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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하의 다정한 편지] 여우가 사는 집

 

산속에서 길을 잃은 나그네가 불빛을 발견했다. 그 빛은 나그네에게 안도감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래된 전설은 다른 전개를 펼친다. 그 집에는 백 년 묵은 여우가 살았다고도 하고, 홀린 듯 이끌려 들어간 곳은 귀신의 집이었다고도 했다. 위로가 되었던 불빛은 도리어 공포의 순간을 마주하게 했다. 밤의 불빛은 오래전부터 이중적인 상징을 지녔다. 길 잃은 이를 이끄는 등불이자, 동시에 사람을 홀리는 불빛이었다. 서양 민담 속에서도 불빛은 요정의 장난이자 유령의 신호로 등장하곤 한다. 어둠 속에서 보이는 불빛은 환영과 두려움, 희망과 불안이 함께 깃들어 있다.

 

얼마 전, 내가 머무는 레지던스에서 있었던 일이다. 외출했다가 늦은 밤 돌아온 어느 작가는 어둠을 헤치고 마당에 들어섰을 때, 내 방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을 보았다고 했다. 사방이 으슥한데, 방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에 오히려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불빛은 분명 누군가 있다는 증거였는데, 어쩐지 낯설고 두려웠다고 한다. 알 수 없는 공포에 휩싸여 마당을 재빠르게 지나쳐 가서 방문을 걸어 잠그고 불도 켜보지 못한 채 잠들었다고 했다. 같은 공간을 공유하고 있던 나조차도 그에게는 공포스러운 존재가 되어버렸다. 다음날 그 작가는 내게 말했다. 산속에서 길을 잃은 나그네가 발견한 외딴집이 떠올랐다고.

 

어둠 속에서 불빛을 보고 느낀 공포는 어쩌면 앎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속 불빛이 여우의 집이었다는 전설을 알고 있기에, 그 작가는 불안과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그런 이야기가 학습되지 않았다면 불빛은 아무런 의심 없이 위로와 안도감을 주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이 작은 에피소드에서 요즘 우리가 겪는 불안과도 연결되는 지점을 발견한다. 끝없이 쏟아지는 뉴스와 정보는 사건을 전하는 동시에 불안을 실시간으로 주입한다. 오늘날 우리의 불안도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소식으로 전해지는 순간에 시작된다. 앎이 현실을 바꾸어 놓는 것이다. 오래된 전설은 두려움을 함께 나누게 했지만, 지금은 혼자만의 불안 속에 개인을 가둔다.

 

가까운 이조차 때로는 믿을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어둠 속에 보이는 불빛마저 의심해야 하고 두려움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내 방의 불빛을 바라보며 느꼈을 그 작가의 기묘하고 낯설었던 기분을 상상해 본다. 따뜻함보다 공포스러웠다고 했던 그 말이 조금 서운했다. 그가 나에 대한 감정을 토로한 게 아니라, 그 순간의 느낌을 얘기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내가 누군가에게 잠깐이나마 그렇게 낯설고 기이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는 것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우리가 기대는 것은 불빛 그 자체가 아니라 불빛을 밝히고 있는 어떤 존재에 대한 믿음이다. 그 빛이 결국 누군가 있다는 증거였듯, 우리가 서로를 향해 있었으면 좋겠다.

 

여우가 사라지고, 요정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끝없이 쏟아지는 정보와 알림뿐이다. 전설의 빈자리를 우리는 정보로 채우지만, 그것이 우리의 삶을 더 서늘하게 만드는 것 같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불빛을 바라본다. 그 불빛이 낯설든 다정하든, 결국 거기 누군가 있다는 사실을 믿고 싶어서다. 백 년 묵은 여우가 사는 곳에서는 사람도 무탈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식과 정보가 아닌 진짜 이야기가 남아 있는 세계라면 우리는 서로를 보고 더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아무런 불안 없이 한 번쯤 홀려도 되는 밤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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