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진'검색결과
상세검색실연(失戀) 같은, 개인적인 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대중가요의 가사가 다 자기 얘기처럼 들린다고 한다. 사회적이거나 정치적인 이슈가 커지면 영화의 내용이나 그 안에 나오는 대사가 다 지금의 얘기를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예컨대 이런 대사다. 두 남자가 이런 얘기를 주고받는다. “존, 이곳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해? 우리가 과연 증오를 극복할 수 있을까?” “극복? 맙소사. 심오한 질문이네. 그래. 우리가 피를 많이 흘리긴 했지. 하지만 난 너를 형제라고 생각해. 믿는 건 너뿐이야. 그거면 됐어.” 존이라고 불리는, 질문을 받은 남자는 백인(프랭크 라우텐바흐)이다. 질문을 한 남자는 흑인이다. 이름은 부쉬(모더시 마가노). 여기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한 지방 도시이며, 요하네스버그 근처 소도시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국제 러시안 갱들과 연결된 마약 매춘 조직이 활개를 치고 있는 곳이다. 우범지대는 (백인들이 늘 주장하는 대로) 흑인 하층민 거주 지역에 위치해 있고, 모든 사건 사고는 (흑인들의 주장대로) 흑인들에게만 덮어 씌워지기 일쑤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아파르트헤이트, 곧 인종차별정책이 공식적으로 없어진 때가 1990년 드 클레이크 백인 대통령 때이니 그로부터 30년 넘는 세월이 지났다. 1990년에 무려 27년간 수감생활을 하던 아프리카 민족회의(ANC)의 흑인 지도자 넬슨 만델라가 석방이 됐고, 1994년에는 그가 남아프리카 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30년이 지난 현재이니, 이 사회, 다 된 것 아닌가? 정상적인 사회가 되고도 남은 것이 아닐까? 그러나 두 남자의 대화를 들어 보면 아직 멀어도 한참 먼 모양이다. 아직 주변에 극복하지 못한 문제투성이가 있는 듯해 보인다. 영화 ‘와일드 이즈 더 윈드’는 넷플릭스의 위대한 장점, 곧 다국적인 영화를 다국적의 언어로 여과 없이 직접 감상할 수 있게 해 주는, 종(種) 다양성의 영화 편성에 따라 최근에 공개된 작품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영화이다. ‘와일드 이즈 더 윈드’는 이 나라가 (놀랍게도) 여전히 과거 역사의 큰 상처와 거기서 기인한 여러 정치 사회적 갈등, 경제적 분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양 진영 간 증오의 논리가 너무 팽팽한 모양이고, 이상하게도 그것이 우리의 현실과 그리 차이가 없어 보인다. 아니 꼭 우리 얘기 같다. 저 나라는 흑백의 싸움이 여전하고 지금 여기, 이 나라 한국은 진보와 보수의 싸움이 끝을 안 보이고 더욱더 깊어지고 있다는 것만이 차이라면 차이다. 저 멀리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만들어진, 영어와 변형된 네덜란드어(아프리칸스라고 불리는 언어, 이른바 보어인들의 언어), 줄루어가 뒤섞인 영화를 보면서 공교롭게도 바로 우리 자신들의 얘기를 반추하게 되는 건 참으로 기이한 경험이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여기나 저기나, 지구의 반대편에서 살아가거나 살을 부대끼며 바로 옆에서 살아가거나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영화는 종종, 아니 아주 자주, 불편한 현실을 공유하게 함으로써 이상한 방식으로의 정신적 연대의 길을 찾아가게 만든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여전히 차별이 존재하고, 그것이 대체적으로는 경제적인 갈등, 빈부격차와 양극화에서 비롯되고 있는 바, 지구 여느 곳과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다만 그 정도의 차이만 존재할 뿐이다. 우리나 아프리카나 과거의 식민지 압제를 벗어나 정치적 해방을 얻긴 했으나 경제적 차별 문제, 곧 자본주의 양극화가 모든 사회 문제의 발목을 잡고 있는 셈이다. 아직 사람들은, 여기나 거기나, 진정으로 해방되지 못했음을 보여 준다. ‘와일드 이즈 더 윈드’는 흑백 파트너 형사인 부쉬와 존이 주인공이다. 그런데 이 둘이 파트너가 된 것도 처음엔 다분히 인위적이고 인공적인 정책의 발상에서 비롯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공공기관이 먼저 이렇게라도 모범을 보여서 흑백 갈등 문제를 좁혀 보겠다는 취지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존의 표현대로(“믿는 거 너뿐이야”) 둘은 어느덧 형제 같은 사이가 됐다. 그렇게 된 데에는 둘이 뇌물을 받아 살아가는 부패 경찰이기 때문이다. 둘은, 고속도로나 국도에서의 속도위반 차량으로부터 작은 돈을 받는 정도의 하급 부패경찰이 아니다. (그것도 돈을 직접 받는 사람은 흑인인 부쉬이다. 둘은 계급상 상하 관계로 존이 약간 높다) 둘은 작정과 작당을 하고 다량의 마약을 지니고 있는 흑인 하부 갱 조직을 급습하기까지 한다. 이 둘은 범죄자이긴 해도 어쨌든 흑인 셋을 죽이기까지 해서 마약을 빼앗는다. 한탕 크게 친다. 큰돈을 벌 요량이다. 부쉬는 더 이상 차별받는 삶과 가난이 지긋지긋해서(사랑하는 아내는 곧 출산을 앞두고 있고 거실에 있는 TV를 바꿔야 하지만 돈이 없어서 그러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백인 경찰 존은 자신의 농장을 은행에 차압당할 위기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둘은, ‘모두들 다 해 처먹고 사는 세상에서’ 자신들이라고 그러지 말고 살라는 법은 없지 않느냐는 생각에 이른 상황이다. 부패와 불의, 악을 공유하면 처음엔 공고한 신뢰가 쌓인다. 서로가 서로의 뒤를 봐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철저하고 세밀하게. 하지만 부패로 쌓은 관계는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 부쉬는 나중에 존의 얼굴을 갈기며 이렇게 얘기한다. “결국 드러내는구나. (너희 백인들의) 본색을.” 존은 그런 부쉬를 상관의 권리로 정직시키고 나중엔 공무집행 방해죄를 적용해 수갑까지 채우려 한다. 두 흑백 남자의 앞에는 마약범들을 강탈한 강도 공범이라는 문제가 놓여 있지만, 동시에 18세 백인 여자 아이가 잔인하게 살해된 사건까지 함께 수사해야 할 처지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흑인 아이가 수없이 살해되는 일에는 언론이나 정치권이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백인 여자 아이가 강간당한 채 살해당하면 지역사회가 들끓는다. 그리고 마치 당연한 듯이 흑인 용의자를 잡아들인다. 존과 부쉬, 부쉬와 존은 이 문제를 놓고 자신들이 지닌 피부 색깔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영화 ‘와일드 이즈 더 윈드’의 이야기는 남아프리카 사회의 중층(重層) 모순을 풀어내려고 애쓴다. 공식적으로는 차별 정책이 폐지됐지만 30년 넘게 이 사회 속에 뿌리 깊게 배어 있는 흑백의 갈등 문제를 축으로 정치권의 오랜 부패, 경제적 양극화, 만연돼 있는 강력 범죄 등등 수많은 문제가 3단 케이크 혹은 4단 케이크 마냥 겹겹이 쌓여 있음을 보여 주려 한다. 죽은 백인 소녀와 잡혀 온 흑인 용의자는 놀랍게도 연인 사이이다. 백인 여자아이는 지역사회에서 주요 인사인 중산층 아버지를 둔 학생이고, 흑인 남자아이는 글도 못 읽는 문맹의 빈민 청년이다. 당연히 범죄 조직과도 가까울 수밖에 없다. 지금의 남아프리카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아니 그보다는 있어선 안 되는 관계이다. 전체 인구의 15%에 불과한 백인 사회가 전체 인구의 75%에 이르는 흑인 사회를 지배하는, 불평등의 나라에서라면 필연적으로 문제를 일으킬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남녀 아이의 사랑이 결실을 맺을 수 있게 됐었다면 아마 남아프리카 사회는 조금씩이나마 좋아질 희망을 나타냈을 것이다. 그건 두 흑백 형사 존과 부쉬가 보여 주었어야 할 사회적 시그널과도 같은 맥락이다. 두 관계는 묘한 대구를 이룬다. 존은 ‘부쉬, 너만 있으면 됐다. 그거면 됐다’고 말하지만 그건 다 허망한 착각이었을 뿐이다. 두 청춘 남녀의 비극만큼 두 형사의 비극은 이 영화가 무엇을 얘기하려 하는지, 또 무엇을 아직도 얘기하지 못하고 있는지를 보여 준다. 영화는 현재 남아프리카 사회가 처한 비극을 나열하는 반면에 아직은 감히 희망을 논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영화는 몹시 답답하고 우울하다. 제목으로도 알 수 있듯이(정통 영문법에 의거해서 형용사의 느낌을 강조하기 위해 문장을 도치시킨 것이다. 원래 문장은 더 윈드 이즈 와일드이다) 바람이 아주 거칠고 황량하다. 아직은 따뜻하고 포근한 바람이 불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짐작하겠지만 영화 ‘와일드 이즈 더 윈드’는 뛰어난 작품이 아니다. 이런 류의 걸작으로 꼽히는 1962년 영화 ‘알라바마 이야기’, 하퍼 리 원작의 소설 ‘앵무새 죽이기’의 수준에는 못 미쳐도 한참을 못 미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이국적인 작품에서 기이한 동질성을 느끼게 된다는 점에서 눈여겨 볼만한 작품이다. 현재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도 사회적 시선이 뾰족한 영화들이 만들어지고 있고, 영화가 이렇게 세상 곳곳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목소리를 내고 있음을 보여 주고 또 실천하고 있어 슬프지만 반가운 작품이다. 지옥에서 살면서 천국을 꿈꾸면 안 된다. 당신만 힘들어질 뿐이다. 영화 속 갱단의 행동대장 같은 이가 하는 말이다. 그것 참 묘하게도 동의가 된다. 파비안 메데아란 이름의 감독이 만들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영화인으로 기억해야 할 이름이 샤를리즈 테론만 있는 것이 아니다.
10월 한 달 동안 여섯 번의 장례식과 한 번의 결혼식을 다녀왔다. 탄생(결혼)보다 죽음이 많으니 인구 성장률이 거의 제로에 가깝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결혼이 곧 탄생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요즘은, 엄혹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이를 제대로 키울 자신이 없다며 출산을 스스로 포기하는 딩크(DINK : Double Income No Kid)족들이 부쩍 많아진 시대이기도 하다. 그러니 실질 인구 증가율은 마이너스이다. 노동력은 점점 더 급격하게 줄어들 것이다. 그렇다고 4차 혁명에 걸맞게 첨단 로봇이 거의 사람 수준으로 개발되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은 데다 한편으론 그 같은 자동화로 인해 그나마 남아 있는 저소득 노동자층의 노동권 박탈을 해소할 방법이나 제도도 마련돼 있지 않은 상태다. 일종의 21세기 형 러다이트(Luddite) 운동이 벌어질 판이다. 주차장에서 주차 요원으로 일하던 노년층들은 주차 시스템의 자동화로 거의 사라졌다. 카페나 식당의 서빙 노동자들도 로봇의 등장으로 조금씩이긴 해도 교체될 전망이다. 결국은 이런 등등의 고민을 해결할 유일한 방향은 복지의 확대이다. 병원을 가거나 교육을 받는 일, 흔히 얘기하는 웰다잉(Well-dying)에 있어 치매 노인 돌봄 같은 사회적 서비스를 국가가 거의 무상으로 보장해 주지 않으면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걱정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런 우려가 모이면 출산율이 낮아질 수밖에 없다. 비루하고 고단한 인생을 자식에게까지 물려주기 싫은 법이다. 빈곤의 악순환이다. 지난 열흘 간 지병이 재발해 응급실과 중환자실, 일반병동, 그리고 외래 진료를 돌면서 느낀 것은 한국의 의료 환경은, 그간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거의 유일하게 복지 시스템을 잘 장착시킨 분야라는 점이다. 이른바 ‘문재인 케어’이 결실이다. 혼미했던 정신 탓에 정확하게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MRI만 세 번을 찍었을 것이다. 중환자실에서 집중 치료를 받았고 일반 병동에서는 간병 간호인 시스템에 의해 가족면회조차 금지된 상태에서 비교적‘서럽지 않은’ 대우를 받았다. 그 병동 복도에는 서예 작품이 하나 걸려 있다. 이렇게 쓰여 있다. ‘세상 모든 근심을 우리가 다 감당할 순 없지만 병들어 서러운 마음만은 없게 하리라.’ 병들어서 가장 서러울 때는 아무도 내 병을 돌보지도 않을뿐더러 관심조차 없을 때이다. 가족이 찾아올 수 없을 때는 더욱 그러한 마음이 들 것이다. 요즘 병원에서는 간호사들이 가족의 역할을 다 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인다. 간호 인력을 그만큼 충분히 투입하고 있다는 얘기다. 병들어 서러운 것 중에 으뜸은 돈 때문에 차별받는 것이다. 병상에 누워서조차 나갈 때 내야 할 치료비가 걱정이라면 서러움이 북받쳐 오를 수밖에 없다. 지난 ‘문-케어’는 이런 걱정을 크게 낮춘 것이 사실이다. 내가 낸 돈은 30만 원이 채 되지 않는다. MRI 세 번에 비하면 턱없이 낮은 금액임을 실감케 한다. 항간에서는 이런 문-케어가 축소되거나 없어지기 전에 아픈 것도 빨리 아픈 게 낫다는 말이 돌고 있다. 지금의 윤석열 정부는 과잉 진료로 인한 도덕적 해이가 발생하고 있다며 건보재정 건전화를 추진할 의사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의료 민영화를 생각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렇게 되면 돈을 많이 가진 자가 최상의 서비스를 받는 일이 빈번해지고, 반면 취약 소득계층은 의료 서비스에 있어 점점 더 소외받는 일이 많아지게 될 것이다. 이게 더 큰 문제다. 와병을 반복할 때마다 93세 노모의 걱정과 잔소리도 늘어난다. 노모는 카톡으로 건강이 최고다, 일을 줄이고 몸을 돌보라, 적어도 몇 달은 쉬어야 한다는 둥의 얘기를 보내신다. 다 옳은 말이지만 한국 자본주의 환경에서는 아플 권리 역시 돈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일을 쉬면 당장 한 달의 생계가 끊기는 상황에서, 기본 소득을 보장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한가하게 요양을 한다느니, 시골에 내려가서 건강을 회복하며 지낸다느니 하는 얘기는 다 헛소리일 뿐이다. 배부른 소리에 불과하다. 프리랜서 노동자, 글 노동자들의 원고료는 200자 원고지 1장 당 8천 원에서 만원인데 이 가격은 지난 30년간 단 1원의 변화도 없는 것이다. 어쨌든 원고 프리랜서가 3인 가족을 유지하려면 최소 300매의 원고를 써야 한다. 한 번에 100매씩 세 건의 원고를 쓰는 건 노동강도가 오히려 낮은 편이다. 한 번에 10 매씩 30 건의 원고를 쓰는 건 지옥의 노동에 해당한다. 원고료의 현실화는 문화체육관광부 같은 주무부처에서 주도해야 한다. 행정기관에서는 30년간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다. 아파도 일을 해야 하고 그 노동 때문에 다시 병이 도지고, 결국 이것 역시 빈곤의 악순환이다. 어디선가 고리를 끊어 내야 한다. 지금의 윤 정부가 그러한 위업을 달성해 낼 수 있을까. 전혀 기대를 하지 않는다. 윤 정부 실력으로는 정치의 민주화를 달성하거나 국방의 선진화를 이루어 내지도 못할뿐더러 경제와 민생을 잘 챙기지 못할 것이다. 부자 감세만으로도 그건 이미 판명이 난 일이다. 춘천의 레고 랜드 사태만 봐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2천억 막으려고 50조 플러스알파의 양적 완화를 시행한 것은 시장에 어떤 시그널을 준 것일까. IMF 때보다 더한 고통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론 스타 사태처럼 해외 헤지펀드의‘먹튀 장난질’이 더 큰 판으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병상의 시름이 깊어진다. 국민 개개인의 걱정을 사는 국가는 옳게 작동하고 있는 나라가 아니다. 지금의 윤석열 정부가 그렇다. 그것도 집권 단 5개월 만에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국가 운영을 한 줌의 특수부 검사로만 해 낼 것인가. 그들의 비뚤어진 소명의식은 도대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가.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은 1918년에서 1933년까지 단 15년만 반짝했다. 이후엔 바로 히틀러 시대로 넘어갔다. 이때의 독일 문화의 부흥은 후대의 세계사에 남을 정도다. 지금 K콘텐츠가 세계를 주름잡는다. 반짝하는 모양새일 수 있다. 앞으로의 한국사회가 걱정되는 건 바이마르 시대가 생각나서이다. 당신은 정말 걱정되지 않는가?
