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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규의 광고로 세상읽기] ⑧ 쇼킹에 의한 쇼킹을 위한 광고, 베네통

 

 

1.

현대인의 별명 가운데 ‘10만분의 1초 휴먼(nano second human)이란 게 있습니다. 사물과 사건에 대한 집중력이 그만큼 단속적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오늘날이 커뮤니케이션 과잉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전통적(legacy) 미디어와 디지털 미디어를 포함한 대중매체의 폭발적 증가와 정보 홍수가 일상적 현상이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현대인들은 주위에 흘러넘치는 정보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는 습관이 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생각하거나 이해관계가 큰 정보에만 선택적으로 주의를 기울이고 나머지는 무시하는 것이 그 때문이지요. 이걸 커뮤니케이션학에서는 선택적 주목(selective attention)이라 부릅니다.

 

선택적 주목이 가장 강한 대상이 광고입니다. 가격이 아주 낮거나 성능이 압도적으로 뛰어나거나 또는 눈에 번쩍 띄는 아이디어가 없으면 주목 자체를 하지 않는 거지요. 광고 표현에서 충격성(impact)과 극단성(extremeness)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원인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처럼 사회적 금기를 노골적으로 파괴함으로써 주목을 이끌어내는 광고. 수단 방법을 안 가리고 일부러 강한 흥미를 자극시키는 콘텐츠를 보통 쇼킹광고(shocking advertisement)라 부릅니다. 이런 유형의 크리에이티브가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90년대부터입니다. 베네통(Benetton) 광고가 원조(元祖)지요.

 

패션 브랜드 베네통은 1955년 이탈리아 트레비소에서 태어났습니다. 루치아노 베네통이 동생들과 소규모 의류장사를 시작한 것이 출발점이었지요. 10년 후 벨루노에서 첫 번째 정식 매장을 오픈하고, 1969년이 되면 파리에서 첫 해외매장을 엽니다. 그리고 1979년이 되면 미국으로까지 진출하게 되지요. 오늘날 베네통은 전 세계 120여 개국 8000개 이상 매장에서 패션, 향수, 악세사리, 시계, 스포츠용품, 화장품을 판매하는 토탈 패션 브랜드입니다. 베네통을 지금 위치로 성장시킨 원동력은 시대를 앞서가는 다국적 마케팅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무기가 광고였지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올리비에로 토스카니(Oliviero Toscani)《그림 1》가 주역입니다. 1990년대를 대표하는 스타 광고인이었던 그는 광고인으로 불리는 것을 평생 거부했습니다. 자기는 예술을 추구하는 사진가라는 거지요. 실제로 토스카니의 창조 영역은 광고에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1993년 베네통 그룹 안에 ‘파브리카(Fabrica)’라는 연구센터를 설립한 후 사진, 출판, TV 프로그램과 영화 제작 등의 폭넓은 활동을 펼쳤지요. 그 밖에도 자기 이름을 딴 와인회사, 올리브농장, 목장을 운영하는 등 다방면에서 활약합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을 세상에 깊이 각인시킨 것은 역시 광고였습니다.

 

 

 

2.

토스카니는 1942년 이탈리아 밀라노 '코리에레 델라 세라(Corriere Della Sera)' 신문에서 일하던 사진기자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영국신문 '가디언(Guardian)'과 인터뷰에서 그는 “언제부터 사진에 관심이 생겼는가? 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합니다.

 

“태어날 때부터요. 저는 태어날 때부터 예술가였어요. 누가 물어도 이렇게 대답하죠. 제 아버지가 일간지 사진기자였으니 저의 재능이 거기서 비롯됐을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하지만 그게 제 전부를 설명하지는 못하죠. 저는 찍고 싶은 사진들을 찍어 왔어요. 원하는 세계에서 살았고, 원하는 방식으로 살았고,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으니까요.”

