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감사가 사흘 전 시작됐다. 다음 달 1일까지 4주 동안 이어진다. 국회의원은 자신의 활동상을 유권자에게 알리는 절호의 기회다. 언론의 구미에 맞는 보도자료도 넘쳐난다. 과장되기 일쑤다. 언론의 냉정한 검증 필요성이 그만큼 커진다. 그런데 검증은 차치하고 기자가 의원실 자료를 선정적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국정감사 보도에서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한다. 거대 플랫폼 유튜브가 조선일보로부터 범죄의 방조자라는 호된 질타를 받았다. 이 신문은 9월 26일 1면에 ‘정부 세금 안 내는 유튜브(구글 포함)에 연 674억 광고 줬다’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2023년 유튜브의 정부광고 수주액은 2022년 정부 광고 전체 1위였던 KBS를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고 보도했다. 국내 플랫폼인 네이버와 다음을 합친 금액보다 많다고 했다. 수주액이 2019년 대비해 4년 만에 3배 이상 증가해, KBS(74.2%), 네이버(33.5%) 다음카카오(96.1%) 증가율을 크게 뛰어넘었다고 했다. 사실을 나열한 기사였지만 문제가 많다는 취지의 기사였다. 6면에는 ‘가짜뉴스 온상에 나랏돈 퍼준 정부’라는 자극적인 기사가 이어졌다. 기사의 지면 배치와 기사량을 감안하면, 대형…
1960년대 근대화시기에 미국의 경제학자 로스토우(Walt Whitman Rostow)는 이렇게 말하였다. 경제발전단계는 전통적 사회에서 선행조건을 갖추고 난 후 도약(take-off) 단계를 거친다. 도약단계는 마치 비행기가 날아올라 비행하느냐 아니면 추락하느냐는 전환점이다. 날아오른 경제는 성숙단계를 거쳐 최종 고도의 대량소비단계에 이르게 된다고 하였다. 한국경제는 도약하여 짧은 기간에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우리나라는 1996년 12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여 선진국에 진입하였다. 그 후 2019년 ‘30-50클럽’의 회원국가가 되고, 2023년 기준 1인당 총국민소득(GNI)이 일본을 앞질렀다. 우리나라는 선진국이 되고 대량소비사회가 되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의 질은 어떠한가. 고도 경제성장으로 우리 경제가 전반적으로 향상되었다. 그러나 국민들의 삶의 질은 그러하지 못하다. 소득의 격차가 심해지고 불평등이 심화되었기 때문이다. 빈익빈 부익부의 양극화는 가파르게 진행되어 우리 사회는 매우 불안하다. [세계불평등보고서](WID, 2022)를 보면, 2021년 소득집단별 상위 10%의 국민소득 점유율이 한국 46.5% 미국 45.5% 스웨덴 3
최근 청년층의 장기 실업률 등의 원인이 ‘양질의 일자리 부족’이라는 분석이 이어지고 있다. 좋은 일자리를 늘려 실업문제를 해결하고 지역의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는 결론인데, 실질적인 대책은 없는 듯해 아쉬움이 크다. 우선 통계청이 발표한 8월 실업률을 살펴보자. 통계청은 8월 실업자가 56만4000명으로, 이 중 구직기간 6개월을 넘긴 ‘장기백수’는 20.0%인 11만3000명이라고 최근 발표했다. 장기실업자는 25년만에 최고 수준이며, 올해 3월부터 6개월 연속 전년동월대비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반대로 8월 전체 실업자 수는 이전보다 감소해 1.9%를 기록했다. 즉, 실업률은 역대 최저, 장기실업자 수는 역대 최고 수준을 기록한 셈이다. 두 번째로 한국고용정보원이 발표한 지난해 지역별 청년인구(15~29세) 순이동 수의 경우, 수도권(서울‧경기‧인천)을 제외하면 대전과 세종 지역만 청년인구가 유입됐고, 반대로 강원도를 비롯한 다른 지역은 청년인구가 순유출된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강원지역에서 유출된 청년인구는 3949명으로, 이는 전년동월보다 23.4% 늘어난 규모로 확인됐다. 한국고용정보원은 이를 막기 위한 대책으로 일자리의 양적 공급보다는 질적…