팬데믹 이후 반짝 활기를 찾았던 극장가가 다시 보릿고개로 접어들고 있다. 최근 박스오피스 1위 작품의 일일 관객수가 1만명대에 머무는 등 저조한 성적을 보이고 있다. 통상 극장가에서 10∼11월은 비수기로 여겨지지만, 이를 고려하더라도 예년보다 더 관객 발길이 끊겼다는 것이 영화계의 분석이다. 관객을 극장으로 유인할 만한 영화가 적은데다,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콘텐츠 소비 증가 흐름, 관람료 인상 등의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풀이된다. ◇ 10월 일일 평균 관객수 21만명…팬데믹 이전 절반도 못 미쳐 22일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이달 1일부터 20일까지 영화관을 찾은 관객 수는 총 427만4천여 명이다. 하루 평균 21만3천여 명이 들었다. 이는 팬데믹이 한창이던 2019년(14만9천여 명)과 2020년(16만7천여 명) 10월 일일 평균 관객 수보다는 많지만, 코로나19 발생 이전인 2019년(47만9천여 명)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치다. 10월 셋째 주만을 놓고 보면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올해 10월 셋째 주(10월 10∼16일)총 관람객 수는 127만9천여 명인데, 이는 지난해의 154만9천여 명보다도 적다. DC 새 히어로물 '블랙 아담'이 개봉하며 상황은 호전됐지만, 하루 관객수는 개봉일인 19일 6만7천여명, 20일 4만5천여명 등의 수준이다. ◇ "볼만한 영화 없다"…작품 가뭄에 관객 발길도 '뚝' 영화관을 찾는 관객이 줄어든 데에는 '볼만한 작품'이 예년만큼 많지 않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2019년 10월의 경우 '82년생 김지영', '가장 보통의 연애', 외화 '조커'·'말레피센트 2'·'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 등 중급 영화들이 개봉해 관객과 만났다. 하지만 올해 10월 현재까지 개봉한 중급 이상의 작품은 '대무가', '블랙 아담' 정도뿐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추석을 겨냥해 9월초 개봉한 '공조 2: 인터내셔날'이 개봉 7주 차에도 여전히 박스오피스 상위권에 올라 있을 정도다. 오동진 영화평론가는 "OTT로 작품이 몰리면서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작품 수 자체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며 "비수기를 끌고 갈만한 영화가 없었던 것"이라고 분석했다. 극장 개봉일과 OTT 공개일 사이의 간격이 점차 짧아지고 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디즈니 영화 '토르: 러브 앤 썬더'와 '버즈 라이트이어'는 개봉한 지 두 달 만에 자체 OTT 플랫폼 디즈니+에서 서비스를 시작했다. 올해 여름 대작으로 꼽혔던 '한산: 용의 출현'과 '비상선언'은 한 달 만에 쿠팡플레이에서 공개됐다. 영화계 관계자는 "코로나 이후 홀드백 기간(극장에서 상영한 영화가 다른 플랫폼에서 서비스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짧아지면서 이 기간을 견디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주말 일반 2D 관람료가 1만5천원까지 오르면서 위축된 소비 심리도 영향을 주고 있다. 멀티플렉스 3사는 티켓 요금을 인상한 뒤 각종 할인 쿠폰을 제공하며 관객을 끌어들이려 하고 있지만, 관람료 인상에 대한 심리적 장벽이 높아지면서 영화 관람을 망설이고 있다는 것이다. ◇ '블랙 팬서2' '아바타:물의 길', 극장가 훈풍불까 내달에는 마블 스튜디오 신작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블랙 팬서 2')를 필두로 김래원·이종석 주연 액션 영화 '데시벨', 유해진·류준열 주연 미스터리 스릴러 '올빼미' 등의 기대작이 개봉을 앞두고 있다. 12월에는 13년째 전 세계 박스오피스 1위를 지키고 있는 '아바타'(2009)의 후속편 '아바타: 물의 길'이 관객을 찾는다. 영화계 관계자는 "이들 작품이 어느 정도 극장가를 견인하긴 하겠지만 특정 영화에만 관객이 쏠리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심해질 것"이라며 "산업 재편기에서 영화관은 OTT와 역할을 분담하는 구조로 전환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극장 관계자는 "고물가, 고금리, 고환율 등 전반적으로 침체한 사회적 분위기가 영향을 미친 것 같다"면서도 "'블랙 팬서 2'뿐 아니라 한국 영화 기대작이 개봉을 확정하고 있는 만큼 극장에 대한 관심이 좀 더 높아지지 않을까 기대한다"고 말했다.
넷플릭스에 올라 있는 ‘아웃핏’을 보는 건 기대를 훨씬 벗어나는 일이다. 이 영화를 보는 당신은 오프닝을 지나치면서 ‘설마 이게 끝까지 이러지는 않겠지’라는 의구심을 살짝 갖게 된다. ‘장르는 갱스터 영화라고 했다. 그러니 더욱더 영화 끝까지 공간 하나에서만 끝나지 않겠지.’ 그러나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시카고 어느 골목 끝에 있는 주인공 레오나드(마크 라일런스)의 양복점 안에서 시작해서 양복점에서 끝이 난다. 바깥이라곤 레오나드가 출근하고, 마지막에 자신의 오랜 일터를 떠날 때의 양복점 문밖이 전부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올곧이 세트 촬영 하나로 이야기를 꾸민 셈이다. 영화 ‘아웃핏’의 로그 라인은 이렇게 돼 있다. ‘시카고에 자리 잡은 영국인 양복점 명장이 갱스터들과 엮이면서 겪게 되는 위험한 생존 게임을 다룬 영화.’ 그래서 으레 그렇듯이 총기 난사 장면이 비교적 발레를 보는 마냥 펼쳐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른바 이런 류의 갱스터 영화가 보여주는 ‘총알 발레’의 향연을 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총알 발레라는 용어는 샘 페킨파의 ‘와일드 번치’ 이후 나왔다. 총격 신이 마치 한 편의 발레 무대를 보는 마냥 역설적으로 아름답고 부드럽게 묘사됐다는 의미다. 대부분의 총격 신을 슬로 모션으로 처리한 데서 비롯됐다) 그 기대치를 벗어난다. 그런 총싸움 따위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물론 총격 장면이 필연적으로 벌어지긴 한다. 영화 속에서는 두 사람이 죽는다. 그리고 그 사건은 은폐되고 사건의 해결 과정은 치밀한 두뇌게임에 의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이 영화는 ‘시카고 갱단’이란 말과 싸움에 방점이 찍혀져 있는 것이 아니라 ‘생존 게임’이란 어구에 강조점이 찍혀 있다. 재단사 레오나드는 두 갱단이 조직 싸움 사이에서 살아날 수 있을까. 그가 살아난다면 어떤 재능 때문일까.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어떤 사람이었나. 제목의 아웃핏은 옷, 의상, 복장을 말한다. 우리가 잘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재단사와 재봉사의 차이이다. 그건 마치 제빵사와 제과사를 구분하지 않고 쓰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주인공 레오나드는 자신을 재봉사(taylor)라 부르는 사람에게 자신은 재단사(cutter)라고 강조한다. 재단사는 옷을 입는 사람의 직업, 외모의 특성, 캐릭터, 부(富)의 정도에 따라 치수를 재고, 어디를 강조하고 어디를 뺄지를 결정하며 완벽하게 옷과 사람이 한 몸이 되도록 의상의 구조를 짜는 사람이다. 재봉사는 그렇게 재단된 천을 재봉질하고 뜯고 꿰매는 기술을 가진 사람이다. 둘 다 없으면 안 되지만, 재단사의 위치가 약간 더 우위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어떤 때는 두 일을 겸하는 경우도 많다. 재단은 좀 더 창조적이고 재봉은 다소 기술적인 일에 머무르는 경우에 해당한다. 주인공 레오나드는 재단사이다. 물론 재봉 일도 겸하지만 (배경이 1959년이고 전후 경제 시스템이 다시 짜일 때인 만큼 인력이 부족한 상황이었을 테니까) 자신은 늘 스스로를 재단사라고 생각한다. 재단사는 나름 머리가 비상하되 자신이 말하는 것보다는 상대가 말하는 것, 상대가 원하는 것을 잘 들어주고 배려해 주는 사람이다. 당연히 눈치가 빠르고 생존력이 강하다. 한 명의 고객에게만 집중하면 결국 단 한 명의 고객도 유지할 수 없는 직업이 이런 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 저 사람의 입장을 다 고려하고 절충하되 어떤 때는 양쪽에 대해 알고 있는 약점을 역으로 이용할 수도 있는 태세가 돼있는 사람들이다. 레오나드는 선하고 조용한 인물이지만 결국 그가 어떤 생존 능력을 지니고 있었는가를 점차 만천하에 공개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폭력의 능력이 아니다. 세상에서 살아남는 자는 지략이 뛰어난 사람이지 힘세고 용맹하기만 한 사람은 아니다. 결코 아니다. 레오나드의 양복점은 시카고 주류 갱단이 사용하는 일종의 돈세탁 장소이다. 곳곳에서 거둬들인 자릿세를 포함해 각종 이권으로 거둔 수익금이 이쪽으로 모이면 갱단 두목의 아들 리치(딜런 오브라이언)와 두목의 오른팔 프랜시스(조니 플린)가 직접 수거해 간다. 매일매일 이 일은 반복적으로 진행되며 레오나드와 그의 여자 점원 메이블(조이 도이치)은 보고도 모른 척, 듣고도 못 들은 척하며 살아간다. 이 갱단의 두목은 레오나드의 오랜 단골이다. 레오나드 역시 그의 보호 하에 장사를 하며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두목은 레오나드가 런던의 세빌로 거리 출신의 재단사임을 인정하는 유일한 사람이다. 이 갱단의 골치는 라퐁텐이라는 이름의, 이 거리의, 일종의 원주민 조직이다. 아들 리치와 그의 파트너 프랜시스는 수거하는 돈들 사이에 아웃핏(미 전역 갱단을 연결하고 이견을 조율하고 관리하는 일종의 감시위원회)의 소인이 찍혀 있는 봉투를 발견하게 된다. 거기에는 녹음용 카세트테이프가 들어 있었으며, 그 테이프에는 그간 FBI가 자신들의 조직을 감청하고 도청한 내용이 담겨있음을 알게 된다. 조직 내 누군가 밀고자가 있고, 그의 도움으로 FBI는 수사 활동을 해왔는데 FBI 내부에도 첩자가 있어 도청 테이프를 한 부 복사해 다시 조직에게 알려 주고 있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조직 내 밀고자는 이 테이프를 상대 조직인 라퐁텐에게 돈을 받고 팔려고 하는 상황. 리치와 프랜시스는 이 테이프를 재생할 수 있는 기계(녹음기)를 구하는 대로 내용을 재생해서 도대체 밀고자가 어디에 도청 장치를 한 것인지,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내려고 한다. (1959년에는 비교적 소형의 카세트테이프가 막 발명됐을 때이다. 이 카세트테이프를 들을 수 있는 레코더는 아직 대중화되지 못한 때이고 영화는 그 부분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부터 얘기는 복잡해진다. 음모는 세 가지 조직 사이에서 떠다닌다. 시카고 갱과 라퐁텐 조직 그리고 FBI. 이 세 조직 사이를 오가며 줄다리기를 하는 인간, 밀정, 밀고자, 첩자는 누구인가. 혹시 프랜시스인가. 가만히 보니 리치와 메이블 사이도 심상치 않다. 그렇다면 점원 메이블인가. 아니면 설마 재단사인 레오나드일까. 재미있는 것은 이 모든 등장인물들 각각이 동기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레오나드는 아무래도 런던에서의 행적이 수상쩍다. 그는 단순한 재단사로 보이지 않는다. 그는 혹시 FBI 요원이 아닐까. 리치도 심상치 않다. 그는 조직의 제2인자이지만 거리에서 아버지가 데려 온 프랜시스에게 밀리는 상황이다. 그는 좀 심약한 편이기도 하다. 거리에서 라퐁텐 조직원에게 총을 맞기도 한다. 혹시 프랜시스를 제거하기 위해 리치가 계략을 꾸미는 것은 아닐까. 프랜시스는 당연히 동기가 충분하다. 그는 조직에 충성을 다하고 있지만 (보스를 위해 총을 6발이나 맞기까지 했다) 리치가 권력을 잡으면 토사구팽 당할 것이 뻔한 것을 안다. 일찍 손을 쓰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할 것이다. 메이블은 메이블대로 꿈이 많은 여자이다. 그녀는 언젠가 이 살육의 거리를 떠나 파리에 가서 정착할 생각을 갖고 있다. 당연히 돈이 필요하다. 그녀의 아버지는 과거 갱단 하수인이었다가 살해당했다. 모두들 동기가 있다. 과연 밀고자는 누구인가. 그보다는 과연 이중에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 영화 ‘아웃핏’은 한 편의 연극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아니 그냥 한 편의 연극을 통째로 세트화해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약 3막 8장 정도로 구성돼 있는 연극인 셈이다. 다분히 셰익스피어적인 연극을 아가사 크리스티 버전으로 극화했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다. 그만큼 스케일보다는 배우 한 명 한 명의 철저한 개인기와 완벽한 소품과 의상, 분장, 세트 등 미장센의 디테일에 절대적 충일감을 가한 작품이다. 영화가 자본과 규모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런 미학적 디테일에서 비롯된 것임을 유감없이 증명한 작품이다. 인간은 얼마나 지적이며 동시에 그 마음속에는 누구나 위선의 어둠과 이중, 삼중의 과거를 지니고 있는가를 보여 주기도 한다. 당신은 영화의 어느 부분쯤에서 밀고자를 찾아낼 것인가. 영화를 보고 있으면 리치의 애인인 척 메이블이, 사실은 프랜시스와 함께 ‘짜고 치는 고스톱’ 한판을 벌이고 있는 것이 아닌 가라는 의심을 하게 된다. 거기까지라도 생각한다면 당신은 이런 류의 범죄 스릴러를 꽤 많이 본 축에 속한다. 쓸데없는 영화로 시간 낭비하지 말고 이번 주는 지적인 소품으로 영화적 쾌감을 느껴 보시기를 바란다. 자, 누군가 밀고자는?
아무리 미장센이 뛰어나고, 배우들 연기가 훌륭한들, 거기다 뭐 연출까지 감각적이네 어쩌네 해도 사랑 이야기는 사랑 이야기일 뿐이다. 그래 봐야 남녀가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술을 마시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윽고 눈과 마음에 불꽃이 튀어 서로의 몸을 이리저리 비벼 대고, 같이 자고, 그러다 같이 살게 되는 뻔한 스토리로 이어진다. 자연스럽게 지지고 볶는 싸움과 눈물이 반복되고, 그러다 헤어졌다 다시 만났다 등등을 반복하는 이야기가 바로 러브 스토리 영화들이다. 때문에 사랑한다는 것에는 별다른 미사여구가 필요하지 않다. 사랑이 아름답거나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건 그렇게 주입된, 관념과 허상에 불과하다. 현실은 다르다. 그래서 이 노르웨이산 영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한국어 제목을 아주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든다. 고개를 절로 끄덕이게 된다. 영어 제목, 노르웨이어 원제는 ‘The Worst Person in the World / Verdensverstemenneske’이다. 그냥 ‘최악의 인간’이다. 별 볼 일 없는 사랑 이야기쯤에 불과할 것 같은데 칸영화제 여우주연상과 LA비평가협회상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로튼토마토 지수 96%에다 미국 개봉 당시 최고 오프닝 수익을 올린 영화이기도 하다. 뭐가 있긴 있다는 얘기이다.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포함해 총 12장의 단막으로 구성돼 있다. 그렇게 영화의 시작을 알린다. 그건 마치 이 영화의 스토리 구조가 아주 탄탄하게 만들어져 있음을 자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무엇보다 문학적 서사가 있음을 드러낸다. 영화는 20대 중반에서 30살로 이어지는 여자 율리에(레나테 레인스베)의 성장사를 그려 나간다. 사랑 이야기인 척 하지만 사실은 한 여인의 자아를 찾아 가는 과정, 그것을 수립해 가는 과정을 한 장 한 장 벽돌을 쌓듯 차곡차곡 보여 준다. 그 이야기 구조가 비교적 빈틈이 없고, 현실적이며, 때로는 코믹하게 때로는 슬프게 구성돼 있다. 사랑 이야기는 어쩌느니 저쩌느니 해도 이야기의 흡입력이 뛰어나야 하는 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그 점에서 점수의 수위를 높게 받을 수 있는 작품이다. 율리에는 의대생이었다가 중도에 포기하고 (마치 인간의 몸을 갖고 일하는 목수 같은 느낌이 든다며) 심리학으로 전공을 바꾼다. 그 역시 사진을 공부한다며 중간에 때려치운다. 그러다 웹툰 작가 악셀(앤더스 다니엘슨 라이)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데 무려 20살 연상의 남자이다. 당연히 이런저런 울고 짜고 하는 이야기들이 진행돼야겠지만, 이 영화가 좋은 건 그런 부분을 많이 생략하고 있다는 점이다. 율리에가 악셀을 떠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계속해서 자기 내부에 텅 빈 무엇이 존재하는 것 같아서이다. 다른 이유들은 부차적이다. 예컨대 악셀은 아기를 낳기를 원하지만 율리에는 애를 갖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이건 그녀의 아버지 때문에 생긴 트라우마일 수 있다. 아버지는 어릴 때 그녀를 버린 것으로 보이며,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살면서 딸의 생일조차 챙기지 않는다) 생긴 갈등 같은 것이 증폭된 결과는 아니다. 그냥 이렇게 계속 살아가는 자신을 잘 모르겠어서이다. 젊은 나이에 걸맞은 관념 덩어리가 그녀의 애정 행보에 걸림돌이 된다. 다 부질없어 보이는데 그건 영화 속 악셀에게도 율리에가 그렇게 보인다. 그런데 제5장 ‘배드 타이밍’에서 내레이션으로 언급되듯이 남녀 간의 사랑 혹은 남자끼리, 여자끼리의 사랑이든 뭐든,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두 사람이 인생의 다른 시기에 만났기 때문이고, 결국 서로가 원하는 것, 원하는 미래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걸 맞춘다고 맞추지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며, 그래서 결국 시간이 흐르면 열기가 식고 대화가 줄며 각자 다른 꿈을 꾸게 되고 한 지붕 아래에서도 독자적인 생활을 이어가게 된다. 최소한 등을 돌리고 잔다. 결혼한 부부가 이혼을 하지 않았든, 오래된 연인이 동거를 계속하며 사실혼 관계를 이어가고 있든 그렇지 않든 그 사랑은 이미 죽은 것이다. 사랑의 동력은 오래가지 못한다. 사랑의 운명은 늘 실패하는 것이다. 율리에가 악셀의 집에서 뛰쳐나온 것이 에이빈드(헤르베르트 노르드룸)라는 남자를 만나기 전인지 아니면 만난 후인지는 그래서 중요하지가 않다. 율리에는 에이빈드를 만나 아주 잠시나마 다시, 세상의 시간이 온통 정지돼 있는 듯한 황홀경에 빠진다. 둘은 각자의 파트너가 있는 상태에서 만났다. 그것도 누군지 알지 못하는 사람의 파티에서. 율리에는 악셀과 한참 실랑이를 벌이며 살고 있는 중이었고, 에이빈드 역시 나중에 알고 보니 환경 액티비스트이자 요가 선생인 수니바(마리아 그라지오 디 메오)와 살고 있던 참이다. 율리에와 에이빈드는 그래서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하는데, 서로 바람은 피지 말자는 것이다. 그래서 바람의 선이 어디까지인지를 두고 얘기를 나누기도 한다. 서로를 이빨로 무는 것은 바람의 행동인가. 에이빈드가 율리에를 물고 율리에가 에이빈드를 물며 둘은 키득댄다. 서로의 냄새를 맡는 것은 바람의 행동인가. 둘은 서로가 서로의 겨드랑이 냄새를 맡으며 낄낄댄다. 재미있어한다. 거기까지는 바람피우는 게 아니고, 자신들은 바람을 피우지 않았다며 아침에 헤어지지만 누가 봐도 율리에와 에이빈드의 마음엔 이제 새로운 사람이 들어서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랑은 바람이며, 늘 변화하는 것이고, 그렇게 새로운 사람을 찾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암수의 동물적 욕구이자 사랑의 본질일 수 있다. 자아를 찾는 것이 먼저인가 사랑을 이루는 것이 먼저인가. 그것이야말로 이 영화가 던지는 화두이다. 제일 중요한 것은 사랑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것이며 멀리 환상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발을 딛고 서있는 땅 위에 있다는 것이다. 율리에가 사랑하는 것은 악셀이나 에이빈드가 아니다. 율리에가 사랑하는 것은 율리에 자신이다. 바로 그 점이 이 영화의 이야기, 총 12장의 이야기가 귀결되는 부분이다. 사랑은 자기애(自己愛)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거나 그러지 못하는 자는 결국 뜨거운 사랑에 실패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뜨거운’ 사랑이다. 사랑은 실패가 숙명이다. 다만 뜨겁고 달콤한 것을 단 한 번이라도 취해 봤느냐, 그렇지 않았느냐는 매우 중요한 문제일 수 있다. 사람들이 늘 목말라하는 것은 그냥 사랑이 아니다. ‘뜨거운’ 사랑이다.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사람들이 줄곧 궁금해하는 것에 대한 답을 마련하려 애쓴다는 점에서 눈에 띄고 가슴에 남을 작품이다. 사랑은 무엇인가. 사랑의 기술은 무엇인가. 그건 에리히 프롬 같은 오랜 철학자조차 궁금해하고 회의했던 부분이다. 사랑의 본질은 무엇인가. 프롬이 가르치려 했던 것은 사랑의 기술이 아니다. 그의 저서의 원제는 ‘The Art of Loving’, 곧 사랑하기의 기술이다. 사랑은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행위의 결과물이라는 얘기이다. 율리에처럼 사랑이 무엇인지, 나는 누구인지를 주야장천 고민해 봐야 그 기술을 터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율리에가 그런 오류를 숱하게 저지르는 것은 젊고 어리기 때문이다. 치기 어린 나이에는 늘 그렇게, 사랑하기보다는 사랑의 본질부터 찾으려 하기 마련이다. 그건 누구나가 다 그렇다. 요아킴 트리에 감독이 만든 이 로맨스 영화가 닿으려고 하는 부분은 거기에 있다. 주연 여배우 레나테 레인스베는 요아킴 트리에의 영화적 화두를 완벽하게 소화해 내는 연기를 펼친다. 러브 스토리 영화는 스토리가 탄탄해야 하지만 인물(=배우)이 매력적이어야 한다. 레나테 레인스베의 매력은 영화 속에서 차고 넘친다. 당신은 지금 최악의 시기를 겪고 있는가. 당신은 지금 사랑에 빠져 있는가. 무엇보다 당신은 지금 ‘뜨거운’ 시기를 보내고 있는가.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지만 사랑이 지나고 나면 누구나 최선의 사람으로 한 걸음 나아가게 된다. 사랑은 그런 것이다. 후회만 남게 되겠지만 사람들이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이다.
