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코건설이 시공하는 오피스텔 ‘더샵 송도센텀하이브’ 분양이 8월 시작된다. 송도센텀하이브는 인천시 연수구 송도동 송도 국제업무단지 B5블록에 들어서며, 단지 규모 연면적 약 23만 4351㎡, 지하 5층~지상 최고 39층 2개 동 규모로 조성된다. 단지는 더샵 송도센텀하이브 오피스텔 전용 62~126㎡ 387실, 라이프오피스 1620실, 스트리트몰 192실로 각각 구성된다. 8월 3~4일 2일 간 청약 접수를 받는다. 당첨자 발표는 9일이며, 계약은 11~14일 진행된다. 청약 접수는 한국부동산원 청약홈을 통해 온라인 신청만 가능하고 만 19세 이상이면 청약통장, 거주지 제한, 주택 소유 여부에 관계없이 청약할 수 있다. 투기과열지구 및 조정대상지역 내에서 분양하는 오피스텔이어서 인천시 거주자에게 20% 우선 공급된다. 송도 국제업무단지에서도 가장 중심에 들어서는 송도센텀하이브는 가까운 거리에 포스코건설 사옥, IBS타워, G타워, 연수세무서 등이 있다. 또 인천 서해바다와 워터프론트호수, 송도 센트럴파크 등을 모두 조망할 수 있다. 정주 여건도 좋아 국제업무지구역과 센트럴파크역 이용이 도보로 가능하고 인접 도로를 통해 제2경인고속도로와 77번 국도를 편리
▲편집국장 박정환 ▲기획실장 겸 방송국장 윤관옥 ▲논설위원실 논설위원 여승철 ▲편집국 편집기획부장 윤신옥 ▲편집국 자치행정부장 이주영 ▲편집국 정치부장 남창섭 ▲경기본사 북부취재본부 파주·의정부 담당 부장 김은섭 ▲경기본사 편집국 정경부 최준석 ▲경기본사 편집국 정경부 박다예
▲전략기획부장 서원상 ▲차세대 쇄빙연구선 건조사업단장 주형민 ▲미답지연구단장 이강현 ▲기지운영실장 최선웅 ▲국제협력실장 정지훈
서해 최북단섬 백령도. 지도상으로 보아 북한의 턱 밑에 있어 외롭고 쓸쓸해 보이지만 내부적으론 박진감과 생동감 그리고 안정감이 공존하는 섬이다. 섬 안에 있으면 ‘여기가 섬인가?’라고 착각할 정도로 이젠 과거의 적막한 섬이 아니다. 200년 전 과거에도 그랬다. 교통이 불편해 한적한 섬이었지만 외국문물 전래 1번지라고 불릴 만큼 생동감과 다양한 경험이 바탕이 된 여유 있고 멋스런 곳이었다. 바로 기독교 전래에 관한 이야기이며, 지난 호에 이어 소개한다. 양천 허씨가 백령도와 인연을 맺게 된 배경과 백령도 토호로서 역할과 1816년 외국 세력에 의해 첫 문호가 열리면서 기독교의 복음이 전파되는 사연도 소개했다. 이번 호는 중화동 교회의 탄생과 두 번째로 백령도에 복음을 전한 외국인을 소개한다. ▶ 체크포인트 1. 허득(許得) 공, 개화파 김성진을 만나 틔운 신앙의 싹, 중화동 교회로 열매를 맺다. 허득(1827~1913)은 갑신정변(1884) 이전에 황해도에서 서울을 오가며 개화파 인사와 교유(交遊)했는데, 갑신정변이 3일천하로 실패하자 신변이 위태로워 백령도로 낙향했다. 그리고 10년 뒤 충남 출신의 진사(進士) 김성진(金聲振)이 정부를 전복시키고 개화파 정
▲오전 10시30분 정책현안회의/ 온라인 ▲오후 2시 공촌정수장 고도정수처리시설 통수현장 방문/ 공촌정수장
근대 인천의 역사는 인천항과 그 궤를 같이 해 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변변한 산업기반이 없던 오랜 기간, 경제는 더더욱 그러했다. 1883년 개항과 함께 인천에는 낯선 크기의 선박들이 외국으로부터 물밀듯 쏟아져들어왔다. 숱한 사람이 오가고 막대한 양의 화물도 들고 나갔다. 배와 육지 간에 짐을 내리고 싣는 일이 필요해졌다. 부두노동(하역)의 시발이었다. 