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집 벽의 심우도(尋牛圖)는 소를 찾는 그림, 불교의 오래된 상징 중 하나다. 상징은 말과 글의 세계, 나아가 문명의 씨앗이다. 소는 ‘인간의 마음’이라고 읽자. 우리 불교와 사상, 정서적 전통에서도 이미지 크다. 만해(卍海) 한용운 선생의 심우장은 ‘소를 찾는 집’이다. 뜻 크고 깊은 스님 만해, 아름다운 시 언어로 인류를 가르쳤다. 엄혹한 일제 치하에서 3·1 독립선언에 나섰고, 끝내 그 연꽃 마음 변절하지 않았다. 그의 종교의 친정은 인제 백담사다. 만해기념관 부근 계곡은 단풍이 극치여서 찾는 이 더 많았다. 매서우면서도 그윽한 이율배반적인 눈길, 만해 조각상에 마음 숙였다. 저런 스승 있으매 오늘 우리가 이리 당당하리라. 마침 이재명 이낙연 두 후보의 재회(再會) 배경 벽면에 우연히 걸린 찾을 尋(심)자 액자에 주목하는 사람이 여럿이었다. 우연일까, 허..
중국의 수출규제로 시작된 ‘요소수 대란’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 차를 세우고 폐업할 수밖에 없는 화물차 차주들은 요소수 없이도 차량을 운행할 수 있도록 불법 개조를 하려는 정황이 발견될 정도다. 이번 사태는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원자재에 대한 정부의 ‘수입선 다변화’ 전략이 아직도 허술하기 짝이 없음을 증명한다. 국가전략 자체를 총점검하고 새로운 비상구를 구축해야 할 시점이다. 닥쳐야 허둥대는 ‘냄비 행정’ 고질병을 언제나 고쳐내나. 요소수 대란으로 현실이 더 분명해졌을 뿐 원자재 대란은 어느 품목에서든 벌어질 수 있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올해 1∼9월 한국이 수입한 품목 1만 2586개 중 3941개(31.3%)는 특정 국가에 대한 의존도가 80% 이상이었다. 중국에서 수입하는 비율이 80% 이상인 품목은 1850개로 미국..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라는 작품이 있다. 와카타케 지사코가 쓴 소설도 있고 오키타 슈이치가 만든 영화도 있다. 75세 노년 여성 모모코가 홀로 살아가는 이야기다. 고독하다. 한편으로는 고독을 즐기는 것도 같지만 속살을 보면 고통의 나날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이 여성은 55세에 남편이 죽자 속으로 이렇게 말한다. '드디어 혼자가 됐다.’ 그러나 그 이후 대화다운 대화를 하지 못하며 산다. 거의가 다 독백이다. ‘오늘도 세 시간을 기다려 1분 진료를 했다’라든가 아침마다 눈을 뜨면 가상의, 허구의 인물이 늘 머리맡에서 자기에게 말을 건다. ‘그냥 더 누워 있어. 일어나 봐야 별다른 일도 없잖아?’ 하지만 이 ‘노친네’ 모모코는 굳이 이부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세 시간 동안 기다렸다가 눈 깜짝할 사이의 무심하고 무례한 병원 진료를 보는 일과 같은 루틴의 일상을 시작한다. 영화든 소설이든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를 보고 있으면 노년의 삶이 지녀야 할 의지 같은 것이 느껴져 코끝이 찡해진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완벽하게 파편화된, 고립된 개인만의 삶으로 치닫고 있는 일본 노년층들, 더 나아가 일본사회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모골이 송연해진다. 일본사람, 일본사회가 저 지경이 됐구나, 사회에 유대/ 연대/ 소통/ 배려/ 공동의 삶이란 게 거의 없어졌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무엇보다 세대간에 같이 무엇을 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세대끼리는 이미 단절된 지 오래다. 혼다 영업사원이 와서 모모코에게 경차를 팔면서 이렇게 말한다. “혼다는 아들입니다.” 왜냐하면 혼다를 사면 적어도 6개월의 한 번씩은 혼다 직원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자동차가 아들이 돼버린 사회. 우리도 점점 그렇게 되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우리사회가 언제부터 이 지경이 돼 버렸는지 모르겠다. 언제부터 80년대 학번 세대들이 젊은 세대들에게 기득권층으로 몰리게 됐는지, 언제부터 모두들 2030 2030 하면서 그들의 눈치나 보게 됐는지,언제부터 젊은이들 상당수가 극우와 보수(윤석렬과 홍준표)를 구별하지 않고 정권만 바꾸면 ‘땡큐’인 심리가 됐는지, 언제부터 모두들 부동산 문제에 그렇게 집착하게 됐는지, 이런 식이면 우리사회는 모두 다 각자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는 투의 극단의 개별화된 사회로 전락하게 될 가능성이 농후해 보인다. 