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빗장을 푸는 소리가 들린다. 몸속으로 스미는 바람엔 한기가 들어차고 바람이 지나칠 때마다 나무는 잎을 버린다. 노랗게 쏟아진 은행잎을 밟으며 삼삼오오 지나치는 학생들의 모습에서도 늦가을의 정취가 물씬 묻어난다. 단축 수업 때문인지 한껏 멋을 낸 아이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한 뼘은 짧아진 교복 치마에 화장기까지 살짝 있는 10대들, 빼빼로와 초콜릿이 진열된 상점 안이 북적이고 한산하던 거리가 활기를 찾는다. 그들의 모습을 유리문 밖으로 넘겨다보며 나의 10대를 생각해본다. 한 시간여 거리를 걸어서 통학했고 성적이 좋진 않았지만 무엇이든 열심히 했다. 방과 후 늦은 시간까지 학교에 남아 있었고 담임선생님이 집까지 바라다 주시곤 했다. 자전거에서 떨어져 무릎을 다친 적도 있었지만 밤길이 위험하다며 자전거를 태워주셨다. 조그마한 것이 큰 가방에 눌려 키가 더 안 자라겠다며 걱정해주던 아버지 같은 선생님. 나는 그런 선생님이 좋아서 더 열심히 공부했다. 선생님의 과목인 국어와 한문시간엔 미리 예습을 했고 누구보다도 성실히 질문에 대답해서 눈길을 끌었으며 국어와 한문 성적 또한 상위권이었다. 한없이 커 보이기만 하던 선생님. 선생님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데이 마케팅’이란 신조어가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다. 특정한 날짜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고객들의 존재를 깨우치고 나아가 자연스럽게 관련 제품의 수요를 창출하는 마케팅기법 중 하나다. 초콜릿을 선물토록 하는 밸런타인데이가 원조 격이며 끊임없이 소비자의 감성을 자극하면서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1월14일 ‘다이어리데이’를 시작으로 12월14일 ‘허그데이’까지 종류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일년 열두달 없는 날이 없으며 매달 2~3개가 겹치기도 한다. 마치 ‘데이 마케팅’ 전쟁을 방불케 할 정도다. 11월만 하더라도 엊그제는 브라데이, 오늘 빼빼로데이, 가래떡데이, 워킹데이 등 3개가 속해있다. 그 중에서도 브라데이는 여성속옷 전문 업체가 몇 년 전 브래지어와 유사한 형태의 8에 착안해 만들었다는데, 기발한 착상이라는 긍정과 지나친 상술이라는 부정의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유독 기념일을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특성을 이용한 이 같은 데이 마케팅은 대표기념일마다 선물을 빙자한 고가의 상품이 오가면서 해마다 끊임없이 상업성 논란도 일고 있다. 빼빼로데이에 판매되는 제품들도 마찬가지다. 빼빼로데이는 1994년 부산의 여중생들이 숫자 1이 네…
논어 구절 중 무신불립(無信不立)처럼 자주 인용되는 것도 드물다. 공자는 정치의 핵심으로 백성을 먹일 수 있는 넉넉한 식량(足食)과 군대(足兵)도 중요하지만 백성의 신뢰(民信)를 첫손으로 꼽았다. 클린턴 행정부에서 국제안보담당 차관보를 지낸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 석좌교수의 개념을 빌리자면, 경제력과 군사력이라는 ‘하드 파워’도 중요하지만 지도자가 국민으로부터 받는 신뢰라는 ‘소프트 파워’가 반드시 뒷받침돼야 한다. 필자는 지난 2월 대통령 취임식 날에 이 지면을 통해 박근혜정부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국민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하지만 박근혜정부 9개월째로 접어든 지금 국민과의 약속을 실천하겠다는 구체적 실천대책이 크게 미흡할 뿐만 아니라 의지마저 없어 보인다. 대표적으로 65세 이상 모든 어르신에게 월 20만원의 기초연금을 지급하겠다는 공약은 슬그머니 소득 70% 이하 계층을 대상으로 축소됐으며, 지급액도 최대 20만원까지 차등하는 방식으로 후퇴했다. 4대 중증질환 진료비를 국가가 전액 부담하겠다던 공약도 환자들에게 가장 큰 부담이 되는 선택진료비, 상급병실료, 간병비 등 3대 비급여 항목은 제외됐
