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를 의무화하고 있는 나라는 매우 많다. 투표율을 높이려는 정책도 다양하다. 일부 나라는 투표 불참자에게 벌금을 물리기도 한다. 이색적인 제재를 가하는 나라도 있다. 볼리비아는 선거에 불참하면 3개월간 은행에서 급여를 인출할 수 없다. 그럼에도 세계 각국의 투표율은 그리 높지 않다. 물론 일부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99.9% 혹은 100%투표율도 존재 하지만. 사전 투표제는 이러한 투표율제고를 위해 각 나라마다 실시하고 있는 제도다. 그리고 낮아지는 투표율을 반전시키기 위한 가장 보편적인 제도로 정착되어 있다. 우리나라는 지난 2014년 지방선거에서 처음 도입됐다. 평균 투표율이 OECD 30개 회원국 중 26위에 머무른 심각한 투표율 제고하기 위한 ‘방책’중 하나였다. 하지만 논란도 있다. ‘사전투표제가 투표율을 높이는가?’라는 화두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하락을 막고 투표율 제고 목적을 달성하고 있다”는 평가와, “순투표율을 높이는 효과는 매우 제한적”이라는 반론이 충돌 중이다. 일부에선 “기권방지에 기여하기 보다 기존 투표자를 분산하는 데 그쳤다”는 평가도 있다. 실제 처음 실시된 2014년 지방선거 사전투표율은 11.49%로 크게 높았다. 반면 전
태초에 하늘이 사람을 만들 때 앞만 보고 살게 만들었다. 사람의 생각도 앞만 보고 산다. 과거사만 더듬고 사는 사람은 십중팔구 낙제 인생들이다. 사람은 걸음을 걸어도 앞으로만 걷는다. 표정을 지어도 앞에 있는 얼굴로 자신의 감정을 나타낸다. 좋을 땐 입으로 소리 내어 웃고 싫을 땐 눈살을 찌푸린다. 그리고 감정이 복받치면 입을 벌리고 소리를 지른다. 악수를 할 때도 얼굴을 마주 보고 손을 잡는다. 그렇다. 싫고 좋은 표정들이 앞면인 얼굴에 쏠려 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현재 상태를 알 수 있다. 몸이 아프면 안색이 편안하지 않다. 기분이 나쁘면 입이 댓 발이나 삐져나와 있다. 행복하면 표정이 밝다. 이렇게 세상만사가 그 사람의 얼굴에 모든 것이 드러나 있다.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도 알 수 있다. 만물 중에 감정을 얼굴로 표현하는 동물은 사람밖에 없다고 한다. 가히 얼굴 하나로 사람은 희로애락을 표현한다. 과연 그러한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은 얼굴로만 감정을 표출하지는 않는다. 뒷모습으로도 자신의 감정을 드러낸다. 쓸쓸하고 외롭고, 화나고 분노에 찬 모습들이 뒷모습에서도 능히 드러난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 사랑하
이틀 후면 여야 간 말이 난무한 제21대 국회의원선거의 희비(喜悲)가 판가름 난다. 국가의 존재 이유는 국민의 행복을 위해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코로나19) 감염으로 나라 안팎으로 닥친 위기를 해결할 진정한 리더십을 갖춘 인물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그런데 하나도 보이질 않는다. 말로만 국민을 위하는 척 횡설수설한다. 모든 특권을 내려놓고 진정 어려움에 처한 국민을 살리는 국가비전을 제시하고 실천하려는 정치인이 보이질 않는다. 얄팍한 꼼수 수준의 말장난 개혁만 외친다. 정치인들은 언제나 말이 앞선다. 말은 곧 그 사람의 영혼이다. 말한 이의 철학이고 사상의 핵(核)이고 씨앗이다. 한 번 입에서 떨어진 말은 감옥과 같은 구속력을 가진다. 말하는 사람의 높은 책임성도 함께 진다. 말이 천금보다 무거워야 한다는 것은 그 때문이다. 정치지도자의 생명은 약속을 지키는 것이다. 정치는 국민과의 약속의 게임이다.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것이 국민을 존중하는 일이다. 말은 ‘빈 말’이어서는 안 된다. 비전이 ‘채워진 말’이어야 한다. 그래야 그 말은 화살이 과녁에 적중하듯이 들어맞는다. 총선이 끝나고 국회에 입성(入城)하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정치를 보여주겠다.”고
어디로 눈을 돌려도 꽃 천지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과 뒤질세라 노랗게 핀 개나리 그리고 진달래와 유채꽃까지 합세하여 세상을 환하게 밝히고 있다. 땅을 딛고 올라선 푸른 것들과 낮은 곳을 밝히는 민들레까지 노란 신호를 보내며 꽃소식을 북쪽으로 밀어주고 있다. 주말 나들이 약속을 취소하고 밭으로 가는 길이다. 밭을 갈아엎어 감자도 심고 상추며 아욱 등 채소를 심기 위해 가는 길에 황색 중앙선에 서 있는 흰 개를 보았다. 황색과 황색 줄 사이에서 꼬리를 뒤꽁무니에 바짝 붙이고 큰 눈을 두리번대며 서 있다. 양 방향으로 차들은 빠르게 달리고 흰 개가 검둥이가 된 녀석은 애완견 같았다. 집을 잃었거나 버려졌거나 한 모양이다. 온전히 길을 건넜을지 아니면 아직도 공포에 떨고 있을지 가출한 소녀가 떠올랐다. 세상 한 복판에 홀로 놓인 소녀도 저런 모습일거다. 막상 집은 뛰쳐나왔지만 오갈 데는 없고 세상 복판에 서서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을 공포와 굶주림과 외로움에 떠는 모습, 누구나 일탈을 꿈꾸지만 그 일탈 또한 정해진 규칙과 틀 안에서 진정 자유로울 수 있다. 연을 날려 보라. 연은 높이 오를수록 연줄이 팽팽해지고 그 팽팽함 가운데 비로소 제 몸을 맘껏 날리며 뽐
