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가 왔다. 현관문이 삑삑거리기 시작한 것은 자정 무렵이었다. 캐리어 가득 빨래를 챙겨 온 막내는 씻기도 전에 ‘배고파’를 연발했다. 삼분이나 걸렸을까. 초스피드로 씻고 털고 말린 막내는 팬티 바람에 식탁에 앉았다. 자다가 불려 나온 막내의 엄마는, 그러니까 내게 주인 되는 분께서는, “미친 놈, 시간이 몇 신데”를 연발하면서 밥상을 차렸다. 막내는 양푼에 밥을 비벼가며 냉장고 잔반을 처리했다. 고추장 냄새는 알싸하고 들기름 냄새는 달달했다. 아내는 맞은편 식탁에 앉아 꾸벅 졸았다. ‘꾸벅’과 ‘꿀꺽’이 식탁을 사이에 두고 상봉하였다. 나는 멀찌감치 떨어져(사회적 거리두기와 상관없이) 모자의 상봉을 관전했다. 다행히 막내의 엄마는, 그러니까 내게 주인 되는 분께서는, 별다른 지시를 내게 하명하지 않았다. 코로나 시대의 청춘은 애달프다. 대학생이라고 해도 별 수 없다. 비대면(非對面)이 일상인 캠퍼스에 낭만은 없다. 없는 낭만이 꿈꾼다고 생겨날까. 보이는 것이라곤 불확실뿐인 시대에 낭만에게 할애할 여유는 없다. 막내는 학교 담 너머에서 자취를 한다. 비대면 수업이 일상이라지만 교수연구실에서 아르바이트하는 막내에겐 ‘해당사항 없음’이다. 싫든 좋든, 해가 뜨면
까망이와의 이별은 빨리 찾아왔다. 형이 확정되자 이감 통보는 하루 전에 이루어졌다. 나는 보안과장에게 가서 까망이를 데리고 가겠다고 주장했지만 내 목소리는 높지 못했다. 모 재소자가 자신이 키우던 앵무새를 데리고 이감 간 케이스가 있기는 했다. 그 재소자는 무기수였다. 내 저항은 허무하게 끝났다. 나는 터덜터덜 돌아와서 짐을 쌌다. 나는 까망이와 눈을 맞추지 못했다. 까망이는 눈치채지 못했다. 까망이와 마지막 밤을 보냈다. 이제 까망이는 8개월이 지나서 제법 몸집이 커졌다. 나는 까망이를 내 가슴 위에 올려두고 같이 잠을 청했다. 까망이 숨소리를 더 많이 기억하고 싶었다. 까망이는 사지를 쭉 뻗어서 코를 내 턱에 박고 가르릉 소리를 냈다. 나는 밤새 잠을 못 이뤘다. 새벽에 설핏 잠이 들었는데 까망이가 나가는 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까망이 뒷발을 살짝 잡았다. “가지 마. 바보야, 나, 간다고….” 까망이가 내게로 와서 혀로 얼굴을 한번 핥더니 이불을 젖히고 나갔다. 이내 식구통 너머로 사라졌다. 짐은 단출했다. 그간 보던 책은 전부 집으로 부쳤다. 더블백 하나가 짐의 전부였다. 특사 동지들의 배웅을 받고 보안과로 향했다. 다행히 까망이는 보이지 않았다. 특
인문학의 위기라는 담론이 지금은 더 이상 거론되지 않는 것 같다. 한 세대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위기의 국면을 지나 존재감마저 희미해진 탓일까? 흔히 위기의 원인을 실용학문을 우대하는 세태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이 있지 않을까? 서울대학교 인문학 교수들이 전공의 영역을 벗어나 학제간 소통에 나섰다고 한다. 인문대 학장인 철학과 이석재 교수와 국문과 박진호 교수, 영문과 안지현 교수, 종교학과 김지현 교수들이 그 주인공들이다. 이석재 학장은 이 소통이 좁은 의미의 한국학을 벗어나 융합적 보편성을 찾아보려는 도전이라고 했다.(교수신문, 20201년 9월 8일자) 그러나 인문학의 경계는 벗어나지 않는다. 사회학자와 경제학자들과도 교류한다고 하지만 귀동냥 수준을 넘지 않을 것 같다. 대학교수들은 학과라는 웅덩이를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이렇게 가끔 문을 살짝 열고 이웃집과 대화하는 정도에 머문다. 웅덩이에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고 종국에는 증발하고 황폐해진다. 이 분들이 진행한 워크숍에는 계몽주의라는 주제가 있다. 철학의 역사에서 계몽주의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러나 계몽주의가 수학과 자연과학의 기초 위에 지어진
