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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의 하늘의 창(窓)] 법의 얼굴

 

『이방인』의 살인사건 그리고 재판

 

“Aujourd’hui, maman est morte”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L’Étranger)』 그 첫 문장이다. 프랑스어 원문을 번역하면 “오늘 우리 엄마가 죽었다.”이다. 이 소설은 이렇게 시작되고 중간에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펼쳐지나 결국 한 살인사건을 다룬 셈이 된다. 주인공 뫼르소(Meursault)는 어느 날 바닷가를 산책하다가 태양이 눈부시다는 이유로  기분이 나빠지면서 우연히 마주친 한 아랍인에게 총을 겨눠 격발한다. 4발을 더 쏘아댔다.

 

재판이 벌어지자 변호사는 뫼르소의 모친이 죽었다는 사실을 거론하며 상황을 유리하게 끌고 나가고자 한다. 형량이라도 줄여보려고 마음이 슬프고 괴로운 처지였다는 걸 부각시키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뫼르소는 이 모든 것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고 재판장은 뉘우치지 않는 그의 모습에 분노, 사형을 언도하게 된다.

 

모든 게 합리적으로 설명이 되지도 않고 납득시키려 들지도 않는 까뮈의 뫼르소는 이른바 삶의 부조리를 상징하는 인물로 읽혀왔다. ‘maman’은 프랑스어로 어머니를 다정하게 부르는 애칭인데 그렇게 사랑하는 이를 잃어버린 존재가 햇살이 강렬해서 불쾌한 기분이 되었다고 다른 누군가의 목숨을 아무렇지도 않게 빼앗는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그 아랍인은 뫼르소의 어머니가 죽게 된 원인 제공자도 아니고 그 밖에 다른 어떤 이유와도 연결이 되지 않는다. 억울한 죽음이다. 죽은 아랍인의 이름은 끝내 나오지 않는다. 무명의 존재로 처리된다.

 

자, 그렇다면 『이방인』의 내용을 우리는 그저 부조리극의 한 장면처럼 해석하고 말면 그뿐일까? 사건의 현장은 프랑스의 식민지인 북 아프리카의 알제리였고 까뮈는 이곳에서 1913년에 태어난다. 알제리는 이슬람 국가이며 1870년 프랑스 제국의 지배 아래 들어갔고 치열한 독립전쟁으로 1962년에 독립하게 된다. 까뮈의 『이방인』은 1942년에 출간되었다.

 

알제리 독립투쟁은 2차 세계대전이 종료되고 과거의 식민지들이 독립하기 시작했을 때 프랑스에게는 중대한 문제가 된다. 그것은 이후 베트남 전쟁이 세계적 양심의 문제가 되었던 것과 비견될 사태였다. 『이방인』에서 뫼르소는 한 프랑스 남자였지만 바로 이런 역사적 현실을 맥락으로 삼고 보면 그는 프랑스 식민통치의 지배세력에 속했고 그의 총에 맞아 죽은 이는 식민지 알제리의 원주민이다.

 

제국 프랑스 전체의 죄는? 인종주의의 지배

 

살인 사건의 재판을 대하는 판사는 죄를 짓고도 반성하지 않는 뫼르소의 감정이 사라진 모습에 분노하고 사형선고를 내리지만 뫼르소만이 아니라 프랑스 전체가 까닭없이 알제리 원주민들을 착취하고 죽이는 그 현실에 대해서는 분노하지 않는다. 그런 건 아예 그의 판단에 어떤 의미도 지니지 않고 있다. 알제리인들은 그렇게 이름도 호명되지 못한 채 죽어갔다.

 

이 소설을 알제리인들이 읽는다면 어떻게 생각하게 될까? 일제 강점기에 식민지 조선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그래서 그걸 소설로 삼은 일본 작가의 작품을 조선인들이 읽으면서 삶의 부조리극이라는 해석에 공감하게 될까? 판사가 범행을 저지른 자의 냉담함에 분노하면서 사형언도를 내리는 서사에 그나마 위안을 얻게 될까?

 

뫼르소의 범죄를 다룬 이 재판과 해석에는 바로 그런 보다 큰 맥락이 완전히 삭제되어 있다. 『이방인』은 따라서 한 개인의 부조리극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식민지 알제리’에서 벌어지는 일상적 부조리극이 된다. 그리고 그건 언제나 무명으로 취급되는 희생자들을 낳게 마련이다. 여기에는 인종주의가 작동하고 있었다.