대체적인 사람들, 평균적인 사람들은 ‘미술이요?’하면 ‘아휴, 잘 몰라요’라고 할 것이다. 그건 누군가가 앞에 나타나 쇼스타코비치나 말러의 음악 어쩌고저쩌고할 때 사람들이 가능한 일제히 입을 다무는 것과 같은 분위기다. 그럼 ‘김창열 화백은요?’하면 뭘 그리신 분이냐고 질문이 되돌아올 수도 있겠다. ‘물방울을 그렸지요’하면 ‘아 그 줄곧 물방울만 그리신 분!’이라 할 것이다. 맞다. 1971년부터 2021년 타계하는 날까지 줄기차게 물방울만 그렸던 김창열은 우리가 미술과 예술에 대해서 알 듯 모를 듯하는 만큼, 알 듯 모를 듯하는 물방울 작가이다. 그에 대한 얘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 역시 김창열에 대해서, 미술과 예술에 대해서, 인생과 세상에 대해 알 듯 모를 듯 오묘하고 그래서 기이하게도 가슴을 벅차게 만드는, 젊은 사유의 언어가 가득한 다큐멘터리 작품이다. 흔히들 ‘시네 에세이’라 부른다고 하지만 공식 장르는 아니다.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는 엄밀하게 얘기하면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스토리 구성이 인위적으로 착착 이뤄진 이 작품을 만든 감독 김오안은 사진작가이자 화가이고 재즈 아티스트이기도 하며 무엇보다 김창열의 아들이다. 작품엔 그의 탄탄한 사유의 흐름이 담겨 있다. 기이하고 신비스러우며 미스터리스러운 면도 있는데 그건 다분히 이 영화가 영상과 이미지보다(감독은 그렇다고 주장하겠으나) 언어와 문장이 앞서 있는 작품이라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는 김오안의, 그의 아버지 김창열에 대한 얘기이고 구술과 대화로 만들어졌을 법한 부자 자서전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책으로도 충분히 나올 가치가 있고 그래야만 할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영화를 문장으로서 사유하게 하는데, 만약 이 작품을 책과 글로 보고 있으면 이번엔 반대로 이미지와 물방울 그림들이 연속해서 떠오르는 형국이 될 것이다. 이런 느낌, 이런 장르의 작품을 뭐라 불러야 할까. 시각화의 문체화? 다큐의 문학화? 문학의 영화화? 다큐 전편이 불어로 구성돼 있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역설적으로 2022년에 만나는 누벨바그 형 프랑스 영화 같다는 느낌을 준다. 영화는 앞뒤 맥락을 같은 의미로 이어 놓는, 양괄식으로 돼 있다. 거기엔 마치 질문과 같은 종지부 문장이 있다. ‘나의 아버지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영화의 오프닝에서 감독 김오안은 아버지에 대해, 어머니가 자신과 자신의 형에게 침대 머리맡에서 돼지 삼 형제 얘기를 해줄 때, (놀랍고 두렵게도)달마 대사 얘기를 하던 사람이라고 했다. ‘달마대사가 말이다. 9년간 벽을 보고 참선을 했대. 면벽수도라고 해. 졸음을 쫓으려고 눈꺼풀을 칼로 잘라내면서까지 수도를 했대. 그리고 결국 9년 후에 진리를 깨달았단다.’ 아들 김오안의 다큐 초반은 김창열이 어린 두 형제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던 아버지였다며, 불길한 시작을 보인다. 이건 아버지 김창열에 대한 트라우마를 기록한 작품인가. 위인과 거장, 위대한 작가의 아들이 얼마나 불행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프로이트나 칼 구스타브 융 방식의 분석이 들어간 작품인가 생각하게 만든다. 영화의 말미에는 그 모든 것이 그렇지 않다는 종지부의 문장이 두 개 찍힌다. “바로 이것이 부질없이 복잡한 나의 삶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오프닝 때 했던 문장의 반복. “이것이 나의 아버지이다.” 김창열의 물방울 작품을 많이 봐 온 사람들에게도 이 다큐는 꽤 색다름의 미학적 울림을 준다. 김오안은 그걸 이렇게 표현한다. 두 개의 물방울이 있는데 그 둘은 전혀 닮지 않았다. 닮은 물방울은 하나도 없다. 김오안의 속삭임과 그의 카메라는 수도 없이 다른 표현의 물방울에 대해 얘기하고 그걸 그린 김창열의 그림을 보여 준다. 추상적인 물방울도 있고 표현주의적 물방울도 있다는 식으로 물방울의 다양성이 이어진다. 물방울 안에 물방울, 물방울 밖의 물방울, 쓸려가고 밀려오는 물방울, 그저 의미 없이 흘러가는 물방울 등등 물방울 하나나 두 개를 그리는 것은 구상이지만, 100개나 1000개를 그리면 계획이 되고, 만 개와 10만 개를 그리면 어떤 사람이 되는 것이며 엄청난 야심이 되기도 하고 신비와 광기가 되기도 한다는 얘기가 이어진다. 그리하여 우리는 결국 김창열의 물방울 작품 하나하나가 얼마나 개체적이고 또 얼마나 전체적인가를 알 수 있게 된다. 그의 작품이 자신의 고민에서 시작돼 어떻게 세상과 연결돼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삶, 고민과도 결국 그리 다르지 않다는 생각의 파장이 이어지게 만든다. 보는 사람들 개개인에게 일종의 깨달음을 스며들게 한다. 각각의 물방울마다 담긴 비명과 울림, 침묵의 극한, 그 의미를 깨닫게 한다. 그런 면에서 이 다큐는 꽤 노자 철학적이다. 노자는 김창열이 물방울을 그리기 위해 9년, 아니 평생을 벽을 보며 얻고자 했던 사유의 기반이다. 결국 부질없이 복잡해지기만 했을 뿐이라고 고백하고 있을지언정 김창열은 궁극적으로 많은 의미가 들어가 있고, 또 드러나 있는 작품을 만들었다. 그의 위업이다. 아들의 다큐는 아버지의 생애와 작품이 갖는 위대함을 따라가며 애썼고 그런 부분에서 성공적이다. 예컨대 물방울의 이미지가 쏟아지는 빗물, 소담스럽게 내리는 눈꽃송이, 기와에 점점이 박히는 빗방울 등에서 온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김오안의 카메라가 중간중간 그 같은 이미지를 정성스럽게 담아내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 김창열의 쏟아지는 물방울 작품은 2차 대전 때 노르망디에 쏟아져 내렸던 낙하산 부대의 모습에서 나온 것이다. 김창열의 작품 속에는 전쟁과 죽음, 이데올로기의 갈등, 그 어두운 역사의 내면이 숨겨져 있다. 이 다큐는 그러한 사실을 알게 해 준다. 이걸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는 꽤 드라마틱하다. 김창열처럼 김오안 역시 다큐란 물방울 하나를 시작한 데뷔 감독이 됐다. 김오안의 이번 시네 에세이는 김창열의 또 다른 물방울이다. 물방울이 물방울이 돼서 만났다. 그 가계(家系)의 이어짐이 감탄스러운 작품이다.
빌리 서머스는 킬러다. 지금까지 16건인지 17건인지, 비교적 오랜 기간 이 ‘업계’에서 이름을 날려 온 저격수이다. 그는 원 샷 원 킬로 사람을 죽이는 킬러로 빌런(악당)만을 죽인다는 자부심을 지니고 있는 자이다. 에밀 졸라의 『테레즈 라캥』을 끼고 다니며 토마스 하디의 작품을 좋아한다. 제임스 M. 케인(『포스트 맨은 두 번 벨을 울린다』)과 데이비드 포스터 같은 작가 얘기도 심심치 않게 머릿속에서 뱅뱅 거리며 살아가는 특이한 인물이다. 그는 닉이라는, 메릴랜드와 펜실베이니아, 그러니까 미 동부 지역을 장악한 마피아 보스에게서 조엘 앨런이라는 인물을 ‘처치해’ 달라는 ‘주문’을 받는다. 빌리는 200만 달러라는 큰돈을 바하마에 예치하는 것을 조건으로 인생의 마지막 작업에 착수한다. 착수하되 이건 좀 시나리오가 필요한 일이라 그는 당분간, 조엘 앨런이란 인물이 곧 출두할 법원 주변에 똬리를 틀고 보통사람으로 스며들어 살아가야 하며 다운타운에도 사무실을 유지하는 척해야 한다. 직업은 출판사 에이전트에게 원고 마감에 쫓기는 무명작가 노릇으로 정한다. 재미있는 것은 그에게 이번 일을 맡기면서 조직 보스 닉과 그의 하수인 중 한 명인 조지 러소라는 인물은 빌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만화 읽는 중간에 뭐 좀 끼적거리는 거 잊지 마. 그 뭐냐. 캐릭터에 녹아들 수 있게. 맡은 배역에 걸맞게 살라고.” 미국의 저명한 작가이자 공포 소설의 대가인 스티븐 킹의 새 소설 『빌리 서머스』는 초장부터 그가 70 중반의 나이에도 자신의 창작 영역을 계속해서 새롭게 넓히고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번엔 하드보일드이다. 마치 레이먼드 챈들러 같다. 주인공 빌리 서머스는 챈들러의 소설 속 페르소나 필립 말로우를 닮았다. 챈들러이긴 챈들러이되 에밀 졸라와 토마스 하디를 섞는다. 독특하다. 인문(人文)의 여기저기를 뛰어넘고 다녀 딜레탕트들의 군침을 흘리게 한다. 예컨대 로널드 레이건의 외교 어록까지 들먹인다. 그는 고르바초프와의 핵 군축 협상을 하면서 이런 얘기를 해서 배우 출신의 대통령이라는 선입견을 깨부수었다. ‘신뢰하되 검증하겠다.’ 이 말은 나중에 두고두고 공화 민주 양 진영에서 사용됐는데 존 케리 미 국무장관도 써먹었고 트럼프 시절의 마이크 펜스 부통령조차 써먹었던 말이다. 칼럼을 돌고 돌아 여기까지 온 것은, 무릇 칼럼이라고 하는 것이 좀 재미있기도 해야 하는 데다 소설과 현실, 문학과 정치 그리고 외교의 경계를 여기저기 ‘뛰어 댕기는’ 면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스티븐 킹의 소설을 읽으면서 정치와 외교를 좀 문학적으로, 좀 교양스럽게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하는 소리이기도 하겠다. 하루가 멀다 하고 ‘괴랄’한 사건이 터지고 엽기 발랄한 해석이 붙여진다. 가장 부강한 나라… 까지는 아니어도 어쩌면 삶의 만족도가 나름 나쁘지 않은 나라는 베르나르 피보 같은 서평 작가가 돈을 버는 사회일 수 있겠다. 이른바 뇌피셜을 동원해 온갖 요설들을 퍼뜨리는 정치평론의 사회는 결코 건강한 사회일 수 없다. 대통령이란 사람이 스스럼없이 이 XX 저 XX 하는데도, 그렇게 그런 말이 입에 배 있는 인물인데도 사회 일부에서 그게 다 검사 시절의 말버릇이니 넘어가 주자라느니, 오히려 친근감의 표시라느니 하는 소리가 나오는 걸 보면서 실소가 아니라 실금을 할 뻔할 정도였다. 그것도 지식 연연하는 사람들 입에서 나오는 얘기이다. 이 땅의 3~40%의 인구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이다. 어떻게 그러면서 집안의 청소년들에게 어디 가서 겸손하게 굴어라, 너보다 못한 사람들일지라도 막 대하면 못쓴다 식의 교육을 하겠는가. 대학 논문, 그것도 박사 논문을 해당 학과의 전공과목과는 무관하게 무속 비슷한 소재와 주제로 쓰면서도 여기저기서, 요즘 애들 말로 ‘복붙’해서 학위를 따고 온갖 강의를 다닌 사람을 탓하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비호하는 세상에서 어떻게 대학 중간고사나 학기말 고사 리포트를 포털에서 베껴 내면 선생인 내가 다 아니 그런 짓 하지 말라고 가르칠 수가 있겠는가. 거짓이 비호되는 세상은 우리 현대사에 일제와 일제잔재가 청산되지 않았던 그 이후의 독재 시대 때이다. 지금이 그런 때인가. 좀 적당히들 했으면 좋겠다. 적당히들 해 ‘처’ 드셨으면 좋겠다. 표현이 과격하다고 느끼시는가. 이 XX 저 XX와 진배없다고 하실 셈인가. 그렇다면 말을 바꾸겠다. 좀 상식적이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사과하겠다. 거친 표현을 사용해서 죄송하게 됐다고. 그러니 그분도 시원하게 사과하시라. 통 큰 분이라 자타칭 소문을 내신 것으로 안다. 사람들은 그걸 신뢰해서 뽑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몰랐던 것은 이제 서서히 진짜 검증에 들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적어도 레이건까지만이라도 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신뢰하되 검증할 것이다. 얼마나 멋있었으면 반대 정당까지 써먹었겠는가. 그 뭐냐. 캐릭터에 좀 녹아 들어서 사시길 바란다.
