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제비가 대장간에 들어가 쇠붙이 조각을 핥았습니다. 입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지만, 족제비는 계속 핥았습니다. 족제비는 피가 쇠붙이 조각에서 나온다고 생각했고, 결국 혀를 못 쓰게 됐습니다.’ 톨스토이의 어린이를 위한 우화 ‘족제비’ 편이에요. 때로는 짧은 우화 속에 깜짝 놀랄 만한 비유나 교훈이 들어있는 경우가 있죠. 우연히 이 우화를 읽다가 문득 권력에 취한 우리 정치권의 우스꽝스러운 정쟁 놀이 모습이 떠올랐어요. 정치는 ‘말’로 하는 것이니 ‘혀’는 곧 정략을 상징하지요. 낫이나 도끼 따위 벼린 권력에 베인 자기 혀에서 나오는 피 맛을 정치의 달콤한 맛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곧 정치꾼들이에요. 야릇한 그 맛에 취한 그들은 날로 혀를 더 요란하게 움직여 요설(妖說)들을 지어내게 되지요. 한번 대장간에 들어가면 혀를 쓰지 못할 때까지 날카로운 쇠붙이를 핥게 되는 이 불가해한 중독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전당대회준비위원회(전준위) 구성을 마치고 본격적인 전대 준비 체제로 들어간 더불어민주당 각 정파가 본격적인 ‘룰 전쟁’을 시작했군요. 지난 6·1지방선거 중에는 ‘586 퇴진론’이 여론을 흔들더니, 이번에는 ‘세대교체론’이 등장했네요. 노역들을 억지로 물러
사람은 타인에 대한 아첨과 허영에서 벗어나면 벗어날수록 신을 섬기기가 수월해지고, 그 반대의 경우 역시 진실이다.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마음을 졸이며 살 것이 아니라, 너 자신이 좋다고 생각하는 삶을 살도록 살라. (류시 말로리) 남의 결점에 대해서는 불쾌하게 느끼면서도, 자신 속의 결점은 전혀 깨닫지 못하고 그것을 알려고도 하지 않는 법이다. 남의 얘기를 할 때, 그 사람을 흉보는 사람은 그게 바로 자신에 대한 얘기임을 알지 못한다.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들 속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면, 그것보다 빨리 우리의 결점을 바로잡아 주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떨어진 거리에서 우리의 결점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면 당연히 그 결점이 싫어지기 때문이다. (라 브뤼에르) 선한 사람들이 편히 쉬는 곳은 그들의 양심이지 결코 다른 사람들의 입술이 아니다. 입을 다물고 있어도 비난하고 말이 많아도 비난하며 또한 말이 적어도 비난한다. 세상에 비난당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법구경) 절대로 변명하지 말라. 진리를 존중하지 않는 친척보다 진리를 사랑하는 남이 더 낫다. 아무리 선량한 행위에도 어느 정도는 허영과 세상 사람의 칭찬을 바라는 마음이
고르디우스 매듭은 고대 설화의 소재 중 하나로 ‘풀기 어려운 문제’를 뜻한다. 국민통합 역시 이 매듭의 범주에 들어간다. 지난 문재인 정부가 적폐청산이란 이름으로 국민을 편가르기 하고 갈기갈기 찢어 놓았기 때문이다. 서슬퍼런 적폐청산의 회오리 바람 속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휘말려 들어가 남모를 고충을 겪었거나 지금도 겪고 있다. 산에 오르거나 공부에 집중하면서 섭섭함과 울분을 달랜다. 회오리 바람에 직격탄을 맞은 사람들은 억울하고 원통한 심정을 삭히고 토로하지만, 이를 이해하거나 동정하는 사람이 적다는 것도 이들의 아픔을 더한다. 한 때는 경쟁자였거나 자기보다 잘 나가던 사람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뒤돌아서서 엷은 미소를 짓는 것이 인간의 생리다. 그러나 한 줄기 희망을 갖는 것은 우리사회에 주역에서 말하는 ‘大人’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대인은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이를 현실에서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존재로 묘사한다. “무릇 대인은 천지와 더불어 그 덕을 합하고, 일월과 더불어 그 밝음을 합하고, 사계절과 더불어 그 질서를 합하고, 귀신과 더불어 그 길흉을 합한다.(夫大人者 與天地合其德 與日月合其明 與四時合其序 與鬼神合其吉凶)” 주역의 인간관은