 

오늘날 여전히 인종주의에 지배되는 정치문제를 안고 있는 대표적인 사회는 미국이다. 동일한 범죄에 대한 흑인과 백인의 처벌방식과 그 무게는 전혀 다르다. 더군다나 경찰에 의해 살해당하는 흑인들은 매년 1000명에 달한다. 그러나 감옥에는 백인이 대부분 간수이고 죄수들은 흑인으로 계속 채워지고 있다. 인종통제 정치의 형사제도가 무섭게 군림하고 있는 현실이다.

 

미국에서 학교의 흑백분리정책이 없어진 계기는 1954년 그 유명한 ‘브라운 VS 교육위원회’ 판결이었다. 그 이전에는 로 스쿨의 흑인 입학은 하늘의 별따기였다. 텍사스 로 스쿨에서는 아예 흑인 입학이 주법(州法)으로 금지되었다. 이게 풀린 것이 1950년의 판결이었다. 1946년 히먼 마리온 스웻(Heman Marion Sweatt)은 텍사스 로 스쿨에 입학신청을 했으나 거부당했고 대법원은 마침내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 재판은 바로 ‘브라운 VS 교육위원회’ 판결로 가는 길을 만들어냈다.

 

“분리되나 평등하다(separate but equal)”는 원칙으로 흑백분리정책을 정당화한 현실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그저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쟁투의 결과였다. 분리 자체가 차별이고 불평등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걸 정책으로 만들어버리는 순간, 인종차별은 거대한 사회제도가 되고 만다. 그러니 거리에서, 법정에서 사회 전체의 편견, 선입관, 몰이해를 해체시켜나가는 운동이 아니고서는 법과 제도로 강고하게 옹호되고 있는 현실을 바꾸어낼 수 없었던 것이다.

 

법정은 다만 기성의 법과 다투는 것만이 아니다. 법을 운용하는 전문가들인 법조인이 가지고 있는 사고와 끊임없이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현장이기도 하다. 배심제도가 있는 경우 배심원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들의 생각도 이 투쟁의 대상이 된다.

 

편견과의 싸움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To Kill a Mockingbird)』는 1930년대 미국의 어느 작은 마을 메이콤이라는 곳을 무대로 펼쳐지는 재판을 다루고 있다. 가상의 마을 메이콤은 인종차별이 강한 미국 남부의 앨라바마를 현실로 삼는다.

 

한 백인 여성을 성폭행했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된 흑인 청년의 사건은 사실 이 백인 여성이 성적으로 접근한 당사자인데 거꾸로 뒤집어 씌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걸 믿어줄 사람이 있을까?

 

여자의 요구를 거부한 청년 톰은 여자가 도리어 소리를 지르자 밀치고 도주했는데 바로 이 도주가 문제가 되었다. 잘못한 게 없는데 왜 달아났는가, 명백한 범죄의 증거 아니냐는 질문이 이어진다.

 

반대심문과정에서 변호사가 묻는다.

“왜 달아났지요?”

“너무 겁이 나서였어요.”

“왜 겁이 났습니까?”

“변호사님도 저처럼 깜둥이였다면 겁이 났을 겁니다.”

 

이게 톰이 놓여 있는 현실, 그 맥락이다. 이걸 알지 못하면 도주는 범죄의 입증이 되어버린다. 변호사 애티커스 핀치는 배심원들에게 이렇게 말하기 시작한다.

 

“배심원 여러분들은 모든 흑인은 거짓말을 한다는 가정 – 물론 그것은 잘못된 가정이지요 – 모든 흑인은 기본적으로 부도덕한 인간이라는 가정, 모든 흑인은 우리 여자들 주위에 믿고 내버려 둘 수 없다는 가정, 우리가 그들의 정신과 관련짓는 그런 가정을 따르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말입니다. 그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흑인 청년 톰의 피부처럼 새까만 거짓말입니다.”

