주의는 기본적으로 혁명의 과정에 대한 지적 표현”이라는 점에서도 루카치의 레닌에 대한 규정은 타당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사유의 논리는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부르주아의 헤게모니는 소수 지배체제라는 점에서 다수의 노동계급을 끊임없이 기만해야 한다. 그래서 이들 노동계급이 자신의 주체성을 인식하지 못하도록 이들의 계급의식이 형태를 만들지 못하도록 한다.”

 

이는 달리 말해서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에 대한 인식과 통찰이 생기는 것과 노동계급이 자신의 처지에 대해 명확히 이해하는 것을 저지하는 작업”이다. 이걸 해체하는 노력과 과정이 없으면 부르주아의 헤게모니는 꿈쩍도 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현실에 대한 구조적 해부를 하는 지적 능력은 인간을 힘있게 만든다.

 

 

시인 김수영은 1960년 5월, “자유란 생명과 더불어”라는 제목 아래 이런 글을 남긴다.

 

“지성인은 원래 우리말로 바꿔 말한다면 ‘선비’라 할 진데, 정의를 갈구하는 이유에서 자기 몸을 항시 항거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게 돼 있을 것이다.... 생각해 보라. 우리는 얼마나 뒤떨어져 있는가. 학문이고 문학이고 간에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가. 이 벅찬 물질 만능주의의 사회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정신의 구원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항거하는 자가 추구하는 정신의 구원은 결국 의식의 문제다. 의식의 세계가 좁으면 실천도 좁아진다. 의식의 세계에 미래를 향한 동력이 없으면 과거에 머무르고 만다. 좌절과 패배도 이겨내지 못하고 비통한 시간에 빠져 허우적 댈 뿐이다.

 

김수영은 이런 시도 남겼다. “육법전서와 혁명”의 일부다.

 

 

“기성 육법전서를 기준으로 하고/혁명을 바라는 자는 바보다/혁명이란/방법부터 혁명적이어야 할 터인데/이게 도대체 무슨 개수작이냐/불쌍한 백성들아/불쌍한 것은 그대들 뿐이다/천국이 온다고 바라고 있는 것은 그대들 뿐이다/최소한도로/자유당이 감행한 정도의 불법을/혁명정부가 구(舊)육법전서를 떠나서/합법적으로 불법을 해도 될까 말까한/혁명을...//그 놈들은 털끝만치도 다치지 않고 있다.”

 

권력의 불평등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육법전서를 넘어서는 의식과 의지가 아니면 새로운 세상은 오지 않는다. 그건 아직 오지 않았으나 이미 온 것으로 여기는 실천적 상상력이 만들어 낸다.

 

우린 얼마나 많은 고난의 강을 건너온 민족인가. 얼마나 숱한 투쟁의 역사를 피로 써온 사람들인가? 그러니 2022년 대선의 결과 앞에서 망연자실(茫然自失)하는 시간은 짧을수록 좋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자(敗者) 아테네쪽에 섰던 투키디데스는 전쟁사의 위대한 기록을 남겼다. 사마천은 궁형의 고통을 이겨내고 『사기(史記)』를 써내려갔다. 그 서문에 기막힌 역사를 겪은 이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것은 유명한 대목이 아닌가?

 

“서백이 갇힌 몸이 되자 『주역』을, 공자가 위기를 겪으면서 『춘추』를, 굴원은 쫓겨나면서 『이소』를, 좌구는 시력을 잃자 『국어』를, 그리고 손자는 발이 잘리는 형벌을 받고는 병법을 지었으며... 모두 마음에 맺힌 바 있으나 지나간 길을 기록해서 미래를 생각했다.”

 

우리의 2022년은 무얼 만들고 써내려갈 것인가? 어떤 미래를 의식속에 담아낼 것인가?

 

파시즘의 공포와 정치검찰의 공작 정치가 지배하리라는 예감 앞에서 아직은 오지 않았으나 이미 와 있는 새로운 미래를 우리의 의식 속에 태어나게 해야 한다. 그건 용기이자 모험이며 고난이나 항거이며 특권동맹세력의 진지를 해체하는 역사의 진군이다.

 

 

촛불혁명은 멈춘 것이 아니다. 육법전서를 넘는 혁명의 실천만이 있을 뿐이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예수의 선포는 아멘! 하며 동참하는 응답으로 이루어진다.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은 이에게 주어지는 선물은 이미 와 있다. 어린 소년처럼 기대에 차 상자를 열고 꺼내 보는 것이다. 미래는 언제나 우리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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