 

1965년 취리히미술학교에서 사진을 전공한 후 '엘르', 'GQ' 등의 유명 잡지에 사진을 게재하면서 서서히 이름을 알립니다. 그가 세계적 주목을 끌게 된 출발점은 1984년부터 시작된 베네통의 광고 캠페인이었지요. 설립자 루치아노 베네통은 토스카니를 이탈리아 패션업계의 실력자 엘리오 피오루치(Elio Fiorucci)를 통해 소개받았습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캠페인의 구체적 전개와 내용을 일임해버립니다. 그만큼 믿었던 거지요.

 

토스카니는 독특한 인물이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상업적 광고를 만들면서도 한사코 스스로를 예술가로 자처합니다. 그를 고용한 베네통 일가와의 관계를 르네상스 시대 미켈란젤로와 교황의 관계에 비유했으니까요. 자기는 그저 예술을 추구할 뿐이고, 광고주는 그에 대한 비용을 광고를 통해 지불한다는 거였지요. 다음의 발언을 들어보세요.

 

“역사적으로 보면 수많은 예술작품이 결국 광고였어요. 이데올로기나 제품을 팔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들은 모두 교황을 위해 일했어요. 그런 방식으로 교황은 어느 시대나 어느 곳에나 있는 겁니다.”

 

물론 이런 말을 했다고 이 남자를 그저 철없는 예술 지상주의자로 오해하면 곤란합니다. 발언의 배후에 광고의 본질에 대한 정교한 관점이 숨어있기 때문이지요. 토스카니는 다음과 같이 강조합니다.

 

“스웨터의 소매는 두 개고, 울(wool)은 그냥 울이다. 제품은 대동소이하다. 차이는 커뮤니케이션이다.”

 

효능과 가격이 비슷비슷한 제품끼리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현대 자본주의 시장. 이때 브랜드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는 것은 제품력 자체가 아니라는 겁니다. 광고를 통해 해당 브랜드의 독특하고 고유한 이미지를 창조해낼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있다는 거지요.

 

 

3.

토스카니가 만든 첫 번째 베네통 광고는 아동복을 대상으로 했습니다. 첫 작품에서부터 벌써 독창성이 반짝반짝합니다. 아동복 광고인데도 아이 모델을 쓰지 않은 겁니다. 그 대신 테디베어(Teddy Bear) 인형을 등장시켜 독자의 주목과 흥미를 이끌어냅니다. 그는 이런 방식으로 상식의 허를 찌르는 아이디어의 귀재였습니다. 무엇보다 카피를 극도로 줄이고 비주얼 중심의 임팩트를 고집한 것이 특징입니다(사진가 출신이니 당연한 일인지도). 십 몇 년 동안 베네통 캠페인에 등장한 언어적 요소는 “United Colors of Benetton”이란 슬로건 딱 하나 뿐이었습니다. 인종과 종교 갈등, 차별과 폭력 같은 반목을 이겨내고 인류는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오직 비주얼을 통해 풀어낸 거지요.

 

그가 사진으로만 승부를 건 것에는 마케팅적 이유도 있었습니다. 베네통 모(母) 회사의 자금력이 부족했던 겁니다. 그럼에도 전 세계를 무대로 다국적 광고 캠페인을 펼쳐야 했지요. 이를 돌파할 유일한 방법이 사진을 통한 이미지 광고였던 겁니다. 언어는 나라마다 다르지만 비주얼은 만국공통으로 이해가 되기 때문이지요. 토스카니가 국적과 언어를 불문하고 누가 봐도 쉽게 이해가 되는 쇼킹한 비주얼 스캔들(visual scandal)을 구사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가장 주목되는 건 그동안 어떤 광고에서도 쓰지 않던(못하던), 사회적 금기를 과감히 깨어 부시는 행보였습니다. 왜 이런 도전적 시도를 했을까요. 패션의류의 경우 비싸든 싸든 간에 옷의 본질적 기능은 동일합니다. 소비자들이 옷을 입는 게 아니라 브랜드를 입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여러분도 그렇지요?)