한때 프랑스의 악동 감독이라 불리며 불란서 영화계의 앙팡 테리블을 자처했던 프랑수와 오종 감독도 요즘 죽음에 대해 생각이 많아 보인다. 그의 2021년 영화로 최근 국내 개봉된 ‘다 잘된 거야’가 안락사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다루긴 다루되 이런 류의 이전 작품과는 다소 선을 긋고 간다. 차이가 있다는 얘기다. 이제 안락사는 ‘안락사’라는 표현보다는 ‘조력 자살’이란 표현을 더 많이 쓰는 것처럼 보인다. 조력 자살은 안락사하기로 결정한 죽음의 주체보다는 해당 죽음을 준비하는 주변 인물, 가족들에게 좀 더 초점을 맞추고 있는 개념이다. 죽는 사람보다 그를 죽게 하는 사람이 더 힘들다는 걸 이 영화는 거의 처음으로 웅변하고 주장한다. 그 점이 여타 작품과 다르다. 영화 ‘다 잘된 거야’는 후반부로 가면서 서서히 가슴이 조여 오는 서스펜스(긴장감)를 느끼게 되는데, ‘과연 저 남자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올바로 죽을 수 있는가’, ‘혹시 종종 다른 사람들이 그런다는 것처럼 최후의 순간에 마음을 바꾸는 것은 아닌가’, ‘죽음의 절차가 저렇게 까다롭다면 조력자들이 법과 제도, 시스템에서 과연 탈출할 수 있겠는가’ 등등의 의문에 싸이게 되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영화 후반 내내 주인공 아버지가 제발 ‘안전하게 죽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된다. 혹시 프랑수와 오종이 갖고 있는 은밀한 장난기가 발동해, 안락사 문제를 뒤집어 존엄사란 목표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한 끈질긴 의지를 강조하려는 쪽으로 결말이 맺어지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정말 주인공의 아버지는 잘 죽을 수 있을까. 영화를 끝까지 긴장을 갖고 쳐다보게 만든다. 이 영화의 원작자이자 주인공인 엠마누엘 베르네임(소피 마르소)은 뇌졸중으로 쓰러진 아버지(앙드레뒤 솔리에)로부터 이제 끝을 내달라는 부탁, 아니 요청을 받는다. 엠마뉘엘은 동생 파스칼(제랄딘 팔리아스)과 의논 끝에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해주기로 한다. 아버지는 워낙 고집이 강하고 제멋대로였던 남자여서 그의 뜻에 거스르기가 쉽지 않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엠마뉘엘과 아버지는 오랜 기간 싸우면서 정든 사이다. 그리 좋은 부녀 관계는 아니었다. 공장을 소유하고 미술품 수집가였던 아버지는 비교적 부자로 살면서 조각가인 아내(샬롯 램플링)와는 오래전에 헤어졌는데, 그건 그가 동성 연인을 이미 갖고 결혼을 했거나 아니면 결혼생활을 하면서 갖게 됐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한 마디로 자신이 원하는 만큼 이루거나 얻으며 살아 왔으며 자신 역시 그렇기 때문에 이제 마지막을 스스로 정리할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죽는 게 그리 쉽지가 않다는 것이다. 말이 존엄사, 존엄사하는 것이지 인간이 존엄하게 죽기 위해서는 지켜야 할 법과 규정이 너무 많다. 이 말은 거꾸로 얘기해서 몰래, 혹은 다 아는 비밀처럼 어겨야 할 법령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세계에서 존엄사를 인정하는 나라는 스위스 외에는 단 한 군데도 없으며 스위스도 베른에서만 가능하다. 베른에는 존엄사를 돕는 영리 단체가 몇 있는데, 만약 조력자들이 여기에 접촉해서 안락사의 여러 절차를 적극적으로 도운 흔적이 발견되면 징역 5년에 벌금만 거의 1억 가까이를 내야 한다. 죽음을 원하는 자가 스스로의 의지로 베른에 가야 하되, 죽음에 이를 때는 관련 단체 소속인 소수의 사람만이 참관하고 가족들은 나중에 통보를 받아야 한다. 아니면 비밀리에 출입국을 해서 입회하거나. 더 중요한 것은 죽음의 약물 투여를 존엄사 단체 혹은 병원에 준하는 기관에서 해주는 것이 아니라(수면 유도 후 주사 같은 것이 아니라), 직접 100㎜에 해당하는 약물을 삼켜야 하고 이를 토해 내지 않기 위해 구토약까지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 스스로 죽는 길이고 남아 있는 사람들을 또 다른 고통에서 구제하는 길이다. 영화 ‘다 잘된 거야’는 그 모든 과정을 극영화의 방식으로 다큐처럼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제일 중요한 것은 이 역경의 절차를 다 거쳐서까지 과연 사람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가이며, 더더욱 중요한 것은 그런 죽음을 준비하고 조력해 낼 수 있는 가라는 점이다. 영화는 그런 점에서 매우 실질적인 질문을 몇 가지 던진다. 1. 충분한 돈이 있는가(베른에서의 마지막 과정에 1만 유로, 곧 1400만 원 정도가 든다) 2. 존엄사에 대한 생각을 본인과 가족들, 가까운 사람들이 공유하고 동의했는가 3. 온갖 법적 송사에 휩싸일 각오가 돼 있는가 4. 이렇게까지 불편한 과정을 통해서라도 상대를 존엄하게 죽게 해 줄 만큼 그를 사랑하는가 등등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네 번째이며, 영화 ‘다 잘된 거야’는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다들 말로는 쉽게 위의 네 가지를 받아들일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있으면 그동안 생각해 왔던 모든 게 너무 경솔했던 것일 수도 있겠다 싶다. 죽는 게 결코 쉬운 게 아니다. 늘 그렇지만 차라리 사는 게 쉽다. 죽는 것, 죽어 가는 것에는 종교·사회윤리규범 등 제어 장치가 너무나 많고, 이제 그것이 족쇄로 작용하고 있음을 영화는 알 수 있게 해 준다. 과연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약간의 고약한 장난기가 있었던 감독이 기성화 됐다고 해서 과거 버릇을 버리지는 않는다. 이번 영화도 마찬가지다. 뇌졸중으로 일그러진 얼굴과 표정으로 휠체어에 앉아 있는 아버지를 향해 엠마뉘엘은 어릴 때 모습으로 누워 있다가 아버지가 보관한 총으로 그의 머리에 총을 쏜다. 수개월의 간호로 지친 엠마뉘엘이 꾸는 꿈이다. 아버지의 안락사를 받아들인 후 그녀의 잠재적 욕망이 꿈에 나타난 셈이기도 하다. 영화는 딱 한번 웃음을 주기도 하는데 아버지와 두 딸이 병실에서, 아버지는 침상에서 두 딸은 양쪽에 앉아, 안락사 실행 날짜를 정하는 장면이다. 둘째 딸 파스칼은 아들 연주회 때문인지 6월이 짝수 달이고 방학이어서 안 된다고 한다. 엠마뉘엘은 5월엔 영화박물관장인 남편이 없는 때여서 안 된다고 하고, 3월도 안 되는데 그건 파스칼의 생일이 있는 달이어서 그건 좀 아니지 않냐고 그녀가 항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4월 9일로 낙착을 본다. 죽음을 결정하는 세 부녀의 협의 과정이 평화롭다. 오종 감독이 굳이 이 장면을 넣은 것은 평화와 행복은 거기까지라는 것이다. 그때부터 모든 전쟁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프랑스와 유럽 사회가 조력 자살에 대한 문제를 본격적으로 꺼내 든 느낌이다. 영화는 늘 사회와 세상에 어젠다를 던진다. 이 문제는 곧 이슈가 될 것이다. 죽음을 도와주는 절차를 간소화하거나 법리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올 것이다. 언제까지 불법의 영역에 묶어 놓을 것인가. 최근 타계한 영화감독 장 뤽 고다르 역시 안락사였음에도 갑작스럽게 전달된 소식처럼 들렸던 이유는 그걸 쉬쉬하지 않았으면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태어날 권리가 주어지지 않지만, 곧 원하든 원하지 않든 태어나게 되는 것이지만, 죽음만큼은 스스로 고귀함을 누릴 수 있도록 권리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야말로 영화 ‘다 잘된 거야’의 주제이다.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그건 보는 사람들의 몫이다.
인생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제목처럼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사람들은 100퍼센트 만족할 수 있는 상대나 인생의 그 무엇을 누리지 못한다. 그건 자의식 과잉 때문인데, 100퍼센트의 여자와 100퍼센트의 남자는 자신들이 100퍼센트인지를 확인해 보기 위해 헤어진다. 그리고 다시 만나지 못한다. 그런 것이다 인생은. 멕시코의 기이한 감독(멕시코에는 이상한 상상력의 감독이 많다. 길예르모 델 토로 같은. 그런 감독들은 대개 아카데미에서 감독상을 받는다) 미셀 프랑코는 이번에도 어두운 인생의 저편 같은 작품을 내놨다. 영화 ‘썬다운’은 제목처럼 일몰, 해가 지는 삶을 살아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그의 인생은 왜 저무는가’ 이야기는 바로 거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영화는 끝에 가서야 그 이유를 알려주기 때문에 영화 내내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간질인다. 스멀스멀 짜증을 나게 만들며, 분노를 유발한다. ‘주인공 남자 저거, 대체 왜 저러는 거야? 왜 속 시원하게 대답도 안 하는 거야’ 하는 심정이 들게 만든다. 그리고 영화가 거의 끝나갈 때쯤 모든 이유를 알게 된다. 그 이유 하나로 스토리를 몰고 가는 미셸 프랑코의 이야기 솜씨가 꽤 괜찮다. 이런 드라마를 미스터리 기법으로 풀어가는 건 순전히 멕시코식 사고(思考) 때문 일 것이다. 영화 속에도 나오지만 멕시코에서는 일상에서 총격이 벌어지고, 살인과 암살, 납치가 이뤄진다. 산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미스터리이다. 그러니 모든 얘기는 미스터리 구조로 짜는 게 맞다. 영화가 시작되면 어딘가의 초호화 리조트에서 휴양 생활을 하는 중년 남녀와 청년급의 남녀가 보인다. 가족 같지만 완전체는 아닌 것 같아 보인다. 아이 둘은 여자를 엄마(샬롯 갱스부르)로 부르고 남자를 삼촌(팀 로스)이라 부른다. 그런데 이 엄마와 삼촌의 관계가 범상치는 않다. 그냥 이들이 노는 게 너무 사치스러워서 심상치가 않기도 하다. 그러던 중 여자에게 전화가 오고 여자의 엄마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알려진다. 그렇다면 삼촌이라는 남자에게도 엄마가 될 텐데 남자는 여자에 비해 그다지 슬픈 얼굴이 아니다. 급기야 남자는 여권을 잃어버렸다며 여자와 아이들을 집(런던)으로 돌려보내고 혼자서 다시 해변으로 돌아가되 이번엔 완전히 싸구려 모텔 앞 해안으로 간다. 알고 보니 여기는 멕시코 아카풀코였고 좀 전까지 최고급 호텔에 머물던 이 닐이라는 남자, 뭔가 뜻한 바가 있는지 칼레티야 해변으로 온다. 아니 아예 뜻한 바가 없어서 온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해변가 싸구려 상점에서 일하는 멕시코 여자를 만나 몸을 섞고, 같이 지내기 시작한다. 닐은 여자를 따뜻하게, 최선을 다해서 대해 준다. 멕시코 여자도 그런 닐이 좋다. 그러나 정작 런던에서는 난리가 났다. 엄마의 장례식을 홀로 치러야 했던 여동생 앨리스는 아카풀코로 다시 돌아와 이해할 수 없는 오빠의 행동에 대해 설명을 요구한다. 알고 보니 이 남매, 영국에서 양돈과 도축 사업으로 어마어마하게 돈을 번 집안의 자식들이다. 이때부터 영화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이야기를 틀고는 보는 사람들의 생각일랑 아랑곳없이 한 방향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한다. 미셸 프랑코는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되는 것을 그래도 된다고 받아들일 때 삶과 세상이 새롭게 열린다는 것을 늘 자신의 영화로 증명하려 애쓴다. 전작 ‘크로닉’에서 호스피스 간호사(팀 로스)가 사람들을 안락사시키거나 죽어가는 노인에게 포르노를 보여 주는 것도 고통보다는 그게 낫다, 어쩌면 그게 예수의 행위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로닉’의 마지막 장면은 꽤 충격적이었다. 어떻게 저렇게 이야기를 끝맺을 수 있느냐는 ‘원망(?)’들이 적지 않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런 결말 아니면 도대체 이 영화를 어떻게 끝낼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도 하게 만든다. 또 다른 그의 전작 ‘에이프릴의 딸’은 딸의 남자를 차지하려는 엄마(엠마 수아레즈)의 이야기다. 현대사회의 욕망이 모성조차 얼마만큼 변질시켰는지를 보여 주며 도무지 이야기의 결론을 짐작할 수 없게 한다. 미셸 프랑코는 그런 감독이다. 세상은 이미 변이 됐고 정상인 것은 없다고 그는 말한다. 정상이 아닌 사회에서 과거의 관습대로 정상처럼 살아가는 것은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의미도 없다고 그는 말한다. ‘썬다운’의 주인공 닐도 무슨 일 때문인지 삶에 변이가 왔다. 그는 앞으로 다르게 살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 애쓴다. 닐은 주변 사람들의 숱한 질문에 대해 말을 할 듯 말 듯 결국 입을 다물고는 기묘한 표정만을 짓는다. 그 같은 표정 연기는 순전히 노련한 삶의 경력을 지닌 배우 팀 로스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너무 하고 싶은 말이 많을 때 혹은 설명할 게 너무 많을 때 역설적으로 실어증에 걸린다. 실어증에 준할 만큼 입을 다물게 된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왜 닐의 대사가 그렇게나 없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영화에서 닐은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심지어 멕시코 여성의 풍만한 육체를 안고 있을 때도 그는 밀어조차 속삭이지 않는다. 둘의 대화에서 가장 진지하고 그나마 길었던 것은 멕시코 여자가 닐에게 런던에 아내가 있는지, 애들은 있는지, 아니면 다른 여자가 있는지를 물었을 때이다. 닐은 자신은 아내가 없고 아이들은 오직 조카 둘 뿐이라고 말한다. 멕시코 여자는 살짝 ‘이런 남자가 왜 여기서 나를?’하는 표정이 되지만 사실 상관이 없다. 매일같이 죽음이 벌어지는 멕시코 삶의 현장에서 지금 사랑을 나누고, 지금 잠자리를 같이 하며, 지금 같이 지낼 수 있다면 그걸로 됐다. 여자는 그렇게 남자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왠지 둘의 관계의 끝이 그렇게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불길하다. 닐의 삶이 불길하고, 멕시코 아카풀코 해변이 불길하며, 세상이 불길하게 느껴진다. 우리의 삶 모두가 불안하고 불길하게 느껴진다. 아니나 다를까 닐은 자꾸 돼지의 환상을 보기 시작한다. 그것도 도축당한 돼지를. 이번 영화 ‘썬다운’은 전작들에 비하면 이야기의 결말을 비교적 쉽게 짐작하게 만든다. ‘주인공 닐의 선택은 저것일 수밖에 없다. 도대체 그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일까’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사람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존엄해야 한다. 그런데 사는 게 너무 바쁘면 종종 그것을 까먹게 된다. 그걸 잊지 말라고 깨우쳐 주는 영화다. ‘썬다운’은 인생엔 꼭 해가 질 때가 있다는 걸 얘기하는 작품이다. 인생에서 화양연화는 짧다. 화양연화 이후를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해는 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늘. 그것이야말로 변하지 않는 진리이다. 세상의 유일한 진리는 변하지 않는 진리는 없다는 것이다.
올해 8월에도 일본 총리는 전범들의 신사에 공물을 바쳤다. 침략전쟁과 식민지배에 대한 반성도 희생된 개인과 이웃 나라에 대한 사과도 없었다. 나는 8월을 보내며 한 아버지와 아들의 삶을 생각한다. 아버지의 이름은 이상룡이었고, 아들의 이름은 이준형이다. 이제는, 안동 권문세가의 장자이자 지주였던 이상룡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제법 많아졌다. 이상룡은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자 가산을 처분한 다음 집안을 이끌고 만주로 가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이회영 형제와 함께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것도 그였고, ‘항일무장투쟁’을 네 번째 차례에 놓으려는 상해 임시정부의 강령을 첫 번째로 바꾸도록 한 것도 그였으며, 서로군정서를 조직한 것도 그였다. 임시정부가 자리 잡은 번화한 도시 상해로 나가기를 거부한 채 노구를 이끌고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서간도에서 항일무장 투쟁의 최전선을 지켰던 이상룡이었다. 언제나 자신보다 젊은 투사들을 먼저 걱정하고 챙겼던 그는 누구보다 아끼고 믿었던 젊은 동지 오동진과 김도삼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자 슬픔과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죽음을 앞둔 이상룡은 그와 더불어 싸워온 젊은 후배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작은 공로도 남기지 못하고 이렇게 쓰러져, 눈을 감지 못하는 귀신이 될까 참으로 마음이 아프네. 부디 여러분은 외세 앞에 스스로 힘을 잃지 말고 더욱 면려하여 이 늙은이 죽을 때의 소망을 저버리지 말게. 우리가 귀중하게 여길 것은 성실성뿐이네. 진실로 참다운 성실이 있으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함을 근심할 필요가 있겠는가.’ 나라를 되찾기 전까지는 자신을 유골을 조국으로 가져가지 말라는 것이 이상룡이 아들에게 남긴 유언이었다. 이준형은 그의 아들인 동시에 그의 참모였으며 동지였다. 그의 유언대로 아버지를 서간도의 가묘에 묻은 이준형은 아버지의 유골 대신 아버지가 남긴 유고를 안고 귀국했다. 이준형이 아버지의 피와 혼이 담긴 글을 정리하는 동안 일제는 끊임없이 변절과 배반을 강요했다. 반복되는 체포와 구금, 고문을 견디며 아버지 석주 이상룡의 문집 정리를 마친 다음 이준형은 스스로 목의 동맥을 끊었다. 67세 생일에 그는 그렇게 일제의 강요를 영원히 거부했다. ‘일제 치하에서 하루를 더 사는 것은 하루의 치욕을 더 보탤 뿐이다.’ 아들 이준형이 남긴 가슴 아픈 유서였다. 이런 아버지와 아들들이 지켜낸 도저한 나라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일본의 가혹한 압제 속에서 많은 사람이 조국을 배반하고, 심지어는 밀정이 되어 동지를 일제에 팔아넘겼다. 독립군 참모중장 안중근의 아들과 딸이 그 아버지가 처단한 이토 히로부미의 사당에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과 나란히 무릎 꿇고 사죄하기도 했다. 안중근의 결의 형제였던 엄인섭은 일제의 밀정이 되어 철혈광복단 단원들을 사형대에 세우기도 했다. 8월을 보내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변하지 않는 일본과 조국을 배반하고 그들에게 협력하고, 밀정이 되었던 자들과 함께 이상룡과 그의 아들 이준형의 장엄했던 삶이다.
