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시 수지구 상현동 96-5·9 상현리삼성쉐르빌 102동 8층 802호가 경매에 나왔다. 2001년에 준공된 5개동 87세대의 단지로 해당 물건은 9층 건물 중 8층이다. 주변에는 만현공원, 정평공원, 수지삼성병원, 신세계백화점 등의 레저편의시설이 있으며 솔개초, 심곡초, 서원중, 서원고 등의 교육시설도 가까이 있다. 최초감정가 7억2천만원에서 3회 유찰돼 이번 경매 최저매각가는 3억6천864만원이다. 입찰은 오는 8월 29일 수원지방법원 16계. 사건번호는 2012-5000.워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 859 만현마을1단지 롯데캐슬 111동 101호가 경매로 나왔다. 2002년에 준공된 12개동 992세대의 단지로 해당 물건은 20층 건물 중 1층이다. 보정역에서 도보로 25분 거리 이다. 주변에는 만현공원, 정평공원, 이마트등의 레저편의시설이 있으며 상현초, 솔개초, 심곡초, 서원중, 서원고 등의 교육시설도 가까이 있다. 최초감정가 5억1천만원에서 2회 유찰돼 이번 경매 최저매각가는 3억2천640만원이다. 입찰은 오는 8월 28일 수원지방법원 11계. 사건번호는 2011-44954.
성남시 분당구 금곡동 분당하우스토리 아파트가 경매로 나왔다. 2004년에 준공된 3개동 212세대의 단지로 해당 물건은 20층 건물 중 3층이다. 주변에는 금곡공원, 머내공원, 홈플러스 등의 레져편의시설이 있으며 늘푸른중, 청솔중, 분당정보산업고 등의 교육시설도 가까이 있다. 최초감정가 8억원에서 2회 유찰돼 이번 경매 최저매각가는 5억천1200만원이다. 입찰은 오는 8월 27일 수원지방법원 성남지원4계. 사건번호는 2012-5119.
안양시 동안구 비산동 425 ,455 비산삼성래미안 아파트가 경매로 나왔다. 2004년에 준공된 44개동 3천806세대의 단지로 해당 물건은 24층 건물 중의 23층이다. 1호선 안양역에서 도보로 20분 거리이다. 주변에는 학운공원, 이마트, 2001아울렛 등의 레져편의시설이 있고, 샘모루초, 관악정보산업고, 대림대 등의 교육시설도 가까이 있다. 최초감정가 6억2천만원에서 2회 유찰돼 이번 경매 최저매각가는 3억9천680만원이다. 입찰은 8월 28일 수원지방법원 안양지원1계. 사건번호는 2011-8608[2].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명성황후 시해 후 예안 선성의진을 결성해 을사조약 파기와 을사오적 처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단식 순국한 이만도(李晩燾·1842.1.28~1910.10.10) 선생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또한 8월의 6·25전쟁영웅으로는 전쟁 초기 포항을 탈환하기 위한 형산강 도하작전에서 수류탄을 품고 강을 건너 적 기관총 진지를 파괴한 후 장렬히 산화한 연제근(延濟根·1930.1.14~1950.9.17) 육군 이등상사를 선정, 발표했다. 이 만 도 (李晩燾·1842.1.28~1910.10.10) 선생 이만도 선생은 퇴계의 11세손으로 경북 봉화군 봉성면에서 태어났으며 강화도조약이 맺어진 1876년 최익현이 개항을 반대하면서 올린 상소를 두둔해 파직 당했다. 선생은 1894년 6월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는 일이 벌어진데 이어 9월 의병봉기를 촉구하는 왕의 밀령이 전달되자 거병을 준비했지만 소모관 이용호가 일본군에 붙잡히는 바람에 뜻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인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선생은 가장 앞선 예안통문에 참여, 의병을 일으켜 대장을 맡아
태양이 밤낮없이 작열한다 해도 바닥이 없으면 생기지 않았을 그림자 초봄 비린 구름이 우금치 한낮을 훑어간다 가죽을 얻지 못해 몸이 자유로운 저 구름 몸을 얻지 못해 영혼이 자유로운 그림자 해방을 포기한 시대의 쓸쓸한 밥때가 사랑을 포기한 사람의 눈으로 들어온다 신용목 시집, 그 바람을 다 걸어야한다/문학과지성사 바닥이 없으면 생기지 않았을 그림자라니 시인은 이 시대를 바닥으로 이미 설정하고 있다. 이어 등장하는 우금치 마루, 왜 우금치일까 하필이면 백 년 전 그곳을 이야기 했을까 해방을 포기한 시대의 쓸쓸한 밥때인 여기서 우리는 정녕 사랑을 포기해야만 할 것인가 시인은 우리에게 진지하게 묻고 있다. 무어라 답할 것인가 정녕 희망에 대해 우리는 무어라 말 할 수 있는가 /조길성 시인