베이킹소다는 중탄산나트륨, 중탄산소다, 증조라고도 불리며 화합물명은 탄산수소나트륨(NaHCO3)이다. 베이킹소다는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이 치약으로 치석 제거, 광택을 내주게 한다. 뿐만 아니라 입안의 박테리아를 죽여주기 때문에 냄새를 제거해 주고 소금과 같이 사용 시 충치 예방에 좋다. 제산제로서 소화불량 시 섭취하기도 하고 빵을 구울 때는 베이킹소다가 물과 섞였다 가열되면 이산화탄소가 방출 팽창되어 부풀어 오르는 효과를 낸다. 흥미로운 것은 베이킹소다를 운동 전에 섭취하면 경기중 피로도에 의한 경기력 저하를 예방한다는 것이다. 베이킹소다를 이렇게 인체 등에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인체와 환경에 무해하기 때문이다. 베이킹소다는 매년 23만 톤(약 600억 원) 정도 수입을 하는데 대부분 중국으로부터 들여온다. 베이킹소다는 가성소다(수산화나트륨)와 이산화탄소를 화학반응시켜 만들 수 있는데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키는 곳(발전소 등)에서 이산화탄소 배출을 막기 위한 기술로 활용되기도 한다. 실제로 이산화탄소 함유 연소배가스와 가성소다를 반응시켜 탄산나트륨을 만들고 고체상태의 중탄산나트륨을 분리해 내는 고순도 중탄산나트륨의 제조 방법의 특허는 한국전력공사와 한국동서발전
추미애 후보가 민주당 대선 순회경선에서 대구·경북과 강원을 지나며 11.35% 누적득표율로 ‘빅3’에 안착했다. 추 후보는 주류 기득권언론의 집요한 공격으로 비호감 1위, ‘마이너스 10%’ 지지율로 ‘지하’에서 대선후보 경선에 뛰어들었다. 지금도 지지의원 하나 없이 ‘촛불시민들’이 꾸린 캠프에서 ‘필마단기’로 싸우고 있다. 추 후보는 경북여고 출신으로 정읍출신의 변호사와 결혼했다. 광주고법에서 판사를 하다가 DJ의 권유로 정치인으로 변신하여 서울에서 지역구 5선을 했고, 민주당 역사상 최초로 여성 당대표를 지낸 후 법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15대·16대·19대 대선에서 민주당 선대위의 요직을 맡아 김대중·노무현·문재인 대통령 당선을 도왔고 그 과정에서 ‘추다르크’ ‘돼지엄마’라는 별명도 얻었다. ‘사람이 높은 세상’을 표방한 추 후보의 대선공약은 누구보다 참신하다. 부동산 불로소득에 대한 과세를 축으로 하는 ‘지대개혁’, 모든 국민이 월급 받으며 일정기간 쉴 수 있는 ‘국민안식년제도’, 청년평화기금과 남북 대학 교환학생제도를 내용으로 하는 ‘신세대평화’, 기후정의를 실현하는 ‘에코정치’, 국가교육위원회를 통한 ‘창의융합교육’, 보편복지와 선별복지 촘촘하게…
오늘날 학문이라고 불리고 있는 지식은 인간 생활의 행복에 공헌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저해하고 있다. 학문은 태양의 흑점이 나타나는 원인을 해명함으로써가 아니라, 우리의 삶의 법칙과 그 법칙의 배반에서 생기는 결과를 밝힘으로써, 자신의 과제에 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존 러스킨) 자연에 관한 한, 경험은 우리에게 법칙을 주고 또 진리의 원천이 되어 주지만, 도덕적인 법칙에 관해서는 경험은 유감스럽게도 미망의 어머니이다. 그러므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법칙을, 자연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과 역사상 일어났던 일에서 이끌어내거나, 그것에 한정하는 것은 지극히 부당한 일이다. (칸트) 지식은 위인을 겸허하게 하고, 보통 사람을 놀라게 하며, 소인배를 우쭐하게 한다. 학문은 마음의 양식이다. 그러나 육체의 양식을 지나치게 많이 먹으면 육체에 해롭듯이, 마음의 양식도 지나치면 병에 걸리는 수가 있다. 그것을 피하려면 마음의 양식도 육체의 양식과 마찬가지로 꼭 필요한 때 필요한 만큼 섭취해야 한다. (러스킨) 지식이 중요한 것이 되려면,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사람들의 일치를 위해 봉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들은 모든 사람에게 유일한 진리를 인
나는 축구를 좋아한다. 대체로 보는 걸 좋아하는데 K리그 팀의 서포터스를 한 적이 있고 국가대표 경기는 챙겨서 보는 편이다. 관람하는 것과 다르게 직접 공을 찬 경험은 초등학교 때 동네 꼬마들하고 뛴 게 마지막이다. 그때는 샌들 신고 축구하다가 발톱이 빠져도 아무렇지 않았다. 나이가 들면서 같이 공으로 운동하던 친구들이 하나둘씩 사라졌고 이후로 공을 차면서 달려 본 적이 없었다. 교사라는 직업의 좋은 점 중 하나는 관심사를 수업에 투영할 수 있다는 거다. 초등 교육과정은 세상살이의 거의 모든 과정을 커버하고 있어서 교과서 어딘가를 뒤적이면 가르치고 싶은 내용이 높은 확률로 들어있다. 그것도 아니면 ‘창의적 체험활동’이라는 교사 재량을 마음껏 뽐낼 수 있는 과목을 이용할 수도 있다. 수업의 내용이 편협하거나, 불법적이거나, 민주시민을 양성하는데 저해되지 않는다면 다양한 것들을 수업시간에 다룰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런 교사의 장점을 한껏 이용해서 아이들이 자주 축구를 접하게 만들곤 했었다. 점심시간에 운동장에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서 두 그룹으로 팀을 나눈 뒤 나는 심판을 본다. 남자아이들만 따라 나올 것 같지만 여자아이들도 함께 나온다. 초등학생까지는 교사가…