영화 ‘풀타임’이 평화로운 건 오프닝 타이틀이 흐르는 딱 1분 반 동안만이다. 어둠 속에 얕은 숨소리가 들리고 ‘저게 뭘까’하는 순간, 여주인공 쥘리(로르 칼리미)의 얼굴 윤곽을 카메라가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아주 느리게 따라 보여 주는 장면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 순간 알람이 울린다. 해가 떠오르려면 한참이 남은, 여전히 심야인 시간에 쥘리는 간신히 눈을 뜬다. 억지로 일어난다. 잠들어 있는 딸과 아들아이를 역시 억지로 깨우고, 밥을 먹이고, 옷을 입혀, 이웃에서 홀로 살아가는 나이 든 여자에게 데려다준다. 거기까지가 영화의 3분이다. 이때부터 쥘리는 줄곧 냅다 뛰기 시작한다. 파리로 가는 열차를 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열차는 파업으로 중간에 끊어진다. 쥘리는 발을 동동 구르다 대체 버스를 타서 일정 구간을 이동한 후에 다시 열차로 갈아타고, 내려서는 다시 뛴다. 자신이 일하고 있는 5성급 호텔까지 제시간에 도착해야 하기 때문이다. 쥘리는 호텔에서 일하는 메이드이다. 쥘리는 오늘도 지각을 할 판이다. 영화 ‘풀타임’은 격렬한 영화다. 88분의 상영 시간 동안 관객들은 주인공 쥘리와 함께 숨이 차오른다. 삶이 막바지까지 내몰리는 느낌을 받는다. 인생이 꽤 비참한 노동의 연속이라는 점을 새삼 깨닫게 된다. 비루하고 궁색하다. 이런 삶이라면 그다지 계속 살아갈 이유를 찾아가기 힘들다. 그런데 그 모습이 지금의 나 자신, 혹은 우리 모두와 그리 다르지 않다는, 그 극사실주의가 오히려 영화를 보는 내내 절망감을 준다. 쥘리는 살아남을 것인가. 우리 또한 잘 견뎌내고 이겨낼 것인가. 쥘리는 아이 둘을 키우며 살아가는 싱글 맘이다. 파리에서 꽤 떨어진 외곽 마을에서 거주하는데, 도시 서민 아파트에서 애를 키우는 것보다 그게 낫다고 생각한다. 물론 자신의 근무지를 생각하면 자주 지각하는 이유에 대한 변명이 되기는 어려워진다. 호텔 동료들도 그녀에게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오는 걸 생각해 보라는 핀잔을 할 정도다. 연일 이어지고 있는 강경한 철도 파업은 쥘리의 삶 전체를 흔든다. 냅다 뛰어다니는 출근길에서조차 그녀는 신용협동조합에서 대출 이자를 갚으라는 전화를 받는다. 애들 양육비와 생활비를 책임져야 할 전 남편은 이달 치를 보내지 않은 데다 전화까지 받지 않는다. 게다가 그녀는 좀 더 나은 생활을 위해 새로운 직장에서의 채용 면접을 코앞에 두고 있다. 거기에 가려면 현재 다니고 있는 호텔에서 교대 근무를 해야 하는데, 그걸 바꿔 줄 동료를 찾기가 난감하다. 며칠 후에는 아들의 생일이기도 하다. 아들 생일상을 차리기 위해서는 전 남편이 보내 주는 양육비가 절실하다. 여기나 거기나 마찬가지지만 그녀 역시 현금 출납기에서 카드 론을 쓰기 시작한다. 카드의 한도는 얼마 남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진 지 오래다. 그녀의 직장 상사인 호텔 매니저(안 수아레즈)는 그런 그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호텔에서 일하려면 존재감이 없어야 해.” 쥘리도 새로 들어 온 직원에게 비슷한 얘기를 한다. “호텔 투숙객들, 특히 VIP들에게 우리는 있어도 없는 것처럼 행동해야 해.” 있어도 없는 존재들. 몰(沒) 개성화를 요구하는 이런 사회 시스템에서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든 적응하며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음을 보여 주려 영화는 애쓴다. 쥘리의 일상에서 남자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데, 남편은 전화 너머에 있거나 녹음된 목소리로만 존재한다. 남자라고는 기껏해야 파리를 오가는 카풀의 운전대를 잡고 있는 존재들일 뿐이다. 조금 더 나아가 봐야 그녀에게 선택적 호의를 베푸는 호텔 벨보이거나 관계가 약간 발전될 수 있을까 말까 하는 아들 니콜의 친구 아빠이자 전직 군인(시릴 구에이) 정도이다. 극렬한 속도로 양극화돼 가는 세습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사람들의 삶은 곤궁하다. 그중에서 여성들, 하층 여성노동자들, 특히 싱글 맘들의 삶은 위기일발의 순간이다. 이들은 언제 거리에 나가 몸을 팔게 될지, 아니면 아이들과 동반자살이라는 극단의 선택을 하게 될지, 순간순간이 위태롭기가 그지없다. 이런 ‘그녀들’의 삶에 정치와 사회 시스템이 얼마나 보완적일 수 있는가. 그 보완은 또 얼마나 구체적일 수 있는가를 영화 ‘풀타임’은 일일이 열거하고, 문제점을 적시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그게 꽤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설득력이 강하다. 감독 에리크 그라벨이 이 영화로 지난해 베니스영화제에서 왜 오르종티(일종의 뉴 커런츠와 같은) 부문에서 감독상을 탔는지 이해되게 한다. 영화가 세상에 대한 새롭고 놀라운 시선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풀타임’의 배경은 지난 2018년의 파리 철도 파업이다. 지스카르 데스탱부터 프랑수아 미테랑, 자크 시라크 그리고 니콜라 사르코지와 프랑수아 올랑드에 이르기까지 우파와 좌파 혹은 좌파와 우파 간 ‘코아비타시옹(좌우 동거정부)’를 거쳐 오며 힘겨우나마 자본주의가 갖고 있는 폐해를 막기 위해 그 저지선의 바리케이드를 지켜 오던 프랑스가, 중도연합이라는 이름으로 당선된 젊은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의 급격한 우경화에 의해 일시에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보이던 시기다. 파리 시민들이 모두들 노란 조끼를 입고 거리에 나섰던 것은 외형상으로는 유류세 인상 때문이었지만 사실은 자본의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부자 감세에 치중했던, 미성숙한 대통령의 정책 때문이었다. 어느 나라건 국가의 재정 악화가 경제 규제에서 비롯됐다느니, 법인세나 소득세 감세로 경제의 낙수효과를 가져와야 한다느니, 국가 소유의 공기업과 기간산업, 부동산, 토지 등을 매각해서라도 재정을 늘려야 한다느니 하는 소리가 정치권의 보수주의자들 입에서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2018년의 마크롱 행정부가 바로 ‘그런 짓’을 저질렀으며, 그를 뽑은 민심이 한순간에 이탈한 이유이다. 하지만 영화 주인공 쥘리가 철도파업으로 겪는 곤란을 보고 있으면 시위가 갖는 정당성과 그에 따른 전략적 목표가 반드시 인민과 국민들의 구체적 삶에 당장은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점을 깨닫게 한다. 그 시간의 간극, 차이를 좁히기 위해 정치가 존재해야 하는 바, 그 또한 해결점을 찾기 쉽지 않음을 뼈저리게 느끼게 한다. 이 같은 이슈에 대해 감독 에리크 그라벨은 언뜻 매우 양가적 입장으로 보이는데, 한편으론 당시 파리 시위가 다소 지나쳤다는 것을 비판하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보이스 오프로 처리되는 뉴스 멘트는 몇 명이 다치고 몇 명이 사망했다, 불길이 치솟고 최루탄이 발사됐다는 식으로 시위가 갖는 폭력성을 묘사하는 등 당시의 정치 투쟁이 지녔던 부정적인 측면을 부각한다. 그러나 동시에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영화 속 캐릭터들, 주변 인물들의 모습을 통해 당시 파리 시민들이 시위에 대해 암묵적으로나마 거의 전적으로 지지했음을 드러내기도 한다. 에리크 그라벨이 생각하는 지점은, 정치적 시위, 그것이 혁명적인 것이든 개혁의 과정 정도인 것이든, 달성해야 할 구체성이 어느 지점에 닿아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으로 보인다. 정치 투쟁은 구체적인 슬로건을 내세워야 한다.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은 매우 작고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주인공 쥘리가 지금 이 순간 바라는 것은 대체 교통수단이라도 있어야 일터인 호텔에 늦지 않고 출근한다는 것이다. 철도가 운행하지 않는다는 안내를 위해 역 바깥에서 사람들과 접촉 중인 역무원에게 쥘리는 딱 한 번 화를 낸다. 대체 교통수단을 묻는 쥘리에게 그가 “그건 우리의 의무사항이 아니다”라고 답했기 때문이다. 쥘리가 듣고 싶었던 말은 그게 아니었을 것이다. 쥘리가 원하는 인생도 단순한 것이다. 아이들과 비교적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조금 더 나은 풀타임 잡을 구하는 것이다. 호텔 화장실 벽에 자신의 똥을 잔뜩 바르고 나간 손님 때문에 쥘리와 동료들은 한바탕 곤욕을 치른다. 이런 일이 종종 있는 듯 메이드 간 인터콤 시스템 대화는 이런 식이다. “ㅇㅇ호실에 보비 샌즈 다녀가심.” 보비 샌즈는 IRA 대원들에 대해 정치범 대우를 해 줄 것을 요구하며 옥중 투쟁을 벌이다 단식 과정에서 사망한 북아일랜드 운동가이다. 그가 벌인 투쟁 가운데 하나가 감방 벽에 똥칠하기였다. 수석 메이드 급인 쥘리는 앞장서서 손님이 범벅을 해놓은 똥을 치우지만 그 과정에서 욕실의 고급 타일을 망가뜨렸다며 매니저에게 지적을 받는다. 똥 같은 세상이다. 똥 같은 자본주의이다. 영화 ‘풀타임’은 자본주의가 어디까지 와 있는지를 보여 준다. 그 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사람들이 왜 반(反) 자본주의에 경도되는 지를 느끼게 해 준다. 올해 개봉된 영화 가운데 사회적 리얼리즘의 테마를 서스펜스 스릴러의 느낌으로 살려 냈다. 뛰고, 달리는 쥘리의 모습이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정치보다 영화가, 사회와 세상을 바꾸는데 더 큰 역할을 한다는 점을 보여 준다. 그 점이 좋다. 베니스영화제 오르종티 감독상과 함께 여우주연상도 거머쥐었다. 그만한 자격이 충분한 작품이다.
요즘 쓰는 글에 오자와 탈자, 비문이 많아져 걱정이다. 이게 다 의존증 때문인데 한창 글을 쓸 때 편집국 혹은 편집부에 교열부가 존재했었고 내가 잘못 쓰면 한번 걸러주겠지 하는 생각에 길들여져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인터넷 시대인 요즘엔 교열부가 존재하지 않는다. 상당수 언론사에서도 교열부나 교정부를 없앴을 가능성이 높다. 교열기자에 대한 기억과 로망은 이병주의 소설 『행복어사전』에 나오는 주인공 서재필 정도에 머물 것이다. 이런 얘기도 젊은 기자나 글 쓰는 사람들에게 공룡시대 취급을 받을 것이다. 되려 이병주가 누구냐, 혹시 삼성 창업주 이병철 이름을 잘못 쓴 거 아니냐고 물을 것이다. 어쨌든 이 칼럼에도 늘 상당수 오자가 있는데 조사의 ‘은는이가’가 잘못 붙어 있는 경우는 다반사요, 고유명사나 이름을 틀리는 경우까지 있다. 띄어쓰기의 잘못은 물론이다. 온라인 판에서는 스스로 발견하거나 독자의 지적을 받거나 해서 바로 수정을 하지만 지면 판에서는 이미 윤전기에서 돌아간 후라 고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런 날은 마치 밥을 먹은 후 뭐가 얹힌 듯 하루 종일 찝찝하게 지낸다. 창피하고 민망해서 견딜 수가 없다. 숱한 오자에도 불구하고 ‘2틀’이나 ‘4흘’ 같은 오자를 내지는 않는다. ‘사귄다’의 명령어를 ‘사기라’로 쓰지도 않는다. 더더군다나 심심한 사과를 드린다의 말을 부적절하게 사용하거나 잘못 이해하는 적도 없다. 심심의 한자를 ‘深甚’이라고 쓰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읽을 줄은 안다. 5060 세대는 마지막 한자 세대여서 고등학교 시절 입시 필수가 아니어서 그랬지 매주 1교시의 한문 수업을 받았던 사람들이다. 한문 수업은 대개 국어 선생님이 가르치셨다. 한자어를 알면 사람이 유식해진다. 인식이 폭넓어진다. 한자는 마치 와인이나 영화 같아서 어디 가서 얘기를 할 때 너무 깊이 들어가지 않고 적당한 선에서 언급을 하면 사람을 살짝 교양 있게 보이게 한다. 한자를 공부하는 것은 결코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적 행태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나는 보통 새벽 4시~아침 8시 사이에 글을 쓰는데 그때의 내 뇌 상태가 가장 명징하기 때문이다. 명징은 ‘明澄’인데 ‘깨끗하고 맑다’란 뜻이다. 해가 떠오르는 순간의 밝기 같은 것인데 그 순간의 빛이 가장 깨끗하고 맑다란 의미이다. 이런 단어는 보통 사람들 간 대화에서는 흔히 쓰지 않는다. 글을 쓸 때 종종 쓰는 단어이다. 일상의 대화와 글의 단어는 때론 약간의 간격이 벌어진다. 말하기와 글쓰기를 구어체와 문어체로 나누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사람이 구어를 무시하면 안 되지만 문어를 모르고 살면 안 된다. 그건 마치 구상과 비구상 혹은 구체와 추상과 같은 것이다. 구체는 추상을 규정하고 추상은 구체를 규정한다. 구체를 모르면 개념을 정립할 수 없고 개념을 잊으면 모든 사안의 구체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생과 세상사, 모두 변증법이다. 대학에서 잠깐 교편을 잡았을 때 1, 2학년 저학년 학생들이 매카시즘이란 말을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아니 세계사를 안 배웠어,라고 물었을 때 당연한 어투로 안 배웠는데요, 라는 대답을 듣고는 더 충격을 받았었다. 당시에 국사는 입시필수지만 세계사는 입시선택이라 배우더라도 공부는 따로 안 한다는 것이었다. 요즘의 역사 수업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지 못한다.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코로나19 시대에 한 대학의 대학원에서 역사를 가르칠 때 학생들이 니카라과를 처음 들어 본 나라라고 해서 충격을 받았었기 때문이다. 매카시즘, 조셉 매카시를 모른다는 건, 극우의 문제점을 모른다는 것이다. 1950년대 조셉 매카시가 반미활동조사위원회를 만들어 많은 선량한 사람들, 지식인들, 예술가들을 공산당, 빨갱이로 몰아 감옥을 보내고 죽임을 당하게 만들었는지를 모르면 극우 파시즘의 광기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 가를 알 수가 없게 된다. 이런 친구들이 대개 ‘일베’가 된다. 니카라과도 마찬가지이다. 니카라과를 모르는 데 어떻게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의 투쟁을 가르치고, 그 투쟁이 소모사 정권의 46년 독재 끝에 나온 것이라는 점을 어떻게 가르치겠으며, 그걸 모르는데 레이건 전 대통령 때의 최대 정치부패 스캔들인 ‘이란-콘트라’ 사건을 어떻게 가르치겠는가. 이 모든 얘기가 다 영화로 나와 있는데 이걸 모르면 대체 영화를 어떻게 보겠는가. 그저 재미있느냐 없느냐로 영화를 가름할 뿐일 것이다. 가장 우스우면서도 동시에 우려스러운 것은 이 모든 사고의 부진이 기자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이런 말은 그래서, 매우 적절해 보인다. ‘요즘 직장인 중에서 가장 지적능력이 떨어짐에도 자기들이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한다고 착각하는 집단이 기자들인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나라가 왜 이 모양, 이 꼴이 됐는지 그 일단을 짐작하게 한다. 진실로 자성할 일이다. 오늘만큼은 오자와 탈자, 비문이 없어야 할 텐데 만약 또 한 글자라도 발견된다면 미리 심심한 사과를 드린다. 아오리 사과를 드린다는 얘기가 아니라는 것은, 파란 사과가 꼭지를 따서 매장에 진열돼 있음에도 반말로 ‘이게 나중에 빨개지는 거지?’라고 하는 대통령 때문에 다 알게 됐다. 무식을 무식으로서 증명하는 세상은 웃긴 게 아니라 무서운 것이다. 자, 어쩔 것인 가. 어떻게 할 것인 가. 걱정이 구만리다.
눈이 밝은 관객이라면 영화 ‘임파서블 러브’ 속 남자 필립(닐 슈나이더)이 여주인공 라쉘(비르지니 에피라)에게 니체 얘기를 할 때 알아 봤을 것이다. 필립은 라쉘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어 봐. 없으면 내가 갖다 줄게.” 필립은 모르는 것이 없다. 외국어도 몇 가지를 하는지 모를 정도다. 그는 통역과 번역 일을 한다는데, 심지어 중국어까지 구사한다. 키가 크고 잘생겼다. 25살의 노처녀(1950년대 당시)인 라쉘은 그런 그에게 홀딱 빠져 든다. 그런데 문제는 조로아스터, 곧 자라투스트라이다. 니체의 자라투스트라 사상에 빠져 있는 이 젊은이는 전통과 권위의 기존 질서를 깨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그것을 자신의 여자, 자신의 연애관계에까지 적용하려 한다. 게다가 니체 사상의 핵심은 초인 사상이다. 그건 한때 히틀러가 ‘애용’하던 것이기도 하다. 자유로운 척, 그리고 기독교적 관습과 윤리의식을 깨부수는 척, 또 다른 폭력적 권위의 질서를 만들어 내려했던 히틀러처럼 필립은 모든 사물과, 모든 연애의 감정과, 모든 여자의 순애보적 감성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고 착취하려 한다. 이건 결국 한 여자의 삶을 짓밟는 쪽으로 나아간다. 니체와 히틀러, 그리고 반 유태인 정서가 그를 휘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그는 ‘진짜’ 부유한 집안의 자식이다. 필립은 라쉘에게 말한다. “너하고 연애는 해. 너를 사랑해. 우리는 특별한 관계야. 그러나 결혼은 안할 거야. 이건 나의 신념이야.” 이런 말을 하는 남자가 대체로 그렇듯이 필립이 원하는 것은 오로지 섹스이다. 욕정의 배설이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이중, 삼중의 인격을 가진 이 남자를 순진한 라쉘이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저 사랑하기만 한다는 것이다. 이 남자가 나를 정말 사랑할까 생각하면서도 끝없이 그를 향해 몸과 마음을 열어 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남자의 아이를 밴다. 비극은 이때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눈이 좀 더 밝은 관객은 극 중반쯤 필립이 한 번의 육체적 유희와 광풍이 지나간 후 침대에 누워 라쉘에게 자신이 1년 반 동안 감옥에 갔었음을 고백하는 장면에서 이 남자의 위악성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그는 전쟁 중 징집을 피하기 위해, 아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 독일에 가 있었고 거기서 어떤 일을 했다는 것이다. 명백한 부역 행위다. 그가 감옥에 갔었던 건 전후에 부역자들을 징벌하는 과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필립의 집안이 프랑스 내 나치주의자들과 연결돼 있음을 보여 준다. 근무지 발령을 핑계로 라쉘을 떠난 필립은 부정기적으로 그녀 앞에 나타나 섹스만 하고 홀연히 떠나기를 반복한다. 그 사이 딸아이 샹탈(제니 베스)을 낳은 라쉘은 싱글 맘으로 살아가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녀의 목표는 단 하나. 필립과의 정상적인 생활도 생활이지만 무엇보다 샹탈의 호적을 그의 집안에 귀속시키는 것이다. 아이의 신원증명서에는 친부 불명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고 그 점이야 말로 그녀를 가장 괴롭히는 일이다. 라쉘은 이 일로 필립과 다투지만 그렇다고 본격적으로 친자소송을 하든지 하는 식은 아니다. 매달리는 식이다. 필립은 결국 아이의 호적을 자신에게 옮기지만 딸아이가 고등학생이 되고나서부터 더더욱 끔찍한 짓을 벌이게 된다. 마치 모파상이 쓴 ‘여인의 일생’을 다시 읽는 듯한 느낌을 주지만 그것은 서사의 방식 때문이지 서사의 목표나 그 내용이 같아서가 아니다. 여인의 삶은 늘, 굉장히 기구한데, 라쉘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여성들의 지난 삶이 실로 순탄치 않았으며 그건 지금도 그리 다르지 않다는 점을 느끼게 해 준다. 여성이 여성으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해방되기 시작된 것은 50년이 채 되지 않았으며 그건 지금도 완성되지 않았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딸 샹탈은 끔찍한 일을 겪었고, 그것 때문에 엄마 라쉘을 미워하고 경멸하기도 했지만 결국 그런 그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건 자각한 여성이 아직도 가부장의 질서의식에서 벗어나 있지 못한 여성을 향한 관용이자 연대의 심정 같은 것이기도 하다. 많은 ‘그녀’들이 여전히 깨닫지 못하는 삶을 사는 이유는, 여전히 시스템이 그렇게 작동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녀’들에 대한 ‘의식화 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진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샹탈은 엄마 라쉘을 앉혀 놓고 이렇게 얘기한다. “엄마는 총체적으로 거부당했어. 그걸 총체적 거부라고 해. 가진 게 없는 사람이었고 유태인이었어. 게다가 여자였지. 엄마가 이렇게 된 것,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바로 그 총체적 거부 때문이야.” 그리하여, 여성이 여성의 문제를 깨뜨리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자구적 노력만이 아니라 사회와 정치, 계급 문제가 병행돼 해결돼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성의 의식이 여기까지 왔을 때 진정한 여성 해방의 단초가 마련되기 시작할 것이다. 더더욱 눈이 밝은 관객은 두 젊은 남녀, 필립과 라쉘이 데이트를 하면서 보는 영화가 ‘사형대의 엘리베이터’이며 영화 속 극장 안 스크린에 잔 모로의 얼굴이 보일 것이다. 루이 말 감독이 1959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이 영화 ‘임파서블 러브’의 이야기가 1959년에 시작된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배경이 되는 공간은 샤토르라는 프랑스 중부 도시이다. 화염병과 돌멩이가 격렬하게 오갔던 파리의 6·8혁명도 여주인공 라쉘은 피해 있었고 그만큼 세상에 대한 인식에서 괴리돼 있었음을 보여 준다. ‘임파서블 러브’는 오랜만에 만나는 전통 서사의 드라마이다. 텍스트가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 한 여인의 기구한 일생을 죽 따라가면 된다. 영화는 마치 여인의 일생이 주된 이야기인 척 그리고 있다. 그러나 의식 있는 관객이라면 이건 마치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 같은 얘기임을 깨닫게 된다. 자각한 사람만이 세상을 올바로 이해하고, 또 그럼으로써 세상을 구하게 된다. 한 여인이 자신이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우뚝 서기까지, 지금껏 인류는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임파서블 러브’는 구체성의 변증법으로 보여주려 한다. 그 점이야말로 이 영화에 대해 놀라게 되는 이유다. 경이롭다. 텍스트를 통해 콘텍스트로 나아가게 만든다. 이야기가 스스로 정치화되고 여성주의화 한다. 이야기가 스스로 캐릭터화 되고 그 캐릭터가 다시 이야기를 확장시킨다. 여주인공 역의 비르지니 에피라가 25살에서 65살의 연기를 해낸다. 폴 버호벤 감독의 영화 ‘베네데타’에서 풍만한 가슴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던 수녀원장이었다고는 생각하지 못할 만큼 뛰어난 연기 스펙트럼을 선보인다. 그만큼 카트린 코르시니 감독의 연출력이 정교했다는 뜻일 것이다. 세상을 구하는 것은 모성이다. 모성의 힘이다. 모성의 진정한 힘은 여성에게서 나온다. 여성주의가 인류를 구원할 것이다. ‘임파서블 러브’의 주제이다.