사회 질서의 개선은 도덕적 완성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내가 이렇게 붓을 들고 있는 방의 창문 밖으로, 코에 코뚜레가 꿰여 말뚝에 매어 있는 커다란 소 한 마리가 보인다. 소는 풀을 뜯어 먹다가 저도 모르게 자신이 매여 있는 고삐를 말뚝에 감아버렸다. 소담스럽게 자란 풀을 눈앞에 두고도 배를 주리고 어깨에 달라붙는 파리를 쫓기 위해 목을 흔들지도 못한 채 죄수처럼 가만히 서 있다. 그는 몇 번이나 빠져나갈 양으로 몸부림쳐보지만, 그때마다 슬픈 신음소리를 지르다가 지금은 얌전해져서 조용히 괴로워하고 있다. 엄청난 힘을 갖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하면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 이해할 만한 자각도 없이, 많은 풀 앞에서 배를 주리며 지극히 연약한 생물에게 비참하게 당하고 있는 이 소의 모습은, 내 눈에는 마치 노동자들의 상징처럼 비친다. 모든 나라에서 땀을 흘리며 풍요로운 부를 생산하는 노동자들은 가난에 시달리고 있다. 하루하루 진보하는 문명이 새로운 사상의 분야를 개척하고 새로운 욕망을 부추기고 있을 때, 그들은 그 보잘것없는 동물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 가축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 그들은 불공평하기 짝이 없는 현실을 의식하고, 마음속으로 자신들이 이런 비참한 생활을…
6·25전쟁의 그날이 오고 있다. 고요한 일요일의 평화를 깨었던 총성이 울린지도 반세기를 넘었다. 그럼에도 이 땅에는 아직도 평화가 오지 않았다. 거기에 우크라이나 전쟁은 예상과 다르게 장기화 되고 있다. 전쟁으로 파괴된 도시, 폭탄, 탱크, 피난민, 이러한 것은 국가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를 지켜보는 나의 마음에는 기억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전쟁은 다시 반복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것은 꼭 무력으로 싸운 전쟁의 경험만이 아니다. 가볍게 시작하자면 북쪽의 고난의 행군시기인 1990년대의 이야기이다. 한두명도 아니고 무리지어 정든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전쟁과 같은 상황이 아니면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6·25전쟁에 대해 2011년 개봉된 영화 '고지전'에서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싸우기 싫으면서 싸워야 했고, 살고 싶으면서도 맞서야 했던 것이 '고지전'이라 한다면, 북쪽 고향의 1990년대 '고난의 행군'은 죽고 싶어도 가족을 위해 죽기내기로 살아내야 했다. 유일할 방법은 도강, 탈출하는 것이다. 6·25전쟁으로 분단이 되었고 그러므로 북쪽 사람들이 많이 남쪽으로 내려왔다. 피난민들이 많이 왔으므로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우리 시댁, 우리…
셀럽(Celeb). 젊은 세대에겐 일상화된 말이지만 기성세대에겐 익숙지 않은 말이다. 셀러브리티(Celebrity)의 줄임말이다. 우리말로 유명인이다. 언론이 본질적으로 좋아한다. 독자·청취자·시청자를 모으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언론은 광고로 보상받고, 셀럽은 유명세를 더욱 공고히 한다. 반면 뉴스의 질은 곤두박질한다. 최고의 셀럽 중 한 명이 진중권이다. 그의 한 마디는 놓쳐서는 안 될 취재원으로 둔갑됐다. 언론의 짝사랑 정도를 알아봤다. 지난 한 달간(5월 20일-6월 19일) 네이버 뉴스에서 ‘진중권’이란 키워드를 넣고 검색했다. 세계일보 37건, 중앙일보 34건, 국민일보 32건, 조선일보 22건(주간조선 6건 별도), 문화일보 18건, 서울신문이 10건을 기사화했다. 이어 한국일보가 5건, 경향신문, 동아일보, 내일신문이 각각 1건이었다. 한겨레만 한 건도 없었다. 이중에는 16일 자 중앙일보 안혜리 논설위원의 칼럼처럼 진중권의 발언을 질타하는 경우도 있다. 진중권은 김건희 여사가 지인을 대동해 봉하마을을 방문한 데 대해 비선논란이 제기되자, 14일 CBS 라디오 ‘한판승부’에 출연, “공식적인 자리에 비공식적으로 사인의 도움을 받는 것이 뭐가 나
민비의 질문, 그리고 위태로운 혁명 “경(卿)들이 지금 말하는 변란(變亂)은 청나라 측에서 일으킨 것인가? 아니면 일본 측에서 일으킨 것인가?” 김옥균이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고종과 민비에게 급변이 일어났으니 속히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야 한다고 하자 민비가 날카롭게 쏘아 물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질문이었는데, 이는 정세의 축이 어디에서 어디로 움직이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기습적인 반격이었다. 또한 외세의 위력이 주도하고 있던 현실에서 그 어떤 정변(政變)도 국제적 관계와 밀접하게 돌아가는 것을 인식한 발언이기도 했다. 거사는 이미 시작되었고 군주(君主)를 자신들의 손에 장악하는 것이 승패의 요체였는데 여기서 주춤거리면 잠시의 지체도 전체의 흐름을 끊어버릴 수 있다. 때마침 폭음(爆音)이 터지자 피신해야 할 상황이 명백해졌다. 주변에 조선 호위군이 없자 고종은 일본군이, 민비는 청군이 호위해주기를 바라는 처지였다. 이미 짜놓은 대로 일본군 출동을 위한 수순으로 들어가야 했다. 박영효가 백지를 펼쳐 들자 왕은 노상에서 김옥균이 말하는 대로 “일본공사래호짐(日本公使來護朕/일본공사는 와서 짐을 호위하라”를 쓴다. 이 칙서(勅書)는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
