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공항으로 향하는 버스 속에서 나는 학생들에게 이번 청소년해외봉사캠프를 본인이 원해서 참여하게 된 학생은 손을 들어 보라 했더니 아무도 없었다. 지난 7월 30일 수원의 중·고생 34명이 인도차이나반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인 캄보디아 씨엠립주의 빈민 초등학교와 무료급식소, 고아원 등으로 6박8일의 해외자원봉사를 떠나는 날의 버스 속 분위기는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다. 캄보디아 씨엠립주는 수도 프놈펜 다음으로 큰 주(州)로 세계문화유산 ‘앙코르와트’가 있는 관광수입을 주로 하는 도시이자 동양 최대의 ‘돈레샵’ 호수에서 어업을 주업으로 살아가는 낙후된 지역이다. 수원시는 2007년부터 씨엠립주의 ‘프놈끄라옴’이라는 빈민촌에 초·중학교 신축과 마을회관 건립, 마을우물을 여러 군데 설치한 바 있어 상호교류가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곳으로, 이번 ‘프놈끄라옴 수원마을’을 학생들이 해외봉사로 방문하는 것 역시 연례행사다. 우리나라 중·고생 누구나 그렇듯 여름방학이면 평소 부진한 과목의 보충을 위해 학원을 가거나 가족과 함께 여름휴가로 바다나 계
눈동자 그 눈동자 /박이화 이 들면 언제나 저 아득한 우주의 시간 속에서 꿈처럼 사랑하고 죽어 간 어떤 별들의 생애가 나타난다. 사천 년 전 해질 무렵 떠나와 이제사 내 가슴에 닿는 저 푸르고 슬픈 광년 그때도 나는 지금처럼 울먹였겠지 캄캄한 밤하늘에 그렁그렁 고이는 별빛을 바라보며 이제 머잖아 내 생애도 흘러가고 나는 또 끝없는 윤회의 궤도 속으로 별처럼 핑그르 떠돌리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앞으로 이천 년도 내게는 꿈같이 찰나에 그쳐 나는 다시 저 쏟아질 듯 글썽이는 별들의 약속대로 당신을 만나리라는 것도 박이화 시집 <흐드러지다>에서 우주의 정체는 아리송하다. 너무 크고, 너무 멀고, 너무 깊어서, 우주의 얼굴이 어떤 것인지 인류가 멸망하는 날까지 제아무리 연구를 해봐도 결코 알 수는 없을 것이다. 반면에 인간이라는 존재는 너무나 왜소한 존재이다. 너무 작고, 너무 얕아서, 존재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울 지경이다. 그러니 크기로 우주와 나를 비교하게 되면 결과는 뻔해진다. 거리와 깊이로 비교해도 마찬가지다. 우주를 이해하려면 외형적이거나 시각적이거나 물리적인 방법에서 떠나야 한다. 우주에서 나는 어떤 존재일까. 역할이라도 과연 있는 것일까. 나에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어딜 가나 손에 검정색 작은 물건을 들고 다닌다. 지갑처럼 보이기도 하고 메모수첩 같기도 하지만 블랙베리라는 휴대전화다. 그리고 대통령이 사용한다고 해서 오바마폰이라는 애칭도 얻었다. 블랙베리는 보안이 생명인 대통령이 맘 놓고 쓸 만큼 대단한 스마트폰이었다. ‘쿼티’ 자판도 특별했고, 미 육군 등 군사·정보파트가 애용할 만큼 보안성도 뛰어났다. 미국 의회와 행정부, 월스트리트 등 금융계, 대기업 근무자들은 물론 중소기업에까지 선풍적인 인기를 얻으며 비즈니스계의 필수품으로 자리매김했다. 한때는 업무용 스마트폰 시장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보적 1위 자리를 지키기도 했다. 최소한 2007년 애플의 아이폰이 나오기 전까지 그랬다. 스마트폰의 원조라 불리는 블랙베리가 두 손을 들었다. 애플에 밀리고, 삼성전자에 치이면서 걷잡을 수 없는 추락을 거듭하더니 마침내 매물로 나오게 된 것이다. 한때 세계를 제패했던 모토로라를 비롯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해도 세계 최고의 휴대전화 업체였던 노키아의 몰락 이후 글로벌 시장 돌풍주역의 세 번째 쓰러짐이다. 20년 휴대전화 왕국인 노키아가 무너지는 데 걸린 시간은 3년이었고, 블랙베리는 갤럭시와 아이폰…