넷플릭스가 이러면 안 된다. 최근 공개된 첩보 액션 영화(?) ‘카터’를 보고 나서 든 생각이다. 이건 자본의 오염이자 자본의 바이러스다. 물경 백수십억 가까이 들인 영화를 이렇게 ‘생각 없이’ 기획하고 ‘밀어주면’ 한국 상업영화계가 오염된다. 그 바이러스는 마치 코로나19처럼 오래간다. 여러 감독, 여러 제작자들에게 제작비의 수위를 ‘맛 들이게’ 해 30억짜리 영화, 심지어 100억짜리 영화도 잘 만들려 하지 않게 된다. 넷플릭스가 한 나라의 영화 제작 환경을 이렇게 습관화시키면 안 된다. 실로 곤란한 일이다. ‘카터’는, 이 영화를 만든 정병길 감독으로서는 매우 아픈 얘기일 수 있으나, 그냥 깔끔하게 얘기해서 망작(亡作)이다. 나는 그가 데뷔작인 ‘우린 액션배우다’를 만들었을 때 높이 평가했었다. 독립영화였다. 스턴트 배우 출신답게 스턴트 액션배우들의 얘기를 잘 다뤘다. 두 번째 영화 ‘내가 살인범이다’의 오프닝 장면, 그러니까 술집 입구 문이 와장창 터지며 벌어지는 액션 신은 영화 초반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정재영, 박시후의 연기도 볼만했다. 복수극의 이야기가 나쁘지 않았다. 그의 또 다른 작품 ‘악녀’는 비록 다른 할리우드 영화들에서 많은 장면을 ‘따오기는’ 했으나(예를 들어 오토바이끼리 추격하면서 총격과 검술을 벌이는 장면은 리들리 스콧의 ‘블랙 레인’의 그것과 흡사하다) 그 기술력만큼은 한국에서 보기 힘든 장면이었던 만큼 비교적 관대하게 받아들여졌었다. 이번 ‘카터’는 액션의 측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특히 시퀀스별 액션은 ‘원 신 원 컷(카메라를 끊지 않고 한 번에 찍는 기법)’을 지향하며 찍었다. 그중 압권은 승합차 세 대가 나란히 달리며 차 문을 다 개방한 채 주인공과 추격자들이 차를 옮겨 가며 격투를 벌이는 초반 장면이다. 주인공 카터(주원)는 미국 CIA 요원들과 그렇게 혈투를 벌인다. 이 장면은 거의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정병길 감독다웠다. 저걸 도대체 어떻게 찍었을까, 액션의 디자인을 어떻게 짰을까 궁금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그 외에 모든 것이 ‘투 머치(too much)’이다. 오버다. 과하다. 과유불급이다. 오프닝 시퀀스의 목욕탕 신은 너무 왜색이 짙고(왜색이 짙다고 뭐라 하는 건 아니지만), 그 대중목욕탕에 모인 남녀가 죄다 야쿠자 같을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 여자는 왜 전부 그렇게 벗고 있어야 하며, 남자들은 모두 훈도시(일본 전통 남성 속옷) 아니면 T팬티를 입은 채 ‘칼질’을 해대야 하는지 아무래도 좀 과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한다. 그래도 그건 앞 장면이니 몰입감은 준다. 마지막 장면의 헬기 격투 신은 말할 것도 없고, 비행기가 폭파돼 낙하하면서 벌이는 격투 신 역시 말이 안 된다. 영화 액션은 아무리 과해도 나름의 개연성이 있어야 한다. 설득력이 없으려면 차라리 코미디가 낫다. 할리우드 영화의 경우 조금 과장된 액션을 벌일 요량이면 상황을 코믹하게 만든다.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에서 사이먼 페그 캐릭터가 필요한 건 그 때문이다. 약간의 슬랩스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카터’의 오버 액션은 시종일관 진지하다. 무겁다. 이 액션은 진짜라며, 보는 사람들에게 강요한다. 잘못된 태도다. 비행기가 수천 미터 위 상공에서 날아 갈 때는 속도가 800㎞가 넘는다. 그런데 주인공 카터는 구멍이 난 비행기 밖에서 두 손으로 한참이나 매달려 있다. 이런 식이면 영화가 곤란하다. 비현실의 현실성이 없다. 그냥 비현실의 비현실성이다. ‘영화니까 봐준다’ 식이 된다. 이야기 흐름도 그렇다. 처음엔 흥미로웠다. 아마도 전 세계에 좀비 바이러스가 도는 것 같고 청정지역이 한반도라는 것이다. 이건 코로나19 몇 년 전의 한국 상황을 현실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그런데 백신 개발자가 남한의 박사(정재영)이고 북한과 이를 공동으로 대량 생산하려고 하는데, 항체를 지니고 있는 박사의 딸이 납치된 상태라는 설정이다. 백신 바이러스를 독점하려는 미국은 CIA를 동원해 딸을 가로채려 하고 남한과 북한의 첩보 조직이 이에 맞서는 것으로 나온다. 여기까지도 괜찮다. 그런데 기억을 상실한 슈퍼 히어로 급의 주인공 카터가 정신을 차려 보니 세 조직(미국과 남과 북) 모두에게서 쫓기는 신세가 돼 있다. 그는 박사의 딸은 물론, 바이러스에 감염됐다는 자신의 딸을 구하기 위해 북한으로 가게 된다는 이야기다. 영화의 스토리는 중반을 채 못 가서 무너지기 시작한다. 북한의 쿠데타 세력의 주동자(이성재)가 모든 음모를 획책했다는 설정이 뜬금없이 튀어나온다. 주인공 카터의 북한 아내와 자식 간의 애절한 가족애도 갑작스러운 신파여서 어색하다. 무엇보다 처음에 그렇게 난리치던 CIA가 극 중반 이후에는 자취를 감춘다. 모든 것을 포기한 것인가. 그쯤이면 이 OTT 영화를 보는 것에 지치게 된다. 액션이 새롭지 않고 지루해진다. 정병길 감독 역시 중반 이후의 편집에서 디테일이 상당히 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 모든 것은 액션 디자인을 먼저 짜고 그다음에서야 이야기를 붙이려 했던 오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이런 액션이 나올 거야, 아니면 이런 액션이 나와야 해’라는 강박이 있었고 그 장면에 맞춰 이야기를 구축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야기의 처음과 끝이 뒤틀리고, 어색하고, 앞뒤가 안 맞고, 그러다 보니까 배우들의 연기도 잘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배우가 극을 이해하고 인정해야 몰입을 하고 연기를 하지 않겠는가. 정재영은 그런 면에서 완전히 소모됐다. 연기자 경력에 흠이 간 셈이다. 넷플릭스가 이러면 안 된다. 국제적 대기업으로 세계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는 질시를 받는 한편으로, 각 나라의 문화적 특성을 살린 콘텐츠를 제작하게 함으로써 이른바 종(種) 다양성을 실현시킨 미디어 회사가 이렇게 작품 기획을 ‘대책 없이’ 하면 안 된다. 이런 식이라면 오래 가지 못한다. 한때의 영광으로 끝날 수 있게 된다. ‘카터’의 마지막 장면은 이 영화가 속편을 기획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좀 더 잘 짜인 이야기로 준비되어야 할 것이다. 영화는 이야기가 앞에 서 있어야 한다. 액션이나 씨지(CG)가 앞에 서면 꼭 탈이 난다. 진심의 충언이다.
개봉 직전이라 구체적으로 얘기할 수는 없으나 영화 ‘헌트’는 올여름 최고의 역작이라 평가할 수 있겠다. 평론 입장에서 올여름엔 딱 두 편의 영화만을 ‘건졌다’ 할 수 있는데 ‘헤어질 결심’과 ‘헌트’가 그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헤어질 결심’의 미국 영국 배급은 무비(mubi)가 ‘헌트’의 미국 내 배급 역시 유명 배급사가 붙은 것으로 알려졌다. ‘헤어질 결심’은 확실하게 미국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외국어 영화상)과 영국 아카데미 상을 노린다는 것이고, '헌트' 역시 해외시장을 크게 넘보고 있다는 얘기다. ‘헌트’가 개봉되면 작품 자체 얘기도 얘기지만 아무래도 감독 이정재에 대한 얘기로 넘쳐날 것이다. 이미 영화의 공개 시사회 이후 이정재에 쏠리는 기자들의 관심이 매우 높다. 영화를 너무 잘 만들었는데 이게 진짜 이정재의 연출 솜씨냐는 것이고 이정재가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었느냐,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기 때문이다. 기자들이 인터뷰를 통해 확인한 것은 진짜 이정재가 올곧이 자신만의 실력으로 이번 작품의 연출을 해낸 것이 분명하며 얘기를 해 본 결과 영화를 훌륭하게 만들어 낼 만큼 인문학적 지식과 영화적 소양이 혀를 내두를 수준이라는 것이다.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이정재가 진화했다. 알고 보니 이정재는 준비된 감독이었다. 그 진가를 사람들이 진작에 알아채지 못했을 뿐이다. 물론 조력자는 있다. 이번 영화에서 공동 주연을 맡은 정우성이다. 이번 영화 ‘헌트’의 시나리오는 5년 전에 나온 것이며 당시 영화계에서는 모두들 고개를 설래설래 젓기만 했었다. 그런 시나리오를 가져다 각색하고 또 각색한 것이 이정재였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조언을 해주고 고쳐진 시나리오를 그때그때 모니터 해 준 것이 정우성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둘은 영화사 ‘아티스트 스튜디오’를 함께 운영하고 있다. 이런저런 뒷 배경을 알게 된 후 ‘헌트’를 곱씹어 보면 영화란 무릇 감독의 예술이되, 감독 외의 모든 스태프 – 프로듀서, 투자배급업자, 촬영, 조명, 녹음, 편집, 음악, 특수효과, 스턴트 등등 – 들의 합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며 그래서 프로덕션 과정이 매우 민주적일 때 최고 기량의 작품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그 역할의 수장은 바로 감독이다. 감독이 지도자이다. 이정재는 이번에 지도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지도자의 준비된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실감하게 해 줬다. 지도자가 지향하는 게 무엇인지가 왜 중요한지를 보여 준다. 예컨대 영화 ‘헌트’에서 단박에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될 오프닝 시퀀스 같은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장면을 찍기 전 이정재는 자신이 찍고자 하는 방향, 액션의 스케일, 촬영의 스타일 등등을 샅샅이 미리 연구하고 분석해 놓은 뒤 스태프 전원을 불러 브리핑하고, 함께 숙의하고, 같이 시뮬레이션을 짠 후에 촬영에 들어갔다고 한다. 스태프들은 그때에 보여 준 이정재의 ‘실력’을 인정하고 영화 내내 그와 호흡을 맞춘 것으로 알려졌다. 제작진 전원의 합, 그들을 하나로 만드는 힘이 얼마나 중요한 지 이 영화의 오프닝을 보고 나면 알게 될 것이다. 진짜 잘 찍은 장면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1983년의 독재자가 미국 대통령을 만나러 갔다가 암살을 당할 처지에 놓이게 되고 그것을 막으려는 안전기획부 국내팀과 해외팀의 모습을 그린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그 독재자를 옹호하고 미화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독재자 암살 작전은 국내팀과 해외팀 누군가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 누군 가가 바로 정우성 혹은 이정재 둘 중의 하나이다. 영화는 줄곧 이 두 명 중 한 명을 추적하게 하고 나중에 그 정체를 알고 나서 관객들은 깜짝 놀라게 된다. 그 시나리오의 씨줄날줄이 이정재를 경이롭게 생각하게 만들 정도다. 이정재가 저런 생각을 했었단 말이지. 얼마나 평소에 영화와 책, 현대사에 대한 관심이 많았으면 저런 생각을 하게 됐을까 등등의 놀라움을 갖게 만든다. 영화에 『감독=지도자』가 있듯이 나라에는 『대통령=지도자』가 있다. 준비된 감독이 영화를 잘 만들 듯이 준비된 대통령이 나라를 온전히 이끈다. 성실한 감독이 영화의 내용을 풍부하게 하고 충일하게 만들 듯이 일에 열심인 대통령이 나라를 평안하게 한다. 인문학과 사회과학, 역사에 대해 공부를 소홀히 하지 않을 때 감독은 영화를 ‘정치적 올바름’을 가지고 만들 수 있고 역사적 시각을 올바로 가지려고 노력하는 대통령이 나라의 어두운 역사를 치유할 수가 있다. 우리는 현재 이런 얘기에 딱, 완전히 반대로 가는 대통령을 뽑은 상태다. 국민들이 마음이 불안한 이유다. 미국 권력 서열 3위라는 하원의장 낸시 펠로시가 한국에 왔을 때 대통령은 휴가라며 연극을 한편 본 후 배우들과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던 모양이다. 다 좋다. 휴가일 수도 있고 연극 애호가라 연극을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굳이 막걸리를 마시는 사진을 좋아라 할 것이라고 착각해 국민들에 공개하는 것은 정무 감각이 없어도 너무 없는 것 같아 안쓰럽다. 무엇보다 어떤 연극을 봤는지, 그 연극에 대한 감상평이 어떤지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것이 없다. 그저 연극이 소외된 예술이고 가난한 예술업계인 만큼 거기서 ‘놀면’ 좋은 사람, 좋은 대통령 소리를 들을 줄 알았던 모양이다. 천만의 말씀이올시다이다. 준비된 감독의 영화를 보고 가슴이 뛰게 되는 것처럼 대통령이 준비된 행동으로, 다는 몰라도 아는 만큼만이라도 잘할 수 있는, 그걸 진솔하게 해 낼 수 있는, 정치 행위를 보고 싶다. 나라가 어지럽고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다. 오죽하면 조기 퇴진 시위까지 벌어지겠는가. 집권 3개월이 갓 된 대통령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금과 같은 태도로 영화를 만들면 백 점 만점에 24점이다. 영화학과에서는 퇴학당할 점수다. 별 다섯 개 기준으로 따지면 별 반 개를 받을 것이다. 극장에 붙이지도 못할 점수다. 제발 배우 이정재에게 배우시기를 바란다. 배우 이정재를 연구해 보시기 바란다. 주변에 문화 참모 하나 없으신가. 아 그렇지 문화관광부 장관이 정치부 기자 30년 경력이라지 아마.