금년 8월에 무더위가 한창일 때, 언론에서는 ‘건국절’과 ‘뉴라이트’, ‘친일파’와 ‘밀정’이 회자되었다. 일제식민지 시대 “한국민의 국적이 일본이었다” 라고 버젓이 말하는 지도자를 바라보면서 일제 강점기시대를 치열하게 살아간 세 여성들을 생각해 본다. 먼저 석주 이상룡 애국지사의 손주며느리 허은과 이회영 애국지사의 부인 이은숙이다. 허은의 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와 이은숙의 회고록 '서간도 시종기'는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1910년 8월 29일 불법과 강요되었던 일한병탄조약으로 대한제국은 나라가 없어져 수많은 국민들은 토지를 빼앗겼으며 탄압을 받게 되었다. 이런 일제의 폭압을 피해 수많은 사람들이 서간도로 이주하였다. 남자들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 총칼을 들고 항일운동에 나서게 되었고, 아울러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고향의 전답과 종가집을 헐값에 팔았다. 온 가족이 독립운동을 위하여 중국땅으로 이주하였다. 독립운동가들인 시아버지와 남편을 따라 만주와 서간도에 정착하여 그동안의 편안한 삶을 포기하였다. 시부모와 자녀의 생계는 물론 찾아오는 애국지사와 손님들까지 모든 수발을 책임져야 했다. 낯설고 광활한 땅에서 신흥무관학교, 경학사, 부민단
내년부터 AI를 바탕으로 한 디지털 교과서가 도입된다고 한다. 당장 5개월 뒤인 25년도 신학기부터 바뀐다는데 가르쳐야 하는 교사는 뭐가 뭔지 어리둥절한 상황이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는 작은 학교라 이미 학생당 하나씩 태블릿이 보급된 상태인데 거기에 앱으로 교과서가 들어오는 건지, 다른 기계가 들어오는 건지 정확히 모른다. 당연히 AI 교과서로 뭘 활용할 수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이대로라면 큰 예산을 들여 만든 교과서가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수업 시간에 디지털 기기를 활용하는 것에 대한 학부모들의 반응도 썩 좋지 않은 듯하다. 얼마 전 2학기 상담 때 학부모 한 명이 꺼낸 이야기를 보면 그렇다. 우리 반 아이의 중학생 형 공개수업 때 태블릿을 활용한 수업을 봤는데 굉장히 실망스러웠다고 했다. 실망한 이유를 묻자 그 수업에서 아이가 뭘 배우는지 모르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수업 중 교사가 올린 링크에 학생들이 접속하고 자신의 닉네임을 정하는데 수업 시간의 반이 지나간 것부터 당황스러웠다고 했다. 수업 내용은 아이들이 올린 미술 작품에 서로 댓글을 다는 활동이었는데 학생들이 각자 자기 태블릿만 쳐다보며 웃는 게 학부모 눈에 굉장히 이상해 보인 듯했
충무로 대한극장이 9월말 폐관했다. 대한극장은 1958년 개관 당시 미국 20세기 폭스사가 설계를 맡아 70mm 원본 필름을 그대로 상영할 수 있도록 했고, 우리나라 최초로 빛의 방해를 받지 않고 영화를 볼 수 있도록 한 무창극장이었다. 컴퓨터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 최첨단 시설을 갖춘 대한극장은 관객들에게 웅장한 스크린과 생생한 음향으로 벤허, 사운드 오브 뮤직, 킬링필드와 같은 대작을 즐길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을 선사했을 것이다. 2000년대 들어 극장의 형태가 영화만 보는 게 아니라 쇼핑과 오락, 식사까지 할 수 있는 멀티플렉스로 바뀌어가자 대한극장도 건물을 철거한 뒤 2001년 12월, 7층 건물에 11개 상영관을 갖춘 지금의 영화관으로 재개관했다. 이 시기에 한국 영화들은 주로 대한극장에서 시사회를 했으며, 외국 배우들의 내한 행사도 거의 대한극장에서 열렸다. 대한극장이 영업종료를 알리자 영화의 한 시대가 저물고 추억이 사라진다며 아쉬움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많다. 대형 멀티플렉스가 급성장하고, 넷플릭스와 같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시장이 확대되었으며, 코로나 팬데믹을 겪는 동안 극장 관객이 현격히 줄었으니 누적되는 적자를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
이제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도 불어주어 찜통더위는 완전히 물러간 듯하다. 가을이다. 외로움을 느끼는 계절이 왔다. 왜? 가을은 잎이 떨어지는 계절이고 잎이 떨어진다는 것은 그 나무가 생애 주기 중 생명의 마무리 단계에 와 있다는 것이다. (물론 나무는 겨울이라는 죽음에서 봄이 되면 다시 생명을 활성화해 찬란하게 부활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특히 사계절이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을은 한 해의 마무리 단계를 준비하는 시기이고 이 준비의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살아온 한 해를 돌아보는 성찰이다. 이렇게 성찰할 때 내가 이뤄낸 것들도 떠오르겠지만 가장 먼저 나 자신의 “존재”를 보게 된다. 존재 자체를 돌아보면 그리 대단한 것이 없는 나 자신을 보게 된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사진 찍을 때마다 까치발을 하며 키를 높이거나 자신에게 대중의 시선이 집중되는 순간을 위해 미리 영어판, 아주 두꺼운 하드커버 책을 옆에 끼고, 특히 ‘펠레폰네소스 전쟁사’라는 영어 제목이 크게 쓰여 있는 책의 제목이 잘 보이고 손이 가리지 않도록 잡고 걷는 사람은 쉽게 성찰할 수 있는 마음이나 능력은 떨어질 것이다) “대단하지 않은” 내 존재를 보며 나 자신을 비하하거나 절망