정치란 권력적 현상이다. 권력이란 타인을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게 만드는 힘이다. 여기서 대상이 되는 타인의 의지는 중요치 않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란 무서운 존재다. 그런데 그런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선거라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선거에서 이겨야만 권력을 유지하거나, 권력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정치세력은 국민들에게 잘 보이려고 애쓸 수밖에 없다. 그래서 모든 정치집단은 “국민”이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살고, 선거가 가까워 올수록 이런 증상은 특히 심해지는 것이다. 여기서 국민들이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정치권에 속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정치란 선의 구현 수단도 아니고, 특정 정치 집단이 절대 선을 구현하는 존재도 아니다. 즉, 정치는 그냥 권력적 현상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정치인이나 특정 정치집단이 자신에게 손해나는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는 것만 봐도 이런 것은 금방 알 수 있다. 만일 정치인이나 정치집단이 절대 선(善) 혹은 일반 선(善)을 구현하는 존재라면, 아마도 자기희생의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는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결코 없을 것이
우리나라 배달 앱 1위 업체인 ‘배달의민족(배민)’이 수수료 체계를 변경한 후 자영업자들의 반발이 거세다. 기존 정액제에서 주문이 성사될 때마다 일정 비율의 수수료를 부과하는 정률제로 바꾼 것이다. 가뜩이나 코로나19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데 속이 다 보이는 꼼수를 써서 수수료를 인상했다는 것이다. 이에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나섰다. 이 지사는 지난 5일 페이스북에 “모두가 어려운 시기 특히, 자영업자들의 고통이 극심한 이때 배달의 민족 등 배달앱 업체들이 독점적 지위를 이용해 일방적 이용료 인상으로 과도한 이윤을 추구하며 자영업자들을 나락으로 내몰고 있다”고 비난했다. 7일엔 “배달앱이 아닌 전화로 주문하고, 점포는 전화주문에 인센티브를 주자는 운동이 시작됐다”면서 “소비자와 국민이 무섭다는 걸 보여 달라”고 말했다. 아울러 이달부터 공공앱 개발에 착수하겠다고 밝혔다. 실제로 이 지사는 공공앱 ‘배달의 명수’를 개발·출시해 호응을 받고 있는 전북 군산시에 도움을 요청했다. ‘배달의 명수’는 수수료와 광고료가 없는 공공앱으로써 가입자가 크게 증가하고 있다. 접속 폭주로 앱 접속 지연 사례가 발생할 정도라고 한다. 이에 전국 지자체 100여 곳이 배달의 명수
언제부터인가 VUCA시대 라는 말이 단골 메뉴로 등장하고 있다. 변동적이고(Volatile) 불확실하며(Uncertain) 복잡하고(Complex) 모호한(Ambiguous) 상황을 말한다. 이럴 때 개인의 경쟁력을 확보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나는 얼마나 준비하고 있는가? 내가 갖고자 하는 능력, 아니 앞으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능력을 한번 생각해 보자. 이 모두를 X-ability라 불러본다. 우선 있-ability다. 내가 가지고 있는 걸 있는 그대로 있다고 표현하는 능력이고, 나의 존재감을 들어낼 수 있을 만큼 살짝 자랑질할 수 있는 능력이며, 가끔은 없어도 있는 척 할 수 있는 낯 두꺼운 능력이다. 두 번째로는 할 수 있-ability다. 내 꿈을 끝까지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는 능력이고, 그 꿈을 향해 묵묵히 내 길을 걸어가는 꾸준한 능력이며, 꿈을 이룬 후에도 당당히 다음 도전을 계획하는 위대한 능력이다. 세 번째로는 잘 났-ability다. 내 존재와 가치를 인정받으며 살아가는 능력이고, 더 잘난 모습이 되도록 꾸준히 노력하는 능력이며, 잘 난 모습으로 기죽지 않고 더 멋진 인생을 그려가는 능력이다. 네 번째로는 Collabor-