한 남자는 무의미한 전쟁을 막으려 하고, 한 남자는 학살의 역사를 끊어내려 한다. 두 사람의 목적은 다른 듯 사실은 같다. 두 남자는 원수지간이지만 알고 보면 동지일 수 있다. 두 남자는 상대가 제5열(국가를 붕괴시키려는 내부 비밀집단)의 수괴라고 생각한다. 상대가 나를 잠입자로 생각하는 걸 나는 알고 있고, 그걸 알고 있는 나를 상대가 알고 있고, 다시 그걸 내가 아는 식이다. 거울 속의 거울과 그 거울 속의 거울 이야기가 바로 ‘헌트’이다. 누가 역사 앞에서 선이고 악인가. 누가 옳고 누가 잘못된 것인가. 동림이라는 이름의 조직 내 두더지는 두 남자 중 누구인가. 혹시 둘 다인가. 아니면 둘 다가 아닌가. 영화 ‘헌트’는 격렬한 하드보일드 액션으로 두 사람의 정체를 향해 냅다 돌진해대기 시작한다. 배우 이정재가 놀랄만한 연출 역량을 선보인 영화 ‘헌트’는 극이 2/3까지 진행될 때만 해도 박평호(이정재)와 김정도(정우성) 둘 중 누가 잠입자인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둘 모두 무슨 음모에 휘말려 있고, 그래서 간첩이 저 중 누구일 거라고 관객 한 사람 한 사람 확신하게 만든다. 하지만 반전이 있다. 무엇보다 ‘헌트’의 얘기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싸구려가 아니다. 영화에는 매우 큰 반전이 도사리고 있으며 그것은 자기가 생각했던 내부 첩자가 뒤집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 더 큰 전복이 도사리고 있다. 사람들로 하여금 영화의 마지막 순간까지 이 이야기가 어떻게 끝이 나게 될지 짐작할 수 없게 만든다. 더욱더 깜짝 놀라게 되는 것은 이 영화의 모티프이다. 한국 영화는 지금까지 무수한 장벽을 넘어왔고 수많은 장애물을 극복해 왔지만 그럼에도 넘지 못했던 이야기가 세 개가 있다. 하나는 문세광 저격 사건이고, 하나는 KAL기 폭파 사건의 진상과 실체이며, 또 하나는 버마 아웅산 테러 사건이다. 이 세 가지에 대해 한국 영화계는 그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아직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가 많기 때문이다. 많은 점들이 비밀에 싸여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한국사회를 휘감고 있는 레드 콤플렉스와 반공 이데올로기 때문이다. 그런데 ‘헌트’가 그 지점을 통과했다. ‘헌트’의 이야기는 아웅산 테러 사건에서 가져왔다. 그 점이야말로 이 영화가 실로 놀랍게 느껴지게 만든다. ‘헌트’는 물론 가상의 역사이다. 1983년 미얀마 아웅산 국립묘역에서 테러가 일어나기 직전과 직후까지의 영화 속 얘기는 모두 허구이기 때문이다. 장소도 미얀마가 아니라 태국으로 바꿨다. 모든 얘기는 거짓일 것이다. 그러나 보는 내내 ‘저런 일들이 있었겠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개연성이 매우 높게 느껴진다. 영화는 그 개연성으로 역사를 재해석하게 한다. 그리고 그 재해석으로 역사의 실체에 접근하게 만든다. 그러기 위해 씨줄 날줄의 시나리오를 엮어 낸다. 영화는 결국 영화지만 그래서 결국 영화만의 얘기는 아닐 거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비현실의 현실성, 현실의 비현실성이라는 변증을 완성시킨다. ‘저건 영화의 얘기일 뿐이야’라고 생각하면서도 저런 얘기가 충분히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비현실의 현실성이다. 반면에 너무 드라마틱해서 진짜 벌어진 일도 가공의 얘기처럼 느껴진다. 현실의 비현실성이다. ‘헌트’가 그 두 가지 모두를 실현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트’는 아웅산 사건을 전면으로 내세우지 않는다. 아웅산 얘기이면서도 아웅산 얘기가 아니고, 그렇게 아닌 게 아닌 것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그 시선의 다양성을 하나의 텍스트 구조로 완결해 냈다는 점에서 ‘헌트’는 놀라운 작품이다. 1983년 국가안전기획부는 국내 팀과 해외 팀으로 나눠 운영된다. 국내 팀의 수장은 김정도(정우성)이다. 해외 팀은 박평호(이정재)가 맡고 있다. 1983년의 한국은 지독한 독재정권이 자신의 권력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해 살인과 고문을 일삼는, 온갖 더러운 짓을 서슴지 않던 때였다. 안기부는 그 하수인 중의 하수인 노릇을 했다. 당연히 권력자에 대한 암살 시도가 진행된다. 국내 팀과 해외 팀은 업무 범위가 각각 다르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그 역할이 교차될 때가 많다. 예컨대 독재자가 미국 순방을 갔을 때 같은 경우이다. 독재자는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미국으로부터의 지지를 끌어내려한다. 그래서 늘 미국을 제일 먼저 간다. 영화 속 주한 미국대사는 이런 얘기를 두 번이나 한다. “우리가 원하는 건 질서요.” 어쨌든 이 워싱턴 D.C 순방길에 해외 팀과 국내 팀은 공조를 한다. 그리고 암살 위기 직전, 감청 중인 미국 CIA 덕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암살 팀을 좌절시키는 데 성공한다. 박평호와 김정도 둘은 이 암살의 배후에 북괴(당시에는 북한을 이렇게 불렀으며 지금도 종종 사용되는 단어이다)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대통령의 동선이 노출된 데에는 자신들의 조직 안에 ‘내부자’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둘은 그 정체의 이름이 ‘동림’이라는 것까지는 파고 들어간 상태다. 둘은 서로를 ‘동림’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싸움은 남과 북, 안기부와 북한 대남전략부가 아닌 안기부 내 제5열을 밝히려는 ‘자신들 안’의 싸움으로 전환된다. 적은 늘 내부에 있다. ‘헌트’는 그 진실의 전형성을 가장 전형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추적해 간다. 그 서스펜스가 사람들을 움찔거리게 한다. 초긴장 상태로 몰아넣는다. 워싱턴 D.C 암살 음모를 분쇄해 가는 ‘헌트’의 오프닝 시퀀스는 스크린을 좁혔다 넓혔다, 들었다 놨다 하며 압도적으로 장면 하나하나를 끌고 나간다. 박평호는 안기부 경호 차량 뒷좌석에 앉아 있고, 밖에서는 워싱턴 교민들의 반정부 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중이다. 이들의 ‘각하’가 어디선가 회담 장소인 호텔로 오고 있는 중이며, 김정도는 호텔 안에서 데모 군중을 보며 초조해하는 중이다. 어디선가 저격수가 준비 중인데, 북한 작전 팀인지 아니면 제3의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다. 호텔 내부에서는 CIA 감청 팀이 감청 내용을 실시간으로 분석 중이다. 오프닝 시퀀스는 이 네 가지 공간, 박평호의 호텔 외부, 김정도의 호텔 내부, 저격 팀의 시점 숏, CIA 감청 팀의 모습을 번갈아 보여주며 긴장도를 점층적으로 높여 낸다. 데모 군중들의 인서트 컷들이 그런 긴장을 계속 높아지게 한다. 이러한 높은 밀도감은 극 후반부 권력자가 태국의 국립묘역에 참석하는 장면에서 똑같은 호흡과 리듬으로 반복된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은 동어의 반복이 아니라 극의 정점을 치기 위해 보다 상승된 형태로 나타난다. 마치 TNT가 폭발하는 느낌을 준다. 극의 오프닝 씬에서 극의 클로징으로 가는 과정이 단계적으로 차곡차곡 서스펜스를 쌓아가는 방식으로 구성돼 있다. 그 치밀함과 디테일이 놀라울 정도로 빼곡하다. ‘헌트’가 이뤄낸 일은 이야기의 정밀성이다. 여름 한국영화 시장에 이만한 수준의 시나리오는 ‘헤어질 결심’과 이 ‘헌트’ 딱 두 편이다. 아웅산 테러 사건이 무엇인지, 1983년의 전두환 정권이 어떤 일들을 자행했는지 등등을 알고 보면 더욱 흥미가 있을 영화이다. 아웅산은 미얀마 수도 랑군에 있는 아웅산 장군의 묘역을 말한다. 아웅산 장군은 미얀마의 독립을 위해 투쟁한 투쟁가이며 현 아웅산 수 치 여사의 부친이다. 1980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초기 권력기반의 정당성 확보를 위해 순방 외교를 강화했으며 아웅산 행도 그 일환이었다. 그러나 북한이 미리 심어 놓은 특작대가 폭탄 테러를 감행해 서석준 부총리, 이범석 외무부 장관, 김재익 경제담당 수석비서관 등 각료 17명이 사망했다. 전두환은 4분 늦게 도착해 구사일생으로 살았다. 이 사건 이후 국내에서는 안기부 국내 팀의 첩보로 전두환 일당은 북한의 테러 작전을 미리 감지하고 있었고, 이를 국내 정치의 정국 전환용으로 활용하기 위해 묵인했다는 설이 파다했었다. 전두환은 자신의 각료를 대거 죽이거나 숙청하려던 참이었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하지만 그 진실은 베일에 가려졌다. 북한의 특작대 일부도 잡지 못한 채 북한으로 다시 도주하는 일까지 벌어졌지만 그 이유 역시 밝혀진 게 없다. 전두환 철권통치는 이 일로 정당성을 얻었다. 한국사회에서는 고문과 폭력이 정당해졌다. 1983년의 한국은 역사상 가장 암울했던 때이다. 배우 이정재와 정우성이 이렇게 놀랄만한 역사적 식견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라고 예상 못했을 것이다. 이정재가 이런 영화의 감독을 이런 식으로, 이렇게 수준 높은 방식으로 해내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신세계’, ‘무뢰한’, ‘아수라’ 등 선 굵은 영화들만 만들어 온 ‘사나이 픽쳐스’의 대표이자 제작자인 한재덕과 정우성, 이정재가 공동대표인 ‘아티스트스튜디오’가 공동으로 제작한 작품이다. 그래서 한가락한다는 배우들이 모두 단역이나 카메오로 나온다. 이웅평 역의 황정민은 그중 압권이다. 박성웅, 주지훈, 조우진, 김남길이 한 컷 혹은 한 씬 정도로 나온다. 그것만으로도 놀라운 작품이다. 한국 영화가 또 다른 지점을 통과해 내고 있다. 찬사를 보내는 바이다.
일본 니시카와 미와의 신작 ‘멋진 세계’의 로그 라인(스토리의 항해 일지. 전체 스토리를 두세 줄로 요약하는 것)은 이것이다. “13년간 감옥에 복역했던 전직 야쿠자 미카미가 출소한다. 그는 새롭게 살 결심을 하지만 변화된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매번 트러블을 일으킨다.” 로그 라인만으로는 영화가 어째 민망해 보인다. 매우 올드하게 느껴진다. 일종의 갱생(更生) 영화이다. 이런 영화, 1970,80년대에 흔하게 나오던 것들이다. 시작과 끝이 뻔한 내용들이다. 게다가 주인공 미카미(야쿠쇼 코지)는 자꾸 가슴을 움켜잡는다. 협심증이 있는 모양이다. 이것도 어째 끝이 뻔해 보인다. 그러니 이건 물어보나 마나 신파이다. 제목 ‘멋진 세계’가 내포하는 반어(反語)적 의미도 전형성의 대표급이다. 내용은 절대로 멋진 세계를 그리지 않는다는 의지의 표현이고 이 세상이 멋질 일 없다는, 구질구질한 일 투성이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처사임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멋진 세계’를 이상한 흡입력으로 종종 훌쩍대다가, 때로는 낄낄 거리며 보게 되는 이유 역시 바로 그 전형적이고 뻔한 신파의 줄거리를 들었다 놨다 하는 주인공 역의 야쿠쇼 코지 때문이다. 코지는 미카미의 복잡한 심내(心內)를 시종일관, 꾸준한 한 톤(tone)으로 끌고 나간다. 미카미는 허리를 90도로 접는, 폴더식 인사를 하며 세상의 눈치를 보다가도 한 순간 눈을 까뒤집고는 소리소리 지르며 자신이 예전에 ‘좀 나갔던’ 깡패였음을 증명하려 애쓴다. 그 분열의 성정, 이러지도 저러지도, 어쩌지 못하는 사람의 심정을 천연덕스럽게 표현해 나간다. 이 영화 ‘멋진 세계’가 좋아진 유일한 이유는 순전히 야쿠쇼 코지 때문이며, 코지에게 그런 연기를 연출한 니시카와 미와 때문이다. 미와 감독은 이 영화에서 다른 건(스토리, 촬영 등) 모두 낙제점 가까운 것을 받았지만 주인공 연기 연출 하나로 그 모든 걸 보상해 냈다. ‘멋진 세계’는 미카미란 남자 때문에 볼 만한 영화가 되고, 들어 봄직한 내용의 영화가 된다. 영화는 때론 이렇게, 철저하게 버릴 건 버리고 취할 건 취해야 하는 예술이다. 주인공 미카미는 극 중에서 세 번 운다. 그런데 그중에서 첫 번째 울음이 이 영화에 대한 모든, 낮은 기대치를 반전시킨다. 미카미는 출소 직후 도쿄에 와 자신의 모든 것을 전적으로 믿어 주는 일종의 ‘멘토 부부’를 만난다. 당연히 그들은 그에게 따뜻한 식사 한 끼와 그날의 잠자리를 제공한다. 멘토 부부의 아내는 미카미에게 이것저것 먹을 것을 권한다. 남편은 그런 아내에게 미카미가 갑자기 따뜻한 음식을 많이 먹으면 탈이 난다며 핀잔을 준다. 부부의 그런 대화를 들으며 일본식 스키야키 고기를 한 점 집어 먹으려는 순간 미카미는 왈칵 울음을 터뜨린다. 식탁 건너 멘토 아내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이고 이를 어째.” 이 장면은 니시카와 미와 감독이 의도한 것보다 훨씬 더 잘 나온 것일 가능성이 높다. 이런 장면의 연출은 ‘테이크’를 반복해서 가기가 어렵다. 배우가 감정을 반복해서 똑같이 유지하기 힘들 것이고 한 번 울었다가, 좀 쉬었다가, 똑같은 장면을 다시 찍을 때 다시 같은 울음의 종류를 만들어 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배우는 기계가 아니며 연기는 공장에서 찍어내는 상품이 아니다. 이런 장면은 테이크 원으로 한 번에 오케이가 났거나, 테이크 원을 살려 놓고 두 번 정도 더 찍었을 것이다. 그만큼 영화 ‘멋진 세계’는 배우 야쿠쇼 코지의 노련하고 원숙한 연기에 의존했고, 그를 신뢰했으며, 그의 메소드 연기에 전적으로 의존한 작품이라는 얘기인데 그게 완벽하게 성공한 작품이라는 얘기이기도 하다. 바로 그 점이 작품이 갖는 신파의 전형성을 더욱 깊게 만들어 내게 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작품의 수준을 높게 만들었다. 이왕 신파이려면 확실한 게 좋다. 니시카와 미와 감독이 선택과 집중을 한 부분은 바로 그 ‘깊이’이다. 신파의 깊이. 두 가지 지점에서도 이 영화는 음미할 부분이 있다. 한때 번창(?)했던 야쿠자 조직이나 그 수하의 깡패들도 이제 정말 별 볼 일 없어졌음을 보여 주는데 그건 어쩌면 일본의 구시대, 일본식 구체제의 몰락을 보여주려는 의도처럼 느껴진다. 미카미는 고향 후쿠오카에 있는 조폭 친구의 집에 초대를 받는다. 복잡한 심사도 식힐 겸, 사실은 다시 조직 일을 해볼까 하는 마음도 살짝 있다. 하지만 야쿠자답게 굵은 목소리를 내며 통 큰 척하는 친구는 이미 한쪽 발이 잘린 상태다. 그것도 칼부림을 하다 그런 것이 아니다. 어처구니없게도 당뇨 때문에 다리를 잘랐다. 그런 그를 보살피는 아내(처럼 보이는 여자)가 오히려 여장부 스타일이다. 정원에는 온몸 등판에 야쿠자 문신을 한 중늙은이가 막일을 하는 중이다. 아내란 여자가 그 남자를 향해 소리친다. “이제 그만하고 퇴근하세요.” 야쿠자도 출퇴근하는 정원사(급도 안 되는 노동자)가 됐다. 이들에게는 이제 과거의 영광 따위란 없다. 시대는 변했고 그들 역시 갱생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과하고 늘 용서를 구하는 마음이어야 한다. 니시카와 미와 같은 일본의 영화적 지식인들은, 일본의 과거 군국주의와 지금의 일본식 후진적 정치와 사회를 영화의 미카미처럼 복구하기 어려운 갱생 전과자처럼 인식하고 있음을 느끼게 해 준다. 일본의 사회도 늘 경계에서 왔다 갔다 하는 마음일 수 있다. 그들의 폭력적이고 저급한 정치는 세계에 누를 끼쳤고 무엇보다 일본 국민 스스로에게 죄를 저질렀다. 일본 사회는 갱생하기 위해 늘 사죄하는 마음이어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한때 잘 나갔을 때의 심정이 되곤 해서는 고래고래 잘났다고 소리 지르고 싶어지기도 한다. 마치 미카미처럼. 그 복잡한 마음 때문에 미카미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듯 니시카와 미와도 종종 그렇게 울음을 터뜨리는 심정일 수 있다. 바로 그 점을 고백하고 있는 것 같은 영화이다. 한 전과자의 모습을 통해 기이하게도 일본 사회의 몰락과 그 와중을 느끼게 해 준다는 점에서 ‘멋진 세계’는 특별할 수 있다. 멋있게 살아왔다고 생각하는 순간 주변은 이미 멋지지 않아진 지 오래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멋지게 살아 보자고, 그래서 다시 행복해져 보자고 소망하는 영화이다. 일본 사회가 정상으로 가보자고 소망하는 영화이다. 이상하게도 그 정치성이 느껴진다. 믿거나 말거나이다. 해석은 자유이다. 관객의 몫이다.
세상은 늘 한 번에 망가지지 않는다. 서서히 붕괴한다. 그건 마치 박찬욱의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주인공 형사 해준(박해일)이 서래라는 이름의 조선족 여인(탕웨이) 때문에 붕괴하는 것과 같다. 붕괴는 물리적인 파괴보다 해준처럼 참담함이라는 정서적 공습으로 다가선다. 붕괴는 간조(干潮)가 끝나고 밀물이 차오를 때 마냥 서서히 스며든다. 지금 우리 사회가 딱 그렇다. 예컨대 1. 이전 정부 때까지 정권의 핵심 공간이었던 청와대를 지금의 정부는 베르사유 궁전처럼 바꿔 관광 장소로 활용하겠다고 한다. 이미 그곳을 버린 자들이지만 공적인 공간을 자기들 멋대로 바꾸겠다고 하는 것이 일단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적어도 공청회 같은 것, 여론을 모으는 척 같은 것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좋다. 그건 그렇다 치고 이게 누구 발상이고 누구 아이디어인지, 생각한다는 것이 기껏 베르사유라니, 그 상상력에 코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물론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은 18세기 후반 프랑스 왕정 시대의 가장 화려했던 면면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고 그래서 사람들의 발걸음이 아직 이어지고 있지만, 그건 이 공간이야말로 이중의 역사적 가치를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으로서의 가치와 함께, 루이 16세와 마리 앙트와넷의 철없는 폭정(暴政)을 후세가 계속 기억하게 하기 위함이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트와넷은 1789년 바스티유 감옥이 깨지고 프랑스혁명이 시작된 후 로베스피에르에 의해 단두대에서 목이 잘렸다. 만약 ‘청와대=베르사유化’의 아이디어가 문재인 전 대통령 부부를 법적으로 소추하겠다는 내심을 담고 있는 아이디어라면 그건 역사적 인식이 매우 잘못돼 있는 동시에 매우 불쾌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게 아니고,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낸 아이디어라면 지금의 윤석열 대통령 부부를 루이 16세와 마리 앙트와넷으로 간주하고 있는 역모와 같은 행위일 수 있다. 그런 등등의 ‘복잡한 내심’을 생각하지 않고 이 아이디어를 용인했다는 것 자체가 지금의 정부가 얼마나 무지하고 생각이 없는 사람들인 가를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매사에 똥인지 된장인지, 욕인지 칭찬인지, 독인지 약인지를 가려 먹을 줄 알아야 한다. 예컨대 2. 일상에서 미세한 변화의 바람이 느껴진다. 국내에 개봉된 할리우드 직배(워너 브라더스 직접배급) 영화 ‘엘비스’의 흥행 참패 같은 것이다. 이 영화는 4, 50년대 미국의 정체된 보수성을 음악과 춤, 패션으로 ‘흔들어 대려’ 했던 엘비스 프레슬리의 얘기를 다룬 일종의 전기 영화다.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일본의 대책없는 ‘또라이’ 작가 무라카미 류의 명언 아닌 명언이 떠오른다. 혁명은 상상력에서 나온다.라고 그는 자신의 어느 소설에서 썼다. 블라디미르 레닌의, 혁명은 총구에서 나온다, 를 바꾼 말이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난리법석 춤판, ‘(아랫도리) 털기 춤’의 혁명은 결국 기독교의 허위의식, 보수주의자들의 거짓된 윤리의식, 기득권을 지키려고 만들어 놓은 수많은 사회적 통념들을 깨부수게 했다. 그걸 깨부수게끔 젊은이들을 흥분시켰다. 이때의 젊은이들이 60년대로 넘어가 앵그리 영맨이 되고 비트 제너레이션으로 컸다. 잭 케루악 같은 시인이 되고 톰 헤이든 같은 학생운동가, 장 뤽 고다르 같은 영화감독이 됐다. 그리고 그들이 68 혁명을 만들어 냈다. 비틀스의 존 레넌 얘기처럼 엘비스가 없었다면 비틀스도, 롤링스톤즈도 없었다, 는 말이 맞다. 세상의 혁명은 마르크스나 레닌, 마오쩌뚱이나 호찌민, 체 게바라에서가 아니라 바로 엘비스에서 시작되고 분출됐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그런 내용을 담고 있는 영화 ‘엘비스’를 국내 젊은이들이 보지 않는다. 유독 한국의 젊은이들이 보지 않는다. 아이들이 엘비스를 몰라서일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기성세대들이 아이들에게 ‘그런 엘비스’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아서이다. 윤석열 정부냐, 문재인 정부냐의 여론조사에서 유독 20대에서만이 윤석열을 더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어린아이들, 젊은 애들의 무지함을 탓할 것 없다. 모두 기성세대, 우리 탓이다. 다 내 탓이로소이다, 이다. 예컨대 3. 코로나 19가 다시 퍼지고 있는 상황에서 대통령은 정치 방역을 하지 않고 과학 방역을 하겠다며 자율에 맡기겠다고 한다. 질병관리청장이라는 사람은 이제 코로나19는 통제위주의 관리체계를 벗어났다는 식으로 말한다. 사람들은 병원에서 PCR 검사를 하러 갔다가 비용이 5만원이라는 소리를 듣고 발길을 돌린다. 이제 코로나도 돈이며 자본주의임을 실감하게 된다. 돈만을 생각하는 정부를 뽑았기 때문이다. 돈 있는 자만이 살 수 있고, 결국 이제 알아서 각자도생하라는 정부를 머리에 이고 살고 있는 셈이다. 붕괴하고 있다. 한국사회의 여러 시스템이 붕괴하고 있으며 따라서 각자의 삶이 붕괴하고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과연 어찌 할 것인가. 브라이언 드 팔마의 1987년 역작 '언터처블'에서 노련한 순경 짐 말론(숀 코넬리)은 시카고의 갱 두목 알 카포네가 보낸 청부살해업자의 공격을 받는다. 그는 숨이 넘어 가기 직전 자신과 팀을 이뤄 알 카포네 조직을 좇던 검사 엘리옷 네스(케빈 코스트너)의 멱살을 잡는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응? 어떻게 할 거냐고?” 요즘 자꾸 숀 코넬리의 음성이 귓가를 맴돈다.