- <독사신론>의 일깨움 “도깨비도 뜨지 못한다는 <땅뜨는 재주>를 부리어 졸본(卒本)을 떠다가 성천(成川) 혹은 영변(寧邊)에 갖다 놓고 안시성(安市城)을 떠다가 용강(龍岡) 혹은 안주(安州)에 갖다 놓으며, 아사산(阿斯山)을 떠다가 황해도 구월산(九月山)을 만들고 가슬라(迦瑟羅)를 떠다가 강원도 강릉군(江陵郡)을 만들었다.”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1장에 수로된 <독사신론(讀史新論/1908년)>의 한 대목이다. 애초 우리의 역사적 원점은 만주대륙인데 이 지명의 위치를 죄다 반도 내부에 옮겨버린 사대주의적 조선 사가(史家)들에 대한 비판이었다. 활동 무대를 좁혀놓으니 생각의 영토도 좁아져버린 현실을 개탄했던 것이다. 그가 특히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맹렬히 비판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부여를 빼버려 조선문화의 근원을 진흙 속에 묻어버리고, 발해(渤海)를 버려서 삼국 이래 결정(結晶)된 문명을 짚더미에 내던져 버리고, 이두문과 한역(漢譯)을 구별할 줄 몰라서 한 사람이 여러 사람이 되고 한곳의 지명이 여러 곳으로 된 것이 많으며...” 그래서 결국 자신과 자신의 역사에 대한 진상을 알지
영화 평론가 정성일 씨의 잊히지 않는 말이 있다. “ 외계인이 실제 있어 내게 지구를 대표하는 가장 위대한 것 하나만 말하라 한다면 음악을 소개 하겠다” 청중 한 사람이 왜 영화가 아니고 음악인가 물었다. 그의 답 “ 영화는 너무 말이 많아요” 그런데 음악도 소음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세상과 인간에 치여 혼자 있고 싶은데 무심코 튼 음악마저 신경을 긁는다. 음악을 끄면 정적이 고통을 새로 부각시킨다. 그럴 때 카를로스 나카이를 찾는다. 아! 그의 플루트 소리. 내 사는 하늘 아래 다른 세상이 있고 문명의 발자국이 닿지 않은 초원이 있어, 새벽이슬 머금은 나뭇가지 하나 뚝 꺾어 피리를 만들어 분다면 그런 소리가 나오지 않을까. 신비로운 주술가가 만든 신기한 진통제가 몸에 듣는 듯 편해진다. 카를로스 나카이의 이름에 붙는 ‘북미 인디언 나바호족 전통 플루트 연주자’라는 소개. 그 한 줄 소개는 아메리카 땅의 피비린내 나는 역사와 원래 그 땅의 주인인 북미 원주민의 참혹했던 고통을 품고 있다. 유럽인이 아메리카 땅에 발을 디디며 퍼뜨린 전염병과 원주민의 땅을 빼앗는 과정에서 자행한 대량 학살은 북남미 원주민 종족의 씨를 말렸다. 미국은 얼마 안 남은 원주민들을…
마치 항해사가 그 배가 나아가야 할 올바른 진로를 선택하기 위해 연안의 광경을 안내표로 삼을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그의 눈에 보일 때, 이를테면 강을 지나갈 때뿐이며, 대양을 항해할 때는 나침반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듯, 종교인들도 일상생활에서는 외면적인 목적에 따라 행동해도 되지만, 보편타당한 인생의 의의를 탐구할 때는, 어김없이 경고하는 양심의 소리에 따라야 한다. (표도르 스트라호프) 사욕을 떠난 행위를 할 때마다 우리가 느끼는 만족감은, 그 행위가 다른 사람의 모습 속에 자기 자신의 존재가 들어있음을 단적으로 인식하는 것에서 생기는 감정이며, 그 때문에 또한 우리의 진정한 ‘나’는 단순히 우리의 자아, 즉 고립된 자기 몸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것 안에 존재함을 인정한 것이 옳았음을 뒷받침해 준다. 이기주의자는 적대적인 타자들 사이에 있는 고독한 자신을 느끼고, 오로지 자기 한 사람의 행복을 바라게 된다. 선량한 사람은 우애로 가득한 존재들의 세계에서 살며, 그 모든 존재의 행복이 그 자신의 행복이 된다. (쇼펜하우어) 육체를 위해 사는 사람은 사변적, 또는 감성적인 생활의 복잡한 미로에서 길을 잃는 수가 있지만, 영혼은 언제나 정확하게 진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