 

토스카니는 ‘베네통’이 차별적이고 강력한 이미지를 지니지 못하면 쟁쟁한 경쟁 패션 브랜드를 제치고 세계 시장에 뿌리를 내리기 힘들다는 것을 간파했습니다. 그래서 태어난 것이 쇼킹광고 시리즈인 겁니다. 그는 한다하면 하는 인물이었습니다. 한번 방향을 결정하자 무섭게 밀어붙입니다.

 

 

4.

그러면 1990년대를 강타한 베네통 광고 캠페인을 차근차근 살펴보기로 할까요. 먼저 《그림 2》는 1991년 집행된 작품입니다. 침대 위에서 죽어가는 남자 주위에 가족들이 모여 슬퍼하고 있습니다. 설정이 아닙니다. 실제 장면을 사진에 담은 겁니다. 사회운동가였던 에이즈(AIDS) 환자 데이비드 커비(David Kirby)의 임종 직전 모습을 광고에 그대로 사용한 거지요. 이 작품은 세계적으로 격렬한 논란을 불러일으킵니다. 인간의 죽음을 상업주의 도구로 삼았다는 점에서 특히 기독교계가 강한 분노와 비판을 쏟아냅니다.

 

 

하지만 토스카니는 이런 반발을 대놓고 조롱합니다. 이듬해인 1992년 (보란 듯이) 종교적 금기를 더욱 파괴하는 작품을 만들었기 때문이지요. 이번에는 신부와 수녀가 키스를 하는 장면을 광고로 내보낸 겁니다《그림 3》. 타오르는 불에 기름을 부은 듯한 반발이 터져나온 것은 당연한 일.

 

이 남자는 오히려 그 같은 논란을 즐깁니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예술가니까. 세상의 상투적 규범을 깨트리는 예술행위를 하고 있는 건데 뭐가 두렵겠습니까. 거기에 덤으로 베네통 브랜드에 대한 관심과 주목을 극대화시키고 있는데 금상첨화가 따로 없지, 이렇게 생각한 겁니다.

 

 

《그림 4》는 1992년의 보스니아 내전 시기에 나온 광고입니다. 전쟁터에서 총을 맞고 숨진 병사의 셔츠를 광고사진으로 그대로 옮긴 겁니다. 보스니아(크로아티아계 주민 포함)와 세르비아 간 전쟁은 최대 30만 명이 숨진 20세기 후반 최악의 전쟁이었습니다. 그 결과가 얼마나 참혹했던지 보스니아에 ‘유럽의 킬링필드’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입니다.

 

 

 

그런 비극을 광고에 이용하다니! 다시 폭발하는 분노의 목소리에 토스카니는 이렇게 답합니다. “이 작품은 보편적 인권 문제에 대한 대대적 환기를 위한 것이다!”설명이 그럴듯하지요? 문제는 아무리 광고라 해도 형식과 내용이 완전히 동떨어질 수 없다는 겁니다. 겉보기에 목적이 그럴싸해도 표현이 이정도 수준이면 불쾌감을 자극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피를 쏟으며 죽어간 젊은 병사의 죽음을 악용했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려운 거지요.

 

 

5.

토스카니가 간과한 것이 있었습니다. 인간은 때때로 자극과 일탈을 즐기지만 언제까지나 그 런 충격을 감내하도록 설계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마약의 효과를 보세요. 처음에는 짜릿하고 자극적입니다. 하지만 내성이 생기면 어떻게 됩니까. 자꾸 더 많은 양을 투약해야 합니다. 광고가 주는 자극도 다를 바가 없는 거지요.