배우 출신의 감독(이란 표현도 일정한 편견이 들어간 것이다. 배우가 연출을 하는 것을 여전히 신기해하는 것인 양 굴면 안 된다) 매기 질렌할이 만든 ‘로스트 도터’는 오프닝 장면 그리고 제목 자체만으로는 이야기 전개를 도통 짐작할 수 없게 하는 영화이다. 이건 공포인가, 살인극인가, 유괴범 이야기인가. 적어도 서스펜스 스릴러 스타일인가. 영화는 그 어느 것도 아니지만, 그 어느 것 모두에 해당하기도 한다. 이야기는 일상의 소소한 것들을 다루는 척 하지만, 사실은 인간 마음속의 거친 풍랑을 그려 나간다. 그 격랑의 물결 안에는 살의(殺意)가 있다. 그것도 모성의 살해 욕구. 바로 그 점이 섬뜩하게 만든다. 많은 여자들, 많은 남자들이 마음속을 들킨 것 같고, 그것을 헤집어 놓은 것 같아 못내 찝찝하면서도 겁이 난다. ‘어떻게 알았을까? 사람들이 내 마음속 진심을 어떻게 눈치 챘을까’하는 마음이 된다. 대학에서 비교문학을 가르치는(것처럼 묘사되는) 여성 레다(올리비아 콜맨, 젊은 시절 역은 제시 버클리)는 그리스의 외딴 섬에 외따로 여행을 왔다. 일종의 워킹 홀리데이다. 조용한 곳에서 홀로, 아무의 방해도 받지 않고 연구하고, 쉬고 할 생각이다. 레다는 올해로 마흔여덟이다. 그러니 이제 이럴 때도 된 셈이다. 레다가 묵는 레지던스를 30년 동안 관리해 왔다는 남자 라일리(에드 해리스)는 점잖기 그지없고, 해변에서 바텐더로 일하는 윌(폴 메스칼)은 귀엽기 그지없다. 게다가 윌은 더블린에서 경영학을 전공하는 학생이다. 아픔이 있든, 과거가 있든, 그런 건 다 나중 얘기고 아무튼 지금은 좋다. 레다는 오랜만에 편하고 아늑한 느낌을 얻는다. 해변에서 수영복 차림으로 비치파라솔 그늘에 앉아 자신의 연구 과제를 들여다보는 것만큼 행복한 것도 없다. 그러나 일상은 늘 누군가에 의해 균열되기 마련이다. 레다에게 그것은 니나(다코타 존슨) 집안의 출현이다. 같은 지역의 고급 빌라(핑크색이다. 천박하다)를 통째로 빌려, 대가족이 여름휴가를 즐기는 니나 집안은 바텐더 윌의 말에 따르면 ‘나쁜 사람들’이어서 얽히면 좋을 것이 없다. 문제는 니나의 어린 딸이 해변에서 갑자기 사라지는 일이 발생하고, 레다는 아이를 찾아 주게 되는데 이번엔 그 딸이 애지중지하는 인형이 없어져서 집안에서는 실종 포스터까지 붙일 지경이 된다. 그 인형은 누가 가져갔을까. 레다는 아이를 키우고 달래는 것에 허덕이다 신경질적이 된, 거의 우울증 증세까지 보이는 젊은 여인 니나를 지켜보면서 자신의 젊은 시절을 회상한다. 지금은 각각 25살, 23살이 된 딸 비앙카와 마사를 키우는 과정에서 레다는 자신이 이루려는 학문적 성취와 육아 사이에서 큰 갈등을 겪었다. 알베르 카뮈의 얘기대로 철학적 욕구와 개인의 욕망은 일치할 수가 없다. 레다는 끊임없이 징징대고 울어대는 아이들을 ‘죽여 버리고 싶을 만큼’ 힘들어 했다. 그녀는 그래서 엄마로서는 있을 수 없는 짓을 저질렀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그 죄의식에서 레다는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 왔다. 한때의 잘못된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엄마라는 인생의 굴레에서 평생을 벗어나지 못하게 한 셈이다. 영화는 3단 케이크를 얹듯 이야기를 펼친다. 젊은 여인 니나가 겪는 육아의 고통, 그리고 과거의 레다가 겪었던 육아의 모습, 그리고… 그리고… 바로 그 인형. 사라진 인형. 어쩌면 사라진 도터(딸)와 같은 맥락의 인형. 모성은 아름답고 순수의 극치이며 영원불변하다는 말은 어쩌면 다 하는 소리이다. 실로 어쩌면 단순한 ‘개소리’일 수 있다. 오랜 가부장 사회의 남성들이 붙여 놓은 환각의 수사학이며 여성들을 모성애 안에 가두려는 수작질에 불과할 수 있다. 육아는,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자신의 갖고 있는 증오의 본질을 배우는 것과 같다. 미친다는 것, 그 광기의 경계가 어디인지를 확인하는 길이기도 하다. 젊은 레다는 견딜 수가 없었다. 아이 둘에 따른 속박을 이겨 낼 재간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비교문학을 위해서도 끊임없이 이탈리아어를 외워야 했고 다른 언어도 공부해야 했다. 하지만 아이들이 가만히 놔두지를 않았다. 너무 피곤해서 잠깐 조는 것까지 아이들은 허용하지 않는다. 레다는 칭얼대는 비앙카를 견디다 못해 자신이 어머니로부터 받은 귀한 인형을 창문 밖으로 던져 버려 박살을 낸다. 아이를 침실에 가두려는 과정에서 유리창을 깨뜨리기도 한다. 레다는 이러다 스스로 폭발하게 될 것이라는 위기감을 느낀다. 그러다 레다는 일상의 숨통을 트이게 할 있는 학회에 참석하게 되고 거기서 하디 교수(피터 사스가드)를 만나 걷잡을 수 없는 궤도 이탈을 경험하게 된다. 레다는 무슨 사건이나 강제적인 무엇으로 인해 ‘로스트 도터(딸을 잃었다)’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딸을 잃는 과정을 겪었고, 그러다 자신 스스로까지 잃어버린 셈이 됐다. 레다는 끊임없는 과거 기억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데다 툭하면 어지럼증을 겪는다. 온전한 정신과 육신이 아니다. 매기 질렌할의 카메라는, 레다의 마음속을 유영하며 그녀가 겪는 부당하면서도 불공정한 죄의식의 정체를 캐내려 애쓴다. 레다는 아이가 잃어버린 인형을 몰래 보살피는데, 인형 안에 물이 차 있었던 탓인지 입에서 지네가 빠져 나올 때 소스라치게 놀라고 만다. 인형의 뱃속에서처럼 레다의 뱃속에도 흉측한 과거의 악령이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얘기이다. 니나는 그런 레다의 배를 말다툼 끝에 긴 바늘로 찌르고 간다. 레다의 배에서 슬며시 배어 나오는 핏자국은 인형의 몸속에서 나온 지네의 흔적과 닮은꼴이다. 아이가 어른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는 살부(殺父) 욕구와 살모(殺母) 욕구를 느낀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과정에서 여성들은 끊임없이 ‘이 아이를 왜 낳았을까’, ‘이 아이가 없어졌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 아이가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한다. 육아의 고통은 그에 앞서 오랜 기간 만들어지고 교육으로 강제된 모성애의 인내심을 뛰어 넘는다. 그러니 그 마음속 욕망을 누가 탓할 수 있겠는가. ‘로스트 도터’는 변화하는 여성성과 더불어 변화하는 모성성에 대한 얘기를 하는 영화이다. 아이가 최우선이기 이전에 한 명의 여성이 먼저이다. 여성이 있어야 모성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아니 거의 매번, 모성애를 통해 여성은 올바른 주체의 인간으로 거듭나기도 한다. 여성과 모성. 그 경계에서 늘 갈등하고 방황할 수밖에 없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고, 그렇게 잘 알고 있음에도 우리는 늘 출산과 육아를 선택한다. 질곡(桎梏)이다. 영화는 마치 그 차꼬와 수갑을 차고 있는 것마냥 보는 사람들의 심사를 꽉 억누른다. 매기 질렌할은 그 일관된 답답증의 연출에 일가견을 보인다. 사랑과 결혼, 출산과 육아는 실로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삶이 그렇다. 인생을 산다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이탈리아 나폴리 출신의 세계적 작가 엘레나 페란테의 소설 ‘잃어버린 사랑’을 원작으로 한 영화다. 소설의 문체가 흘러가듯 묘사한 글의 마력을 매기 질렌할이 영상으로 옮겨 내려 했다. 영화를 읽게 만든다. 그 서술의 능력을 보여 준 작품이다.
1978년 당시 1500만 달러를 들여 제작한 후 4500만 달러를 벌어 들였으니 지금 시가 기준으로 1억 5000만 달러에서 4억 5000만 달러, 즉 우리 돈으로 1700억 원 정도의 돈을 들여 5000억 원 정도의 돈을 번 셈이 되는 것이다. 바로 영화 ‘디어 헌터’ 얘기이고, 이 영화를 만든 마이클 치미노 감독에게는 그 같은 성공이 약이 아니라 독이 됐던 얘기이다. 이후 여기서 얻은 자신감으로 치미노는 차기작으로 7시간짜리 대작 영화 ‘천국의 문, Heaven’s Gate’을 만들었다. 문제는 이 서부극이 당시로선 천문학적 비용인 3500만 달러가 들었고, 한 푼도 건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영화로 마이클 치미노뿐만 아니라 할리우드의 메이저 배급사인 유나이티드 아티스트(UA)까지 파산하고 말았다. 마이클 치미노는 이후 2016년에 사망할 때까지 할리우드에서 기피 인물이 됐고, 끝까지 재기하지 못했지만(미키 루크 주연의 ‘이어 오브 드래곤(1985년)’은 인종차별 논란으로 흥행에서 참패했고, 마이클 치미노와 미키 루크 모두 몰락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그의 역작 ‘디어 헌터’는 현대 영화사의 전설로 남아 있게 됐다. ‘디어 헌터’는 베트남전을 다룬 영화이고 반전(反戰) 영화지만 전투 장면 하나 변변하게 나오는 것이 없다. 마지막 장면 때문에 이 영화가 국내에서 소개됐던 1980년대에는 친미 영화, 미국 중심의 시선을 가진 영화라는 비판을 받기까지 했다(80년대 한국사회는 다소 경직된 학생운동 이데올로기가 횡행했었던 시기이다). 그러나 그렇게 볼 영화는 결코 아니다. 반전 베트남 영화의 태두(泰斗) 답게 전쟁의 참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그때나 지금이나 호전주의라는 것이 얼마나 무책임하고 세상을 병들게 하는 광기의 이데올로기인가를 보여 준다. ‘디어 헌터’는 두 가지의 텍스트를 교차하며 진행시키는 구조의 작품이다. 하나는 펜실베니아의 클레어턴이라는 비교적 ‘깡촌’ 마을에서의 일이고, 또 하나는 당연히 베트남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전자의 중심은 사슴 사냥이고, 후자는 러시안룰렛이다. 클레어턴은 철강 공장이 마을의 생활을 이어가게 하는 주력 산업인 곳이다. 펜실베니아는 필라델피아와 피츠버그, 링컨이 그 유명한 연설을 했다는 게티츠버그가 있는 주(州)이다. 링컨은 진정으로 노예해방을 원했다기보다는, 건국 초기부터 계속해서 주요 공업지대로서 미국의 산업자본주의를 이끌고 나갔던 펜실베니아주에 노동인력을 자유롭게 공급하겠다는, 남부의 흑인을 공장 노동자로 전환시키겠다는 의지가 더 강했던 자본가, 산업주의자였다. 일종의 노예 해방 선언인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연설은 결국 미국 자본주의를 향한 대(大)선언이었던 셈이다. 그런 역사와 전통을 지닌 펜실베니아의 철강 회사에서 육체노동자로 일하는 친구 6명의 얘기가 영화 ‘디어 헌터’의 시작이다. 이들은 주변 포코노 마운틴으로 자주 사슴 사냥을 하러 다닌다. 마이클(로버트 드 니로)과 니키(크리스토퍼 월켄), 스티븐(존 새비지) 그리고 스탠리(존 카제일)와 존(조지 던자), 액셀(척 아스페그런) 등이다. 이들 중 마이클과 니키, 스티븐은 곧 입대해서 월남전에 나가려고 한다. 그 와중에 스티븐은 동네 처녀 안젤라(루타냐 알다)와 결혼식을 치른다. 러시아계들인(혹은 우크라이나 이주민 후손들인) 만큼 결혼식은 폴카와 러시아 민요로 떠들썩하다. 이 와중에 또 다른 여인 린다(메릴 스트립)는 니키와 사랑에 빠져 있지만 마이클 역시 린다를 연모한다. 그런 마이클의 마음을 니키와 린다 모두 잘 안다. 3시간 3분짜리 대작인 이 영화의 초반 1시간은 스티븐과 안젤라의 결혼식과 피로연으로 채워져 있고, 입대 전 마지막으로 다음날 새신랑을 제외한 나머지 친구 다섯 명이 사슴 사냥을 나가 티격태격하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젊고, 치기 어리며, 순수했지만, 온갖 말썽을 다 일으키며 살아가는(말썽의 원인은 대개 다 그렇지만 술 때문이다) 젊은이들의 모습이 담긴다. 그리고 영화는 바로 베트남전으로 점프 컷 한다. 베트남전에서 포로로 잡힌 세 명의 친구 마이클과 니키, 스티븐은 악랄한 베트콩(전쟁 당시 이렇게 인간 말종의 남베트남 게릴라들이 실재했었던 것으로 보인다)들로부터 러시안룰렛 게임을 강요당한다. 리볼버 총에 실탄을 한발 넣고 임의로 탄창을 돌린 후 차례로 머리에 대고 쏘는, 잔인한 생존 게임이다. 이 잔혹한 상황과 탈출 과정에서 스티븐은 큰 부상을 입게 되고(그는 하반신과 한쪽 팔을 잃는다) 니키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발생한다. 그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베트남에 남아 암시장에서 러시안룰렛 게임을 하며 살아간다. 니키는 이미 삶의 가치와 의미를 모두 잃어버린 후이다. 고향 클레어턴에는 오로지 마이클만 온전히 복귀하게 되는데 베트남에 남겨진 니키 때문에 그의 심사 역시 온전치 못하다. '디어 헌터'는 전쟁영화라는 장르영화의 전형적인 이야기 구조를 취하지 않는다(고향-베트남-고향-베트남으로 교차 반복해서 이야기를 단편적으로 꾸미고 그것을 점프 컷 형식으로 이어 나간다). 그래서 오히려 이야기의 흐름에 더욱더 집중하게 되는 효과를 가져온다. 기승전결이라는 고전적 서사구조를 무너뜨리고, 에피소드끼리 충돌하게 해 이야기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일종의 정반합(正反合) 구조인 셈이다. 때문에 이야기 단락은 뒤로 갈수록 폭발적인 느낌으로 고도화된다. 사람들의 감정을 고양시키고 터뜨리게 한다. ‘디어 헌터’의 마지막 장면, 베트남에서 마이클과 니키의 재회 장면이 사람들에게 강렬하게 남아 있는 이유이다. 다친 곳 없이, 거의 기적적으로, 고향에 돌아온 마이클은 온통 환영 일색의 마을 주민들이 오히려 부담스럽다. 남아 있던 친구들인 스탠리, 존, 액셀과도 예전 같지 못하다. 돌아오지 않는 니키를 대신해 마이클과의 새로운 삶을 꿈꾸는 린다는 마트에서 식자재 정리를 하면서(그녀는 마트 직원이다) 울음을 터뜨린다. 린다는 마이클에게 이렇게 묻는다. “우리가 과연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삶의 끝을 본 사람들, 그 지옥의 고통을 경험했던 사람들, 전쟁의 와중에서 옆의 친구가, 멀쩡했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죽어 나가거나 팔다리가 잘려 나가는 것을 본 사람들, 그리고 무엇보다 그게 더 이상 충격이 아니게 된 사람들, 죽거나 다치는 사람들보다 내가 살아남는 게 더 중요했던 시기를 겪었던 사람들은 결코 예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그들이 통과해야 했던 비극의 성장통은 그들 인생이 끝날 때까지 트라우마로 남게 된다. 린다의 말대로 친구들 모두 과거의 순수했던 시대로 돌아가지 못한다. 마이클은 더 이상 사슴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지 못한다. 명색이 디어 헌터가 더 이상 사슴 사냥을 할 수가 없게 된다. 마이클과 니키, 스티븐이 겪었던 베트남전은 대략 1973~1975년이다. 1955년에 발발해 1973년, 닉슨의 하야와 함께 사실상 서서히 베트남에서 발을 빼던 시기에 오히려 이들은 전쟁에 참여한 셈이다. 이들은 전투를 겪었다기보다는 지옥을 겪었으며 인간이라는 종(種)의 끝을 봤다. 전쟁은 인간을 인간이 아닌 인간, 곧 괴물로 만든다. 마이클 치미노 감독은 ‘디어 헌터’로 전쟁영화가 얼마나 반전의 프로파간다로 쓰일 수 있는지 증명해 냈다. 반전영화의 위대한 걸작이며 반전영화의 '죄와 벌'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이 백 년 넘게 읽히듯이 마이클 치미노의 이 영화도 백 년이 넘게 보일 것이다. 이런 ‘가르침’이 있음에도 세상엔 여전히 호전주의자 천지이다. 선제공격론자들이 넘쳐 난다. 영화로 배우라. 가르침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