상식을 되찾으면 된다. 검사라는 직업의 상식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자기가 텔레그램을 보낸 사실이 드러나고 전화 녹취록까지 공개돼서 자신이 범죄를 사주했거나 적어도 모의에 동참한 사실이 밝혀지면 내가 그랬다,라고 고백하는 게 상식이다. 초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에게 항상 들었던 이야기는 너희가 잘못한 것보다 거짓말한 것 때문에 더 화가 나, 이다. 일부 검사들의 이런 행태는 사람들이 유년시절부터 키워 왔던 상식의 틀을 깨는 것이다. 사람 한 명의 의식이 잘못 뚫리고 왜곡되면 사회 전체의 망이 해체된다. 손준성, 김웅처럼 서울대를 나온 엘리트들이 얼마나 세상을 망가뜨리고 있는지, 그러면서도 자신들 욕망대로 사회가 구성되고 재편되기를 바란다면 그건 거의 악마의 수준이다. 이러니 우리말에 처단이라는 표현이 생긴 것이다. 과거 북한 공산당이 지주라 하면 무조건 대나무 꼬챙이로 찔러 죽였다며 반공교육에서 비난의 수위를 극대화 시켰지만 사실 그 지주들 중에 소작농의 어린아이가 굶어 죽는 것조차 본 체 만 체 했던 인면수심의 인간들도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보수는 몰상식과 인격 수양, 자기 몸가짐을 조심해야 하고 진보는 자칫 인간성을 상실할 수 있는 극단적 폭력에의 유혹을 조심해야 한다. 그쯤 되면 양자는 같아진다. 그러니 보수는 올바른 상식을 되찾아야 하고 진보는 좀 적당히, 늘 앞섬과 뒤처짐의 경계에 서 있는 사람들을 헤아리며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한 마디로 모두들 좀 실용적이 돼야 한다. 그리고 좀 문화적이 돼야 한다. 버락 오바마가 잘했던 일 중 하나는 백악관에 ‘백스테이지 앳 더 화이트하우스(Backstage at the Whitehouse)’란 이름으로 각종의 가수들을 불러 공연을 했다는 것이다. 테데스키&트럭스 밴드의 수잔 테데스키와 데릭 트럭스 듀오도 왔었고 에이미 만도 와서 자신의 메가 히트곡 ‘새이브 미(Save me)를 불렀으며 심지어 비비 킹도 작고하기 전에 롤링 스톤즈 믹 재거와 함께 이 무대에서 신나게 한판을 하고 떠났다. 비비 킹이 오바마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독촉하는 장면은 정치가 때론 좀 놀고, 평민들과 어울리며, 그래서 잠깐이나마 상식적이 되고, 또 그래서 평화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정치가 좀 밑으로 내려와야 한다. 서울대 식의 오만에서, 고시 패스의 자폐적 심리에서, 판검사의 막무가내식 눈높이에서, 언론고시의 기계적 지식에서, 의사들의 비뚤어진 에고(ego)에서 내려와야 한다. L시티와 대장동 수천억원의 욕망도 일반 사람들의 눈높이나 서민의 생활과 의식으로 종종 내려와야 한다. 청와대에 백스테이지를 만들어 공연을 할 그릇은 지금 후보들 중 누가 지니고 있을까. 이날치를 청와대에 불러 같이 노래할 수 있는 후보는 과연 누구일까. 그 모든 것은 꿈인가. 다들 각자, 나는 나대로 혼자서만 갈 수밖에 없는 세상을 만들 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고독하고 쓸쓸하게 죽을 것인가. 그런 사회를 만들 것인가. 비록 트럼프는 극혐하지만 힐러리도 싫어서 투표를 포기했던 미국의 2016년 대선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국격은 상식에서 나온다. 상식의 인간이 지도자가 돼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프란치스코 교황을 방문해 한반도 평화와 화해 정착을 위한 노력을 요청하고 북한을 방문해줄 것을 당부했다. 문 대통령은 지난 9월에는 유엔 기조연설을 통해 남북미 또는 남북미중 종전선언 추진상황을 설명하고 회원국들의 적극적 지지와 협조를 구했다. 이를 위해 서훈 청와대 안보실장을 미국에 보내 한반도 정책 관계자들을 만나 종전선언의 당위성을 설득하도록 하기도 했다. 임기 말 문재인 정부의 남북 평화정착을 위해 애쓰는 모습은 평가할 만하다. 돌이켜 보면 한반도의 분단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체제 구축과정에서 미국이 주도한 것이다. 분단이 운명이라면 마땅히 전범국가 일본이 그 짐을 지어야 했음에도 미국 등 강대국은 한반도에 그 업보를 뒤집어씌운 셈이다. 미국은 일제 강점기 친일 민족반역자 집단을 재기용함으로써 민족 내..