‘피아니스트 세이모어의 뉴욕 소네트’ 2016년 4월 우리나라에서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다. 천재 피아니스트 세이모어 번스타인의 인생을 그려낸 작품으로 당시 많은 사람들의 호감을 샀다. 특히 그가 한국전쟁에 참전, 최전방에서 총 대신 피아노로 동료 병사들을 위로하고 힘을 북돋아준 사실이 알려지면서 화제도 됐다. 그는 24세인 1951년 한국으로 파병됐다. 그리고 인천, 서울, 대구, 부산, 거제도 등에서 1년 6개월 가량 약 100회의 위문 공연하며 전쟁의 두려움과 공포에 시달리던 군인들에게 용기와 위안을 불어 넣은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1960년에는 미 국무부 후원으로 다시 한국을 찾았다. 그러나 당시 4·19 혁명이 일어나 콘서트 계획이 모두 취소됐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고 독재에 항거하다 다친 이들이 입원해 있던 서울대병원을 찾아 연주했다. 미국 방송은 이 실황을 전 세계에 방영, 큰 감동을 주기도 했다. 어렵고 힘들 때 희망를 주는 것이 음악이라고 했던가? 일찍 이를 간파한 세이모어 번스타인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음악은 조화로운 언어로 괴로운 세상에 말을 걸어주며 외로움과 불만을 달래주죠. 이 세상 속에서 음악은 우리 마음속에 있던 생각
얼마 전 주가 지수가 10년 전 상황으로 되돌아가 개인 투자자들이 패닉 상태에 빠졌다. 이런 위기 상황은 예견된 것이다. 그런데도 각 지자체에서는 몇 십만 원씩 긴급지원이라는 발표가 있었고 급기야 정부는 소득에 상관없이 백만 원씩 지급한다고 발표했다.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경쟁적인 정책 발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런 식의 대책은 올바른 방안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미 극빈자 지원책이 즐비하고 또 당장 구원이 필요한 분들에 대한 신고, 지원책이 홍보되어 있는 터이다. 이번 시책은 중소상공인이나 식당 경영 자영업자, 예술인들에 대한 지원이 되어야 맞을 것이다. 발길이 딱 끊긴 식당 관련 기사를 보아서 알 것이다. 그들에게는 당장 임대료 보조나 세금 감면책이 필요하고 지금 이 시점에서 합당한 정책이다. 그런데 전 국민 대상 지원이라는 정책은 전형적인 포퓰리즘 정책이다. 지원하더라도 빈곤 계층에 국한해서만 지급해야 한다. 지금 이 시점에서 우선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당장 거리를 나가보라. 임대라고 쓰여있는 공점포, 공실이 얼마나 많은지를 보라. 이런 상황을 생각지 못한 이들이 겪는 충격은 정책자나 생활 형편이 좀 나은 분들로서는
언어폭력이란 무엇인가? 신체에 직접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정서나 감정 등 정신적으로 부정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놀림, 욕설, 엄포, 협박 등 단순히 말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이버댓글과 휴대폰 메시지도 포함된다. 성경 구절에 ‘혀에 맞아 죽은 사람이 칼에 맞아 죽은 이 보다 많다’처럼 나나, 내주위에서 일어날 수 있다. 언어폭력이 남기는 고통은 신체폭력 못지않게 크며, 회복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거나 치유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몽골 속담에 ‘칼의 상처는 아물어도 말의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언어폭력 피해자는 서서히 현실 판단을 잃고 혼란에 빠지게 되며, 수치심이 유발되거나 자발성을 상실하고, 압박감에 자아상실에 이르기도 한다. 미국의 목사인 로버트 풀검은 ‘회초리와 돌멩이는 살을 헤지게 하고 뼈를 뿌러뜨리지만 말은 심장을 찢어놓는다’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언어폭력 가해자의 입술은 예리한 면도날이며, 혀는 날카로운 송곳이고, 목구멍은 둔탁하나 날선 도끼가 되는 것이다. 특히 노년에 배우자에 대한 언어폭력은 상대의 영혼을 파괴시키는 폭거이자 만행이다. 한 가정을 꾸려 가는데 서로 공(功)과 과(過)가 있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