양평지역 주민들이 지방공기업에 대한 국민감사를 청구했다고 한다. 방만한 운영과 관리감독 소홀, 138억원에 이르는 부채와 만성적자, 법령위반과 부패행위가 만연해 공익을 심각하게 해치고 거기에 혈세까지 낭비하고 있다는 게 청구 이유다. 지적한 내용의 면면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감안할 때 오죽하면 주민들이 국민감사를 자처하고 나섰겠는가. 그동안의 양평지방공사가 주민들의 눈을 피해 저질러온 행태가 짐작이 간다. 800여명의 양평군민이 지난 7일 감사원에 접수시킨 양평지방공사에 대한 국민감사청구서를 살펴보아도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김덕수·윤칠선 전 양평군의원을 비롯한 양평군민청구대리인 대한변호사협회 ‘지자체세금낭비조사특별위원회’(위원장 박영수 변호사)가 작성한 감사청구서에 따르면 2007년 1월 지방공사의 전신인 ‘물 맑은 양평유통사업단 영농조합법인’이 양평군에서 친환경 농업 벼 수매 자금 36억4천만원을 양도담보계약으로 빌렸으나 상환기한을 넘긴 채 수매 곡물 판매대금을 임의로 유용해 원금과 이자를 합쳐 51억원을 갚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2011년 광역 친환경농업단지 조성사업에 선정돼 국도비 포함, 94억원을 지원받아 66억원을 유용했다고 주
중국이 ‘신여유법(新旅遊法)’을 시행함으로써 중국 관광객에 크게 의지하고 있던 여행사와 지자체들에 비상이 걸린 모양이다. 신여유법이란 것은 중국 당국이 지난 10월 1일부로 중국 내 해외상품 취급 여행사를 대상으로 저가상품 판매, 쇼핑 및 옵션 강요금지, 여행일정 변경금지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는 중국이 자국민에 대해 ‘싸구려 해외관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이에 저가 관광객을 모집한 뒤 현지에서 쇼핑 수수료를 챙기는 등 그동안 잘못된 관행을 앞세워 관광객들을 유치해 온 관광업계는 크게 불안해하고 있다. 어찌됐건 중국의 신여유법 시행으로 여행상품 가격 인상이 불가피해졌다. 싼 맛에 찾아오던 단체여행객은 감소가 가시화되고 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라망신을 시키는 싸구려 저질 여행상품은 이번 기회에 싹을 잘라야 한다. 우리가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관광을 할 때 가는 곳마다 억지로 들러야 하는 수많은 상품 판매소에서 여행의 즐거움을 잃어버리고 해당 국가의 관광정책을 비난했던 것처럼 저들도 우리의 관광행태를 비웃을 것이다. 이번 신여유법을 혁신의 기회로 인식하여 명품 관광 전략을 구축해야 한다. 그동안 지나치게 단체 관광객에 의지해 온…
지방의회는 지방자치와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한다. 지방정부의 한 축이자 분권의 중심축이다. 또 강력한 중앙집권의 역사가 오래된 우리나라에서는 민주주의의 훈련장 역할을 하기도 한다. 특히 주민을 대신해 단체장과 공무원들이 일을 잘 처리하고 있는가를 감시하기도 한다. 지방의회는 지방자치의 정착과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 하지만 지방의회에 대한 국민의 평가는 그리 높지 않다. 오히려 많은 국민들은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비록 많이 개선됐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지방의원들의 비리가 종종 발생한다. 지방의원직을 권력이라고 여기는 수준 낮은 행태와 비전문성 등으로 인해 지탄을 받고 있다. 일부에서는 지방의회 무용론도 나오고 있다. 이런 인식을 개선시키기 위해서는 지방의회가 개인감정과 사리사욕, 정치적 이해관계를 버리고 지역발전을 위한 역할을 제대로 해야 한다. 왜 이처럼 서론이 길었는가 하면, 수원 화성성곽 주변 한옥마을 특화 지원사업을 부결시킨 수원시의회 때문이다. 수원시는 성곽 주변의 한옥마을 특화 지원사업 추진하고 있다. 이 사업은 전북 전주 한옥마을과 서울 북촌마을 등 지자체의 제도적 지원과 주민들의 노력으로 한옥마을이 형성된 사례를 생각하면 된다. 특
세상살이가 어렵긴 어려운 모양이다. 뭐 하나 신나게 돌아가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삼성그룹이 분기에 10조 이상의 수익을 내는 등 한국 기업들이 나름 선전하는 데도 경제는 어렵다고 아우성이다. 오히려 일부 재벌기업의 성과 때문에 한국경제의 어려움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말이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수출 호조와 외환보유고 확충 같은 것이 일종의 착시효과라는 것이다. 학교에 있으면 이것을 실감한다. 4학년 졸업반 학생들의 취업 소식이 잘 들려오지 않기 때문이다. 작년처럼 또 사은회를 취소해야 할까? 지난해에는 취업에 곤란을 겪는 졸업생들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준다는 차원에서 처음으로 사은회를 갖지 않았다. 사회를 향해 내딛는 젊은이들의 첫발걸음이 이토록 무겁다니! 그런 점에서 올해 겨울은 더 스산할 것 같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이 틀리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단군 이래 가장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한 이 젊은이들에게 무작정 견디고 헤쳐 나가라고 하는 것이 정답일 수는 없다. 물론 비약적 경제적 성장을 통해 한국인의 삶의 질이 향상되었고, 한 세대 전에 비해 비교할 수 없는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미래다. 제조업은 생