 

이 문장을 잘못 이해하면 톰의 존재 자체가 그 살색처럼 새까만 거짓말이 되는 셈이나 변호사의 이야기가 지목하고 있는 것은 피부색으로 진실과 거짓을 판단하는 것은 지독한 오류라고 하겠다. 인식이 그렇게 굳어 있다면 재판은 하나마나가 된다. 결론은 시작부터 정해져버리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 해서 “진리 또는 진실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말과 함께 그 진실부터 해방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미국의 진보적인 법률가 마이클 타이거(Michael Tigar)는 법은 지배세력의 이해를 이데올로기화 한 체계라는 점도 꿰뚫어봐야 한다면서 “법을 둘러싼 신화를 해체”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먼저 해야 할 법률가들의 일이라고 강조한다. 재판은 공정(fair trial)할 것이라는 생각따위는 애초부터 지워야 하며 피고가 유죄를 인정하거나 다른 제삼자의 죄를 증언하는 대가로 형량을 줄여준다는 ‘플리 바긴(Plea Bargain)’같은 것에도 간단히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그렇게 되는 순간, 법정에서 변호인에 의한 보다 적극적인 방어가 무너질 수 있으며 자신에게도 유리한 증거를 제출해야 하는 검사 측의 의무를 문제삼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법은 그 법의 조항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로 판단되지 않고 그 법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법정은 그 법의 운용자인 인간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법에도 색깔이 있다

 

그렇기에 이들이 가진 가치판단, 의식, 미리 입력된 정보가 법을 지배하고 이런 것들이 법조문보다 더 큰 위력을 발휘하는 현실은 법정이 하나의 극장이 될 것인지 아니면 진실과 거짓이 공정하게 싸울 수 있는 무대가 될 것인지를 결정한다. 인종차별이 지배하고 있는 사회에서 ‘법이 색맹(Law is colorblind)’라면 모르겠거니와 법에는 색깔이 있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저명한 교육자이며 법학자인 리처드 로쓰스타인(Richard Rothstein)이 지난 2017년에 낸 저서 『법의 색깔(The Color of Law)』이 일깨운 바다.

 

 

로젠버그 부부 스파이 사건은 핵 정보를 소련에게 넘겼다는 것으로 1953년 사형을 당한 미국 냉전시기 가장 논란이 된 경우였고 지금도 이들의 무고함을 주장하는 증언은 이어지고 있다. 이를 소설로 낸 E.L. 닥터로(Doctorow)의 작품 『다니엘서』는 로젠버그 부부의 가상의 아들 다니엘을 중심으로 그 사건을 풀어내고 있다. 다니엘은 이렇게 독백한다.

 

 

“대배심을 거쳐 내려오는 각각의 새로운 기소는 음모를 더욱 완벽하게 만들고 그것을 확대시키고 그것에 외부의 행위를 더하고 그것을 수렁으로 몰고 가고 있었다.”

 

냉전의 집단 히스테리가 만들어내고 있는 이성의 붕괴와 그 결과에 따른 비극의 제작이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법은 이런 현실과 결탁해서 없는 스파이가 만들어지고 전기의자에 이들을 앉히는 사태까지 벌어지고 만다. 아니 그런 판결 이전에 이들과 같은 존재는 그 사회의 전기의자에 강제로 묶여 이미 처단된 뒤였다. 법은 그걸 사후 추인하는 절차에 불과했던 것이다.

 

 

우리 사회는 지금 법의 공정성, 검찰권력의 현실과 같은 중대한 문제 앞에 직면하고 있다. 한 젊은이의 경우는 명백하게 입증되지 않은 표창장 위조 혐의 하나에 대한 판결로 그 삶의 과거가 지워지고 그 미래는 송두리째 망가지고 말았다. 집단적 히스테리가 가공된 결과 그 히스테리의 현실 속에서 유독 누군가에게만 그물망이 촘촘한 법, 폭력이 된 교육이 하나가 되어 법에게도 색깔이 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그 ‘색깔’은 만들어진 ‘낙인’이다.

 

이걸 만든 자들은 도대체 누구일까? 이것부터 밝히지 않으면 법은 모두에게 평등한 사회적 합의가 아니라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이 말하는 것처럼 "누군가는 보다 평등한 자들"의 손에 쥐어진 무기일 뿐이다. 그건 흉기다.

 

법의 진정한 얼굴을 되찾아줘야 한다. 그러자면 법을 지배하고 있는 자들의 얼굴부터 알아봐야 한다. “오늘 우리의 법, 그 정의가 죽었다.”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뫼르소처럼 냉담한 것이 아니라 가슴을 쥐고 애통해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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