연이은 폭염에도 광복절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요즈음 들어 부쩍 심해진 일본의 극우행보는 순국선열을 기리는 우리에게 찬물을 끼얹고 있다. 고위 정치인들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위안부 강제동원 부인, 침략 사실 자체도 부정하려 들며 평화헌법까지 고치겠다고 법석이다. 굳이 고치지 않더라도 외국의 침입은 자위대가 방어할 수 있다. 헌법을 개정하여 다시 침략자가 되겠다는 이야기인가? 피해자로 깊은 상흔을 가진, 이웃나라들은 긴장할 수밖에 없다. 20여 년간의 불황과 원전사고 등으로 무력감에 빠진 일본이 제국주의 향수에 빠져드는 모양이다. 그들의 시대착오적인 행위는 국제사회의 고립을 자처할 뿐이다. 왜, 문명국답게 진심어린 사죄로 과거를 털어 버리고 이웃들과 진정한 협력과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지? 해방이 된 지 70여년이 지났지만 일본의 진정한 사죄는커녕 연이은 망언과 독도 도발로 우리는 아직도 일제에 대한 한(恨)을 지우지도, 그 잔재를 청산하지도 못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36년은 우리민족에게 엄청난 영향력과 함께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를 남겼다. 그들은 우리민족의 존재를 부정, 우리문화를 말살시키고 모든 분야 구석구석까지 일본문화를 심어 넣었다. 그 결과 지금까지도
한국사회의 자살률은 OECD 국가 1위를 차지할 만큼 급격하게 높아졌습니다. 유명 연예인, 명문대학교 학생, 입시에 시달린 고등학생 등 젊은이들의 자살도 충격적이지만, 노인자살률도 심각한 사태에 이르렀습니다. 스스로 숙고하고 결단한 자기 생명의 자발적인 제거라는 의미의 자살은 종교사에서 매우 다양하게 평가를 받습니다. 대부분의 종교는 자살은 신에 대한 죄이며, 벌 받을 행동으로 판단합니다. 까닭은 사람이 스스로 생명을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 생명을 거둘 권리 역시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중세 그리스도교 법에 따르면 자살을 기도한 것만으로도 처벌될 수 있었으며, 자살자의 교회 예식에 따른 장례식은 거부되었습니다. 자살의 원인은 다양하지만(생활고, 병고, 비관, 염세, 가정불화, 양심의 가책, 결백의 주장, 배신감, 실연 혹은 자발적 안락사 등), 자살의 책임은 전적으로 자살한 사람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자살한 사람은 이미 자살을 통하여 윤리적으로 책임질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살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무거운 상처를 주고, 신과의 관계에서는 구원의 은총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책임적 인간, 특히 신앙인이 취할 마지막…
올해 어르신들과 일할 기회가 많아서인지 윗세대들의 인생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올해 초, 몇 분의 농업분야 은퇴 교수님들과 해외원조 사업에 동참하여 파키스탄에서 일주일 정도 함께 지낸 적이 있다. 하루는 일행 중 몇 분이 먼저 귀국하게 되어 귀국 전날 한 사람씩 얘기나 노래를 하며 환송의 시간을 가졌다. 나는 그 저녁을 잊지 못하는데, 그 중 연세가 가장 많으셨던 어느 교수님 때문이다. 그 분은 칠순 후반의 연세가 믿기지 않을 만큼 건장하셨고, 사람의 중심에서 나오는 건강하고 올곧은 힘이 느껴지는 분이었다. 귀국 전날인 그 날도 현지인의 농업기술 교육에 쓸 비닐하우스 짓는 일을 온종일 마무리 하고, 검게 탄 농부의 모습으로 저녁 식사에 나타나셨다. 그 분은 자신의 차례가 되자, 우리에게 어떤 문건을 하나씩 나누어 주셨는데, 1919년에 작성된 기미독립선언서의 복사본이었다. 그 분은 독립선언서 전문을 외워보겠다고 하시곤 쩌렁쩌렁한 음성으로 암송하기 시작하였다. 吾等은 玆에 我 朝鮮의 獨立國임과 朝鮮人의 自主民임을 宣言하노라. 此로써 世界萬邦에 告하야 人類平等의 大義를 克明하며 此로써 子孫萬代에 誥하야 民族自存의 正權을 永有케 하노라. 과연 그 분