서울민예총 주최로 광주에서 6월 1일부터 15일까지 개최된 ‘언론개혁을 위한 예술가들의 행동’ 전시회에 출품된 박찬우 작가의 작품 ‘기자 캐리캐처’를 두고 기자들이 발끈했다. 조선일보는 박찬우 작가에게 4월 8일까지 삭제할 것을 요청하면서 납득할만한 조치와 답변이 없을 때는 법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 엄포를 놓았다. 한국일보는 ‘명예훼손 등에 따른 전시 금지 요청의 건’으로 내용증명을 보냈다. 기자협회는 성명서까지 냈다. 문재인 정부에 비판적인 기자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면서 “전시회를 강행하고 언론인에 대한 적대적 표현을 계속한다면 언론의 자유와 기자들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한국기자협회는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겁박한 것이다. 문재인 정부에 비판적인 기자들이라는 표현도 웃기고, 언론의 자유와 기자들의 인권을 들먹거리는 것도 가관이다. 언론기관에 대한 신뢰가 바닥을 기는데도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더욱 가관인 것은 언론의 자유를 기자들이 누리는 특권으로 오인하고 있다는 점이다. 언론의 자유는 헌법이 보장하는 국민의 권리이며, 기자는 뉴스라는 상품을 생산 판매하는 언론사의 종업원이다. 물론 언론이 진실보도와 공정보도로써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다는 전제에서 그
김건희 여사의 행보를 두고 불필요한 시비가 오가고 있다. 야당은 “비선 실세”를 들먹이며, 과거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당시의 “국정 농단 프레임”을 떠올리게 하려고 힘을 쏟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지적하고 싶은 점은, 이런 프레임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서는 제2 부속실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김건희 여사는 영부인이기 때문에, 김 여사의 일거수일투족은 세간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고, 또한 공적 활동이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밖에 없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김건희 여사가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고 집에만 있다고 하더라도, 또 다른 공격들이 나올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김건희 여사의 활동이 베일에 싸일수록 이상한 말들을 만들어내며 공격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공개 행보를 하더라도 말들이 나올 수밖에 없고, 집에만 있어도 음모론이 활갯짓할 가능성이 큰 상황이라는 것이다. 이럴 바엔 투명한 방식으로 공개 활동을 하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라는 판단이다. 그런데 투명한 공개 활동을 위해서는 '공적 조직'의 지원이 필수적이다. 공적 조직의 지원 없이는, 지금처럼 공개 활동에 대한 다양한 말들이 나올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윤석열
남을 비난하지 않는 데는 아주 약간의 노력이면 충분하다. 남을 비난하지 않는 자의 생활은 참으로 당당하다. 그런데 그 약간의 노력을 하는 사람을 이렇게 찾아보기 힘들다니! 한 노인이 꿈속에서 생전에 결점이 많았던 수도승이 천국의 맨 윗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어떻게 그 많은 결점을 가진 수도사가 가당찮게도 저렇게 큰 영예를 누리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한평생 아무도 비난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기는 죄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남을 판단하면서도 자기도 똑같은 짓을 하고 있으니 결국 남을 판단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단죄하는 것입니다. (바울) 남의 행위를 비난하지 말라. 남을 비난하면 공연히 자신의 마음이 어지러워져 커다란 잘못을 범하게 된다. 오히려 자기 자신을 반성하라. 그러면 그것은 결코 헛되이 끝나지 않을 것이다. (성현의 사상) 자기 스스로를 가차 없이 엄격하게 비판하면 할수록, 남을 더욱 공정하고 더욱 너그럽게 비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공자) 남의 불명예 속에서 자신의 명예를 찾지 말라. 선량한 사람은 남의 치욕을, 심지어 그에게 해를 끼친 자의 치욕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