 

상궤(常軌)를 벗어난 베네통의 크리에이티브가 일시적 주목을 받을 수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언제까지고 힘을 발휘할 수는 없었지요. 차별적 브랜드 이미지를 획득하려고 시작한 캠페인이 거꾸로 브랜드 이미지 자체를 경박하고 부담스럽게 만들기 시작한 겁니다. 과유불급(過猶不及), 네 글자가 딱 어울리는 상황이 된 거지요. 결정타는 2000년 1월에 터집니다. 잔혹한 범죄로 사형선고를 받은 실제 살인범의 얼굴을 버젓이 광고에 실은 겁니다《그림 5》.

 

 

 

 

도발과 금기 파괴에도 넘어서는 안 될 선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계속, 일부러 넘어서면 평범한 사람들도 분노하게 됩니다. 유례를 찾기 힘든 비난이 터집니다. 미국을 시작으로 거센 불매 운동이 시작된 거지요. 사태가 걷잡을 수없이 확산되고 드디어는 치명상을 입히는 수준으로 발전합니다. 베네통 브랜드 전체 품목의 매출이 급격히 추락한 겁니다. 토스카니는 회사 안팎에서 궁지에 몰립니다. 결국 베네통 경영진이 결단을 내립니다. 캠페인에서 완전히 손을 떼라고 말이지요.

 

 

6.

토스카니가 퇴장하고 21세기가 시작된 후에도 베네통은 여전히 쇼킹 콘셉트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영국 출신 전설적 크리에이터 존 헤가티가 제작한 2012년 캠페인을 보실까요. ‘언헤이트(Unhate)' 즉 미워하지 말자, 라는 시리즈 광고입니다. 국가와 집단 간에 쌓인 증오를 풀고 하나가 되자는 슬로건이지요. 《그림 6》의 광고를 보십시오. 두 남자가 키스를 하고 있군요. 당시 남북한을 대표하던 이명박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입니다. 물론 현실의 모습은 아니고 포토샵으로 합성한 가상의 장면이지요.

 

 

 

베네통은 이밖에도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 메르켈 독일 총리와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교황 베네딕토 16세와 이슬람 지도자 아흐메드 모하메드 엘 타예브, 팔레스타인 대통령 마흐무드 압바스와 이스라엘 수상 베냐민 네타냐후 등 오랜 앙숙 관계 지도자들이 키스하는 장면을 연속으로 내보냅니다. 과거의 명성을 되찾기 위해 안간힘을 쏟은 거지요.

 

‘Unhate’ 캠페인은 많은 국제광고제에서 상을 받습니다. 하지만 대중들은 여전히 의혹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소비자 정서에 불쾌한 낙인이 찍힌 브랜드는 회복이 어려운 거지요. 베네통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중저가 싸구려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인지도라도 높았지만, 이제는 그것까지 잃은 상태로 말이지요.

 

엽기에 가까운 비주얼 쇼크로 주목을 이끌어낸 베네통 캠페인은 1990년대를 떠들썩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지만 폭발적 주목에 비해 긍정적 브랜드 자산(brand equity) 획득에는 실패했습니다. 노이즈 마케팅에 가까운 방식으로 브랜드를 알리는 데는 성공했지요. 문제는 소비자의 심리적 수용 한계를 넘어서면서 그것이 오히려 부정적 인지(認知)로 귀착되어버렸다는 겁니다.

 

토스카니는 베네통 캠페인에서 손을 뗀 후에도 상호 관계를 청산하지 않았습니다. 2018년 설립자 루치아노 베네통이 82세의 나이로 경영 일선에 복귀하면서 토스카니도 다시 베네통으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흘러간 강물을 되돌릴 수는 없는 법, 그가 1990년대에 누리던 명성을 다시 되찾기는 어려웠지요. 귀환한 토스카니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베네통은 여전히 독특한 아우라가 부재한 그저 평범한 브랜드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체계적 전략 없이 눈길 끄는 단발적 주목에만 의존한 베네통 광고의 비극을 살펴보았습니다. 인생이나 광고나 마찬가지 아닐까 싶습니다. 과하면 무너지기 쉽다는 생생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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