한전이 경기 동부권인 여주 이천 양평 광주 가운데 한 곳에 신경기변전소와 송전탑 170여기를 세우려는 계획을 가시화시켰다. 신울진원자력발전소의 전기를 수도권에 공급하려면 2019년 말까지 765KV급 신경기변전소와 송전선로 128㎞ 및 송전탑 170여기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한전은 지난 5월에서야 이 같은 계획을 공개하고, 이들 지역 관계자로 입지선정위원회를 구성하겠다는 일정을 밝혔다 한다. 해당 지자체들이 이에 반발하고 있어 더 이상 진척되지는 않고 있으나, 한전은 신경기변전소와 송전탑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말로는 일단 지자체와 지역 주민들을 최대한 설득할 예정이라지만, 밀양처럼 불상사가 이어지는 건 아닌지 매우 걱정스럽다. 한전은 여주 이천 양평 광주 가운데 한 지역을 골라 변전소를 지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전의 주장은 형식면에서부터 결함이 드러난다. 왜 이들 4지역으로만 입지를 제한하는가? 송전거리 등을 따져 그럴 수밖에 없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여주 남단과 광주 북단 사이가 얼마나 떨어져 있는데, 왜 꼭 이 가운데 한 곳이어야만 하는가? 경기 동부권 주민들이 이중삼중의 규제에 묶여 있다는 걸 모르지 않으면서, 왜
오늘 68주년 광복절을 맞아 새삼스럽게 독립투사와 후손들의 삶을 생각하게 된다. 수원에 거주하는 임병무씨와 과천에 사는 조길성씨의 이야기다. 시인이기도 한 이들의 삶은 빈한하기 이를 데 없다. 임병무씨의 할아버지 임면수 선생은 1919년 설립돼 폐교될 때까지 2천100여명의 독립군 간부를 배출한 만주 신흥무관학교 6대 교장을 지낸 분이다.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청산리 대첩에 참전했으며 친일 주구배(走拘輩) 주살 등 독립투쟁 전선 각 분야에서 주역으로 활동했다. 그 이전엔 국가 독립 일꾼 양성을 위해 수원삼일학교를 개교, 초대 교장이 됐으며 밭을 갈며 배우자는 ‘경학사’를 만들기도 했다. 조길성씨의 할아버지 조태환 선생은 1920년대 만주 일대에서 오동진 장군과 더불어 독립군을 이끌었다. 조씨의 외조부 고 이강 선생은 안중근 의사의 뒤에서 독립운동을 돕고, 당시 독립운동 소식지였던 ‘대동공보’와 ‘해주신문’ 등을 발간했다. 임씨와 조씨의 할아버지는 모두 국가 유공자로 등록됐다. 그런데 이 ‘자랑스러운 할아버지’들은 집안엔 도움이 되지 않았다.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할아버지들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 생명과 전 재산을 바친 탓(!)에 험난한 세월을 살았다. 임씨는 평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첫사랑은 있다. 필자도 사십 년이 지난 일을 문득문득 기억하게 된다. 필자의 고향 해남의 바닷가는 사라진 지 오래다. 만수가 차면 바닷물이 필자의 집 마당을 채웠고, 벗어놓은 신발들이 바다로 떠내려가곤 했다. 문저리와 낙지를 잡은 작은 목선은 마당 앞까지 들어와 만수까지는 바다로 다시 나가지 못하고 마당을 지켰다. 그을린 소금과 염분들이 떠나지 않았던 고향집, 목포에서 유학 생활을 한 필자는 주일만 되면 한 시간 반가량 목선 백마호 혹은 조양호를 타고 목포 앞바다를 건너 상공리 부두에 내려 다시 40분간 황톳길을 달려 산이면 덕호리에 하차했다. 늦은 밤, 산비탈을 몇 개 지나 이름 모를 묘지 앞을 불빛 하나만 바라보고 희미한 위로를 받으며 걷다 보면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때는 너무 어렸기에 첫사랑이 무엇인지 몰랐다. ‘아, 그때가 첫사랑이었구나’라고 깨닫게 된 것은 성년이 되어도 기억에 떠나지 않은 추억을 감지하고 나서야 그랬다. 동네어귀를 지나 친구네 집 앞을 서성이다 아침까지 기다린 적도 있고, 밤새워 모랫길 언덕배기에 바람을 등지고 서 있던 적도 있었고, 용남샘과 그루터기 나무도 첫사랑의 공간이었다. 추석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