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시간 동안 서서 ‘독서와 인생’이라는 이희승 선생의 수필을 깜냥에 열강 했다. 지친 몸 이끌고 가서 ‘덕진호수’ 곁 임자 없는 의자에 궁둥이를 얹었다. 수중(水中) 도서관 서쪽 분수대에서 내뿜는 분수 쇼가 볼품이었다. 호수 주변 나무들은 때 늦은 단풍잎과 노을빛이 조화롭게 선명도를 연출하고 있었다. 호수를 가로지르는 구름다리를 건너오고 가는 젊은이들 모습은 한가한 낭만 그 자체이었다.
누군가와 함께 걸을 때가 좋았는데… 하고서 노을이 잠기는 호수의 면면을 보고 있자니 한영애 가수의 ‘옛 시인의 노래’가 생각났다. ‘마른나무 가지에서 떨어지는 작은 잎새 하나/ 그대가 나무라 해도 내가 내가 잎새라 해도 우리들 사이엔 아무것도-
얼마 후 한국 『고전해학』에 나오는 ‘희청군성(喜聽裙聲)’의 한 대목이 뒤를 잇는다. 송강 정철과 서애 유성룡이 같이 있다가 막 헤어지려는데 백사 이항복과 월사 이정귀, 일송 심희수가 동석했다. 술이 은근히 취하자 서로 문장에 대한 품격을 나름대로 논하게 되었는데, 먼저 송강이 말했다.
“밝은 밤, 밝은 달빛, 다락 위에서 구름을 가리는 거문고 소리가 제일이지.
그러자 심일송이 “만산홍엽인데 바람 앞에 원숭이 우는 소리가 제격일 걸세.”했다.
그에 서애가 또 한마디 거들었던 것.
“새벽 창가에 졸음이 밀릴 때는 술독에서 술 거르는 소리가 으뜸일 거야.”…
생각이 여기에 머물게 되니, ‘막걸리 한 잔’이 생각났다. 이어서 나는 지금 어디서 무엇하고 있으며, 내 인생은 어디쯤인고? 싶었다. 언제 누구와 무엇을 하며 이 나이에 이르렀는지 모를 허전한 가슴은 오랜 열망의 결실도 무의미 그 자체 같았다. 더 살다 보면 언젠가는 이 무의미함이 유의미임을 짐작하게 되겠지 싶기도 하고. 나이가 고개를 넘으면 어린 시절 어머니로 하여금 젖과 꿀이 흐르던 고향 생각이 난다. 그래서인지 ‘고향 살이 1개월’의 생각이 끼어든다.
고향! 하면 ‘반가운 얼굴, 정(情), 막걸리’로 이어진다. 그리운 얼굴, 정, 막걸리의 삼박자는 인생의 필연 같다. 얼굴과 정이 가슴의 소통이라면, 막걸리는 밥도 아니면서 함께 마시는 사람들과의 육체적 소통이 된다. 이 소통은 마음으로 이어지는 것, 허전한 마음, 적막한 환경 속에서의 그리운 얼굴이 생각날 때 누구와 막걸리 한 잔 마시게 되면 가슴에는 물줄기가 흐르고 정서적으로는 삶의 연민이 가신다. 그리고 열심히 살아온 죄 미워할 수 없다는 너그러움이다.
‘삶이 버거울수록 술이 달다,’는 생각일 때가 있다. 그런데 막걸리는 왜 쓰지 않고 속도 쓰리지 않아 안심하고 마실 수 있을까. 농부의 아들로 자랄 때의 일이다. 할머니가 아랫목에 술독을 묻어놓고 시간이 지난 뒤 보면 보글보글 술 괴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덮개를 열면 술이 익어가면서 보글보글 거품을 형성해가고 있었다. 막걸리는 금방 걸러서 마실 수 있어서 ‘막걸리’라고 했는지 모른다. 아무튼 막걸리는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갈러 갈 때 챙겨주는 누룩 섞인 음료수요. 고독한 농부의 와인으로써 농주(農酒)이었다.
그런가 하면 마을에 애경사가 있을 때는 사람들이 그 집에 모여 애도하고, 축하 하며 자기 집 일 같이 동참했다. 어느 분이 회갑을 맞아 잔치를 하거나 아들이 성공하여 한턱 쏠 때는 그 집 마당에 멍석을 깔고 거창스럽게 술상을 차렸다. 그리고 사람들은 둘러앉아 술을 마시면서 단체로 취했다. 그런가 하면 뜻 맞는 사람들끼리 술상의 젓가락을 바이올린의 활(弓) 삼아 젓가락 장단에 노래하며 하늘의 별을 바라보았다.
인생이 쓰면 술이 달다는 경험은 청년이 되어 도시라는 곳에서 신발 끈 졸라매며 ‘가난은 죄가 아니다.’는 담력으로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살아갈 때였다. 퇴근길이면 친구와 ‘노을 주(酒) 한잔하자’며 막걸리집을 찾아가 문발을 제치고 들어서곤 했다. 내일은 어떻게 될지라도 막걸리만은 친밀감이 느껴져 몇 잔 마시다 보면 - ‘이 풍진 세상…’ 2차 3차로 술집을 바꿔가며 마실 때도 있었다. 그 무렵 안도현 시인의 ‘연탄재 발로 차지 마라’는 시가 뜨고 있었다.
예부터 남도 사람들은 북쪽 오랑캐같이 독하게 살지 못했다. 그리고 시골 사람들은 서울 사람들같이 악착스럽지도 못했다. 그러면서도 누구 원망하지 않고 막걸리 한 사발 들이키고 손으로 쓱 입 닦고 열심히 농토를 일구었다. 막걸리는 힘든 사람과 독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뭔지 모를 친밀감을 느끼게 하는 친화력이 있다. 그래서인가 술이 목울대를 적실 때는 단맛이 느껴지는 음식이요. 근심 걱정을 씻어주는 세심주(洗心酒)요. 어머니가 빚은 모주(母酒)로써 가용주(家用酒)라고 불리어져 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