국민의힘 대선 후보로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결정됨에 따라 내년 3월 9일 치러지는 대선의 대진표가 사실상 확정됐다. 주요 정당으로 보면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에서 이재명,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와 함께 정의당 심상정,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다. 여기에 가칭 ‘새로운물결’의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 등이 있다. 국민들은 이제 4개월 앞으로 다가온 대선이 인물과 정책 대결로 대선의 격을 높이는 축제의 장이 되길 바라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번 대선은 이런 기대와는 정반대의 선거로 전개되지 않을까 우려가 앞서는 게 사실이다. 먼저 후보 경선이 끝난 민주당은 최종 후보 선출과정에서 불거진 경선 불복 논란이 외형적으로는 봉합된 상황이지만 일부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한 여진이 계속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지난주에 끝난 국민의힘 경선은 민심과 당심이 충..
문재인 정부가 고심 끝에 생각해낸 UN에서의 종전선언 제안과 이를 통해 북미 남북대화를 재개하여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다시 궤도에 올려놓으려 했던 야심 찬 의도가 미국의 이견(異見)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형국이다. 비록 중대과제 선결이란 조건을 달았어도 북한의 긍정적 반응과 중국의 환영의 뜻에 기대에 차서 미국으로 건너가 카운터파트인 제이크 설리번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을 설득코자 했던 서훈 안보실장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듯하다. 설리번은 ‘정확한 순서, 시점, 조건’을 제시하며 다른 관점을 갖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한마디로 북한의 선 비핵화 조치가 있어야 종전선언은 물론 북미대화, 나아가 관계개선이 가능하다는 종래의 미국 주장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종전선언의 의미는 법적 구속력을 갖지 않는 정치적 상징적 선언의..
수원시가 ‘청소차량 배기관 수직상향 전환 시범 사업’을 확대하기로 했다. 대부분 청소차량의 배기관은 차량 뒤쪽에 설치돼 있다. 따라서 주로 차량 후방에서 폐기물 수거 작업을 하는 환경미화원은 배출되는 매연에 직접적으로 노출된다. 게다가 청소차의 대다수는 디젤 차종으로 인체에 치명적인 유해 배기가스를 배출한다. 이 배기관을 차량 뒤편 바닥이 아닌 조수석 뒤에 수직으로 설치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배기가스가 차량 위로 배출돼 환경미화원들이 인체에 치명적인 유해 배기가스에 덜 노출된다. 시는 2020년 9월 자동차 전문 튜닝업체 준비엘의 제안으로 ‘청소차량 배기관 상향 전환 시범사업’을 추진했다. 전국 최초로 청소차량 6대에 수직상향 배기관을 장착해 1년여 동안 시범 운행, 효과가 입증됐다고 밝혔다. 올해에도 생활폐기물 수집·운반 대..
지금 내 손에 들려 잠 못 들게 하는 책은 ‘세 여자’다. 작가 조선희는 잊혀진 여성독립투사 허정숙, 고명자, 주세죽 세 여자의 일대기를 소설 형식으로 되살려 놓았다. 2017년 나온 책을 읽은 이들은 ‘3년 전 화제가 됐을 때 안 읽고 왜 이제야?’ 하고 물을 수 있겠다. 그에 대한 답이 오늘 글의 주제다. 작가에게 미안하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녀의 전작들을 제목만 보고 내 스타일이 아니라 고 지레짐작, 독서목록에서 제외시켰었다. 또 그 기억으로 ‘세 여자’도 읽지 않았다. 그런데 내 독서모임 다음 책이 ‘세 여자’로 선정돼 내 의지 없이 잡게 된 것이다. 소설은 나를 단박 100년 전, 역사의 격변 속에 떨구었고 세 여자의 파란만장한 운명의 회오리에 휘몰리게 했고 이틀 밤을 꼬박 새우게 만들었다. 근거 부실한 순간 감정의 선입견을 반성한다. 그 같은 선입견..