YH무역 여성노동자 농성 사건 1979년 오늘부터 가발제조업체인 YH무역의 여성근로자 200여 명이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며 서울 마포 신민당사 4층에서 농성에 들어갔다. YH무역은 석유파동과 가발산업의 후퇴, 수출 감소 등으로 경영이 어려워지자 넉 달 전인 4월 1차 폐업을 선언한 데 이어 8월 6일 다시 폐업을 공고했다. 이에 대해 노동자들은 폐업 철회와 임금 지불 등을 요구하고 회사측의 주거래 은행인 조흥은행과 관계 당국에 회사 정상화에 협조해 줄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농성 사흘째인 8월 11일 새벽 천여 명의 경찰이 신민당사에 난입해 노동자들을 강제연행하고 신민당 소속 국회의원과 기자들에게도 무차별 폭력을 휘둘렀다. 이 과정에서 노조 집행위원장 김경숙 씨가 사망했다. 이 사건 직후 경찰의 폭력진압과 강제연행을 비난하는 시위가 잇따랐고 두 달 뒤에는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됐다. YH무역 농성사건의 여파는 계속 확대되어 종교계와 학생들의 반유신 연대투쟁을 촉발했다. 손기정,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 1936년 오늘 제11회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손기정 선수가 마의 2시간 30분 장벽을 깨고 우승했다. 손기정 선수는 땡볕 아래서 4
대학을 ‘상아탑’이라고도 하지만 한때 우리나라에서는 ‘우골탑’이라고도 불렀다. 가난한 농촌에서 자식을 대학에 보내려면 비싼 등록금 때문에 조상들이 물려준 문전옥답을 팔고 또 가족이나 다름없이 아끼는 소까지 팔아야 된다고 해서 생겨난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자식들을 대학에 보내 공부시키는 것은 부모들의 뼛골이 빠지는 일이다. 특히 등록금 납부일이 다가오면 이 땅의 모든 학부모들은 돈을 마련하기 위해 전전긍긍하기 마련이다. 요즘처럼 극심한 불경기에 가정경제가 휘청거리는 상황에서는 악성 사채까지 이용하게 된다. 그런데 본보 보도(8일자 1면)에 의하면 도내 주요 대학들이 등록금의 카드결제를 거부하고 있어 서민경제에 큰 압박을 주고 있다는 비난이 일고 있다. 경희대와 강남대, 한국외대, 아주대, 한양대, 경기대, 수원대 등 대학들은 등록금 카드결제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도내 65개 2년제 및 4년제 대학의 84%인 54개 대학에서 등록금의 신용카드 결제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는 전국적으로도 비슷하다. 사이버대학 등을 포함한 전국 410여개 대학 가운데 올 2학기 등록금을 카드로 받는 대학은 108곳(26.3%)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들 대학이 등록금 신
얼마 전 인천에서 강도로부터 시민을 구출하기 위해 목숨을 건 경찰은 흉기에 목이 찔리면서도 시민을 지키다가 옷이 뻘겋게 물들었다. 공주에서는 산불을 헤치며 할머니를 살린 경찰. 양평 강물에 빠진 할머니를 건져 심폐소생술 처치로 생명을 살린 현장 경찰을 도운 김종회 경희대학교 교수는“정말 눈물겨운 싸움이었다. 자기 가족인들 저 보다 더 열렬할 수 있을까” 할머니가 다시 숨을 토하는 것을 보고 자리를 뜬 다음 그 감동을 칼럼에 담았다. 외국인이 서울 한복판에서 시민에게 행패를 부리다 이를 제지하는 경찰을 향해‘짭새’,‘XXXX’라는 욕설을 한 사례가 있었다. 몽골에서 온 유학생은 ‘경찰과 짭새’가 같은 말 인줄 알았다고 한다. 지난 4월 인천 주안역지구대에서 사기죄로 한국인 K모 씨(33)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담당 경찰관이 “범죄 혐의를 인정하느냐”고 묻자 K 씨는 시민들과 동료 경찰관들이 보는 앞에서“ 에라, 이 짭새 새끼야”라고 욕 을 했다. 경찰관이 “자꾸 짭새라고 하면 모욕죄로 입건하겠다”고 경고했지만 K
꿈은 이루어진다고 한다. 2002년 전국을 들끓게 했던 한일월드컵 축구대회에서 굳어진 응원구호지만 한국인의 피 속에는 오래전부터 녹아있었다. 그 흔한(?) 석유를 비롯해 부존자원이라고는 없는 나라였다. 그것도 남의 식민지로 살다가 어렵게 독립을 이뤘으나 국토는 반토막이 났다. 그나마 땅속에 묻힌 자원은 북쪽에 몰려 있어 그림의 떡이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알량한 산업시설은 동족간의 비극적 전쟁통에 소실됐다. 이것이 1960년대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여기서 주저앉지 않았다. 우선 ‘중동 드림’을 꿈꿨다. 엄청난 오일머니를 확보한 중동국가들이 대대적인 산업인프라 건설에 나섰고 이는 기회로 다가왔다. 우리는 망치와 꿈을 갖고 모래폭풍이 몰아치는 중동을 향했다. 가족과 생이별하고 모래밖에 안보이는 그곳에서 수년씩 피땀을 뿌린 우리는 대한민국이라는 배(船)가 대양을 향할 수 있는 기초를 놓았다. 개인적으로는 사우디와 리비아, 쿠에이트 등에서 번 돈으로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 1970년대 이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한국인들의 또 하나 꿈은 ‘아메리칸 드림’이다. 초창기에는 돈을 벌고 신분상승의 새로운 기회를 얻기 위한 불법이민까지 판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