차를 타고 여주관내 이곳저곳을 다니다 보면 가을걷이가 끝난 들녘에서 고구마, 인삼 등의 이삭을 줍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때론 동네 할머니들 몇몇이, 때론 아이를 동반한 여러 가족이 무리를 이루어 차까지 대놓고 이삭줍기에 열심이다. 저렇게 주워서 얼마나 할까 하는데 소쿠리며 자루에 든 양을 보니 열심인 이유도 알 것 같다. 농부 입장에서 보면 저들이 얄미울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한 해 동안 쌀 한 톨, 고구마 하나라도 더 수확하기 위해 피, 땀 흘려가며 농사지은 땅에서 공으로 걷어가니 말이다. 그러나 농부는 불평하지 않는다. 어디를 가도 주인 몰래 이삭 주워간다는 민원은 듣지 못했다. 이미 수확이 끝난 농토는 나의 땅이 아니라는 그 어떤 약속이 있는 것 같다. 그러니 누구나 와서 고구마 몇 개쯤 주워가도 뭐라 할 사람이 없으니 적당히 횡재(?)하고 가면 그만인 것이다. 8일부터 11일까지 나흘간 여주에서는 도자기축제에 이어 여주오곡나루축제가 열린다. 쌀과 고구마 등 질 좋은 농산물을 소비자와 생산자가 직거래로 싸게 살 수 있고 풍성한 먹을거리가 있는 시골장터와 재미있고 다양한 공연이 함께하는 도내에서 몇 안 되는 11월 축제다. 이번 오곡나루축제의…
비가 오고 난 뒤에 우산을 보내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괜히 안 해도 될 일을 해서 정력과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주의 섞인 말이다. 비슷한 의미로, 사향노루가 배꼽(향주머니) 때문에 사냥꾼에게 잡힌 줄 알고 배꼽을 물어뜯으려 해도 이미 때가 늦었다는 말로 숨은 뜻이 있어도 일을 그르친 뒤에는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 즉 사향노루는 배꼽에 향주머니가 있는데 죽기 전에 반드시 배꼽을 뜯어먹어 버린다. 그래서 사향의 값이 그토록 비싼 것이다. 몇 십 년 전만 해도 유명 필방에 들르면 麝香(사향)먹의 향기가 진동을 했는데 지금은 인조사향을 쓴다하니 사향노루의 향을 맡을 수가 없다. 고급 먹을 만드는 일본에서는 진짜 사향을 넣어 만드는데 그 값이 우리 먹값의 열 배에 이른다. 夏爐冬扇(하로동선)이라는 말은 논어에 있다. 여름철 화로와 겨울철의 부채라는 말인데 때에 맞지 않고 쓸데없는 사물을 비유하는 말이다. 망아지 잃고 외양간 고쳐서는(失馬治廐) 안 되며 목이 바짝 마른 다음에 우물을 파려는 우를 범하며 사는 그런 인생이 있다면 삶은 참으로 피곤하고 괴로울 것이다. /근당 梁澤東(한국서예박물관장)
참 교묘하다. 대기업들의 골목상권 침투수법(?) 말이다. 옛말에 ‘소 잡는 칼은 소 잡는 데에만 써라’는 말이 있다. 소를 잡아야 하는 큰 칼로 개구리나 병아리를 잡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기업 규모에 맞는 시장을 개척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쯤으로 해석되겠다. 그런데 대한민국 대기업은 참 이상하다. 아흔 아홉을 가진 사람이 하나를 가진 사람 것을 탐하듯, 쌍끌이 전술로 동네 시장을 싹쓸이하려 하고 있다. 처음에는 대형마트로, 그 다음엔 SSM, 이어 편의점 공략. 급기야 ‘상품 공급점’이라는 명목으로 동네 슈퍼까지 치도곤 내고 있다. 해도 너무한다. 차라리 해외시장 개척을 고민하는 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대기업의 뇌 구조는 다른가 보다. 가난했던 시절 동네 양아치들도 코흘리개 아이들의 눈깔사탕은 넘보지 않았다. 최소한의 영역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넘보지 말아야 할 것과 넘보면 안 되는 것. 뭐, 그 정도는 통용되는 시절이었다. 요즘 대기업은 어린 아이의 코까지 핥아먹을 기세다. ‘뺏고 보자’만이 정의이고 진리인가 보다. 그토록 중시했던 상도덕(商道德)은 이미 개에게 줘버렸나 보다. 최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