서른 살이 되기 전에 모든 사람이 나를 싫어해서 떠날 거라 했다. 서른세 살에는 미치지 않으면 자살하게 될 운명이라 했다. 인도 뉴델리 파하르간즈 골목에서 만난 예언자라는 이의 말이었다. 스무 해 전, 나는 한국을 떠났다. 중국에서 터키까지 두 해에 걸쳐 길 위에서의 삶을 살았다. 사랑하던 이를 잃고 힘겨운 마음으로 견디던 여정(旅程)이었다. 그 한 복판에서 듣게 된 끔찍한 예언이었다. 탁류(濁流)에 휩쓸려 깊고 어두운 강 아래로 내가 가라앉는 일시정지 화면이었다. 화가 치밀어 좌충우돌 목적지도 없이 버스를 탔다. 먹지도 자지도 씻지도 못했다. 사흘 밤낮 의자에 꼿꼿이 앉아 스스로를 괴롭혔다. 그러다 도착한 곳이 히말라야 산맥 해발 2천 미터 고도에 위치한 마날리였다. 해가 저물기도 전인데 버스는 끊겼다. 어쩔 수 없이 하루를 묵어야 했다. 더군다나 알고 보니 온천 마을. “먹지도 자지도 씻지도 않는 자학 프로그램”이 버스 끊긴 산속 온천 마을에서 자동 종료될 운명에 처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나는 고행을 이어가기로 했다. 무작정 산으로 걸어 들어갔다. 며칠을 굶어 쓰러지기 직전이었지만 사과나무의 탐스러운 열매에 눈길조차 주지 않을 만큼 가혹한 신(神)에게 분노했다. 산속에서 시체로 발견된들 어떠랴 싶었다. 어차피 미치지 않으면 자살할 운명이니 지금 죽으나 서른세 살 때 죽으나 마찬가지였다. 삶에 미련이 없으니 죽음에 두려움도 없었다.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작렬하는 태양 아래 걷는 건지 허우적대는 건지 감각마저 희미해졌다. 그때 저 멀리서 어떤 여자가 피리를 불며 내게로 걸어왔다. 울창한 전나무 숲 사이로 신비로운 음률이 감돌았다. 일본인이었다. ‘드디어 내가 미쳤구나. 인도 마날리 산중에 피리 부는 일본인이라니!’ 내 눈을 의심했지만 그녀는 환상도 망각도 아닌 실체, 히피였다. 나처럼 20대에 고향 일본을 떠나 떠돌다 그곳에 정착한 여행자였다. 우리는 나란히 걸으며 서툰 영어로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그녀에게 내 몹쓸 운명을 들려주었다. 그녀는 재미있다는 듯 깔깔깔 웃다가 이윽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사람들은 살면서 네게 게임을 걸어올 거야. 그럴 때마다 피하지 말고 즐겨. 신(神)조차 마찬가지야. 시련과 고통, 운명으로 너에게 게임을 걸지. 도망가지 마. 신과 게임을 해. 이길 수 있어. 너는 신(神)이 가진 패를 이미 알고 있잖아? 서른세 살이 될 때까지 미치지 않고 자살하지 않으면 돼. 그러면 너는 신(神)을 이기는 거야.” 그렇다. 신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단순하지만 명쾌한 해법이었다. ‘미치지 말자. 자살하지 말자. 운명이 예고한 서른세 살을 넘기자. 신(神)과의 게임에서 이기는 거야.’ 관에 누운 시체처럼 지내던 나는 불현듯 잠에서 깨어났다. 서른셋까지 앞으로 남은 7년, 정신줄을 단단히 붙들어 매자 다짐했다. 이후로도 여전히 눈을 감으면 탁류(濁流)에 휩쓸린 채 가라앉는 내가 보였다. 하지만 더는 그때의 일시정지 화면은 아니었다. ‘끝없이 아래로 내려가다 보면 결국 바닥까지 가겠지. 그래. 그땐 바닥을 “탁” 되짚으면 돼. 그 반동으로 위로 올라가는 거야’ 바닥을 짚고 수면을 향해 떠오르는 내가 보였다. 내가 살던 세계로 돌아가려는 의지도 생겼다
얼굴은 밖으로 드러나는 마음의 표정이다. 삶의 뿌리에서 오는 형상이며 영혼의 풍경이다. 그래서일까 첫인상은 첫사랑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흉한 인상은 범인으로 의심받기도 한다. 한세상 나그네 길에 여권 같은 얼굴과 이름이라는 고유명사와 함께 운명적인 성격과 인격을 안고 살아가는 과정에서 그 대변인 같은 게 얼굴이다. 재 너머 사래 긴 밭이랑 같은 얼굴의 주름살 속에는 오늘의 그 사람만 내재되어 있는 것 아니다. 태어나 살아온 과정에서 발생하는 상황에 따른 마음가짐에 있어서의 표정의 변화가 세월이라는 이름과 함께 용해되고 축적되어 있다. 또한 그 위에 오늘의 일들이 얹히고 있다. 생물학적인 면에서 볼 때 얼굴은 운명적으로 타고난 바탕이 있다고 한다. 이어서 환경과 교육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는 후천적인 면이 포함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