살면서 우리는 종종 장애물들을 맞닥뜨린다. 배움과 성장의 기회가 되기도 하지만 잘 해결되지 않고 쌓일 때 과도한 스트레스로 작용해 가슴이 답답하고 불안하며 소화 불량, 불면증, 두통 등 증상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런 증상이 반복되면 불안과 우울이 더 커진다. 지난 20여 년간 화병 등 스트레스가 누적되어 병이 된 환자들을 진료해 오면서 일시적으로 증상만 누그러뜨리는 약과 치료로 병을 키우시는 분들을 보면서 많이 안타까웠다. 그래서 원인과 몸과 마음을 돌보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어떤 충격적인 사건, 가족이나 지인 등 가까운 관계에서의 상처, 큰 경제적 손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으로 인한 해소되지 않은 분노 등의 감정해결 되지 않고 쌓이는 정신적 스트레스, 그리고 육체적 과로. 환경오염. 영양부족, 인스턴트 음식 등의 육체적 화학적 스트레스 등이 해결되지 않고 쌓여서 병이 된다. 단지 하나의 요소가 아닌 살아온 과정 속에서 다양한 차원의 복합적 원인이 있다. 일상생활에서 부딪히는 가정, 사회적 관계에서의 질. 자신이 원하는 삶의 방향 먹고. 자고 움직이고 접하는 환경에서의 모든 요소가 영향을 미친다. 살면서 스트레스를 피할 수는 없다. 병이
일본 관동지역 한글학교 협의회가 개최한 '2024 한국어 교사 학술대회'(9/20-9/22)에 다녀왔다. 필자는 이 학술대회에서 ‘재외동포 차세대 교육의 혁신과 미래 : 미래 글로벌 생태와 차세대 정체성 교육’이라는 제목으로 기조 강연을 했다. 떠나온 모국 밖에서 자신의 삶과 미래를 헤쳐 나아가야 하는 재외동포 차세대들은 그들 부모 세대가 견지했던 정체성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 더 확장된 정체성, 더 고양된 정체성을 구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 시민 정체성은 세계의 시공(時空)에서 자아를 당당하게 드러내며, 의미 있는 성취를 향하게 한다. 세계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은 그냥 세계 무대에서 세속적 성공을 하는 수준을 넘어선다. 일종의 범(汎)도덕성 같은 것이 있다. 그것은 세계인의 공동 발전에 나의 참여를 다짐하는, 그런 정체성이다. 세계를 떠받치는 선한 가치를 세계 시민으로서 내가 실천하며 살겠다는 의식, 그런 정체성이다. 건강한 세계 시민이라면 문화 다양성이 넘쳐나고, 초 긴밀(hyper connective) 네트워킹으로 기존의 경계들이 해체되고, 지구의 위기와 새로운 갈등이 세계인 모두의 문제로 와닿는, 그런 글로벌 생태에서 세계와 나를 지속 가능하도록 발
땡볕이 내리쬐는 한낮의 버스 정류장에 다섯 살쯤 된 어린이가 두 손 포개 기도하고 있었다. 어린이는 동생 그리고 어머니와 외출 중이었다. 어머니는 두 아들과 한여름 도로 위를 방황하고 있었는데, 어린 둘째는 더위와 피로에 지쳤는지 유아차에서 노곤히 자고 있었다. 어머니는 택시를 잡으려 시도했다. 하지만 택시는 흔드는 손에 멀찍이서 다가오다 이내 가속 페달을 밟아 신속히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어머니는 유아차가 있으면 택시를 잡을 수가 없다고 한탄했다. 아스팔트 도로가 지글지글 끓었다. 그렇게 택시를 몇 대 보냈다. 정말이지 지독한 여름이었다. 한탄을 외면할 수 없었던 큰아들은 어머니를 위로하고 싶었다. “그럼, 버스 타고 가자 엄마.” 어머니는 유아차가 있으면 버스 기사분들도 좋아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하는 수 없이 집까지 걸어가 볼까 하며 발걸음을 떼보려 했지만, 엄두가 나지 않는다. 다섯 살 어린이의 기도는 이때 시작되었다. “우리 버스 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자.” 어머니는 그 모습이 귀여워 미풍이라도 분 듯 웃으며 힘을 내어 집으로 걸어가자 하였다. 어린이의 기도를 들었을 신은 (그가 누구이든) 분명 인간 세상을 가엾게 여겼을 것이다. 우습게도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