1년 365일 부두에서의 일거리가 넘쳐나는 인천으로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가까이서 멀리서 남부여대(男負女戴), ‘인천 드림’을 향한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당시 부두노동은 대부분 화주가 직접 고용하는 형태로 이뤄졌다. 하는 일에 따라 하륙군(화물을 선박에 싣고 내림), 두량군(미곡의 분량을 계량하고 포장), 칠통군(선박과 부두 사이에서 화물을 싣고 내림), 지계군(육상에서 화물 운반) 등으로 나뉘었고 이들은 통칭 모군(募軍)이라 불렸다. 전혀 조직적이지도, 숙련되지도 못했던 이 일꾼들을 관리하고 효율적으로 배치하기 위한 기구가 생긴 게 1887년이다. 화도진 별장 겸 인천 경무감이었던 김광신이 중구 내동 167번지에 ‘경기청’과 ‘영남청’을 설치했다. 경기청은 하역업, 영남청은 각각
“나는 어렸을 때 인천에서 살았다. 집 앞에는 창영국민학교가 있었는데, 학교의 울타리는 철조망이었다.” “지붕 위에서는 시가지가 구석구석 잡혔다. 오른쪽으로는 측후소가 우뚝 선 오정포 산, 그 옆은 만국공원, 만국공원 속에는 평화각, 또 그 옆으로는 뾰족 성당, 저 멀리 황골고개 너머 공설운동장, 그리고 바로 눈 앞이다 싶게 상인천역(지금의 동인천역)의 지붕, 역 좌우로는 배다리와 철다리...(중략)...구름다리 저 건너 괭이부리 쪽으로 는 바다가 쪽박 우물만큼 고여 있었다.” “수도국산과 오리나무산으로 이어진 광철이네 대문 앞으로 뻗어오른 그 길은 이뿐이네 집과 장님네 집에서 네거리로 갈라졌다. 그 중에서 송현동 쪽의 한모서리가 이뿐이네 이발소였고 맞은편 송림동 쪽 모서리는 육형제네 토담집, 송현동 쪽으로...” 이런 소설이 정말 있을까 싶다. 두 편의 소설, 인천의 동구를 잘 표현한 소설 세상에 없지 싶다. ‘지붕 밑의 한낮’, ‘강 건너 저쪽에서’ 등이다. 한남철! 그는 누구인가. 인천이 낳은 진정한 소설가라 부르고 싶은 이름이다. 1937년 인천(강화)에서 태어나 창영동에서 유년기를(창영초교 졸업) 보내고 인천중학교와 인천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대에
▲오후 2시 영상메시지 촬영/ 시청 영상편집실
백령도 서남쪽 조그만 포구, 정겹지만 백령도 나아가 우리나라 근대문화에 끼친 영향은 자못 크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우리나라 교회사에 한 획을 그었던 중화동 교회다. ‘19세기 조선시대 당시 중화동에 터를 잡고 고구마 이외 농사가 잘 되지 않았던 척박한 토질을 알고 있었다면 교회가 뿌리를 내렸을까?’라는 생각에 포구의 위대함마저 든다. 어느덧 역사는 한 세기가 훌쩍 지나 당시의 인걸은 간데 없지만 그들이 남겨 놓은 자취와 그림자가 중화동 골목을 맴도는 것 같다. 백령도의 기독교 전래와 관련된 초창기 이야기를 살펴보자. ▶ 체크포인트 1. 양천(陽川) 허씨(許氏), 백령도와 인연을 맺다 지금부터 약 1100년 전,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와 전투할 때 공암촌(孔岩村)에 살던 허선문(許宣文)이라는 지주가 군량미를 후원한 바 있는데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한 후 허선문의 공로를 인정해 공암촌을 식읍(食邑)으로 하사했고, 허선문을 ‘시조’로 하는 양천 허씨가 생겼다. 허씨 가문의 역사적 인물로는 ‘홍길동전’을 저술했던 허균, ‘동의보감’을 저술했던 허준, 조선 중기 서인의 송시열과 라이벌이었던 남인 출신의 미수(眉叟) 허목(許穆) 등이 있다. 백령도와의 인연은 서
박남춘 인천시장이 21일 이날 문을 연 포스코 글로벌연수원 생활치료센터를 찾아 나은병원 의료진을 격려하고 있다. ( 사진 = 인천시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