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나 사회나 품격이 있어야 한다. 우리 사회가 없는 것이 바로 그 품격이다. 사람들은 스스로의 존엄성을 헌신짝처럼 취급한다. 기이한 것은 배운 사람들일수록 그런 행태가 더 하다는 것이다. 서울대를 나왔든 미국 어디서 유학 생활을 했든 그래서 국내에 돌아와 KDI(한국개발연구원)같은 유수의 기관에서 몸을 담았든 오히려 품격 제로의 현상을 보인다. 그저 자기네들이 옳으니 너희들은 따라오기만 해라, 라는 식이다. 안하무인도 이런 안하무인이 없으며 악다구니도 이런 악다구니가 없다. 한국사회를 가로지르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노자(勞資) 모순이 아니다. 半봉건적 양반-상놈의 대물림의 신분, 계급의식도 아니다. 오로지 당신이 엘리트냐 그렇지 않으냐(서울대를 나왔느냐, 미국 유학을 다녀왔느냐, 판검사나 의사, 교수, 조중동같은 언론사에 다니느냐) 하는 엘리트주의이다. 그야말로 품격 없는, 천박한 선민의식이다. 이 ‘나 잘난 주의’가 한국사회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 모든 장점, 모든 미덕을 가로지른다. 열심히 일한 사람들의 공로를 가로챈다. 넷플릭스의 6부작 드라마 ‘더 체어’는 미국 동부에 있는 명문 대학 펨브로크를 배경으로 한다. 미국 전체 8개 아이비리그 중 가장
“소유권은 신성불가침의 권리이므로, 법에서 규정한 공공의 필요성에 의해 명백히 요구되는 경우 이외에는 누구도 소유권을 박탈할 수 없다.” 루이 16세를 단두대에 올려 목을 자르고 대혁명을 완수한 프랑스 시민들이 1789년 8월 26일 선포한 프랑스 인권선언 제17조다. 여기서 소유권의 핵심은 토지다. 대혁명 이전 프랑스 시민들은 토지에 종속되어 살아갔다. 땅에 종속된 인간은 땅을 가진 자의 노예로 살아야 했다. 그렇기에 시민들은 귀족과 성직자들의 노예나 다름없는 삶을 살았다. 프랑스 대혁명은 시민을 타인의 땅에 종속되어 농사짓는 노예가 아닌 자신의 땅에서 농사짓는 농부로 만들었다. 프랑스 인권선언이 소유권을 신성불가침한 권리로 규정한 이유다. 이렇듯 농경사회에서 땅을 가질 수 있느냐 또는 그렇지 않으냐는 그의 신분을 규정했다. 땅을 가진 자는 귀족으로 그렇지 못한 자는 귀족의 땅에 속박되어 농사를 지어야 하는 노예로 살았다. 그렇기에 농지를 농부가 소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시민혁명의 핵심이었다. 중세의 모든 부조리는 농부가 아닌 자가 농지를 소유한 것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헌법 역시 농지는 농부가 소유해야 한다는 원칙을 천명하고 있다. 헌법 제1
-사라진 이름이여 “언론자유투쟁사”에 뚜렷하게 박혀 있는 이름들이 있다. 송건호 그리고 리영희. 그러나 천관우의 이름을 떠올리는 이는 이제 거의 없다. 그가 누군지 아는 이 또한 드물다. 한때 질풍노도와 같이 역사의 소용돌이, 그 중심에 거대한 체구만큼이나 우람하게 서 있던 그였으나 말년의 몇 년으로 평생의 성취를 잃어버린 비운(悲運)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3선개헌이 완료되고 이후 종신집권 음모가 진행되고 있던 1971년 4월 19일, 《민주수호국민협의회》가 뜬다. 당시 종교계의 지주 김재준 목사, 인권 변호사 이병린 변호사와 함께 언론인 천관우가 창립대표위원이 되고 이후 함석헌 선생과 법정 스님이 합류한다. 이 조직은 향후 유신체제 반대 운동의 모태로 구심력을 발휘한다. 1925년생이니 이때 천관우는 46세, 같이 이름이 오른 이들과 비교하면 젊디 젊은 청년이었다. 그러나 그가 29세에 한국일보 논설위원을 지냈다는 걸 떠올리면 그 세월에 이르기까지 그가 쌓아온 역사의 위치가 만만치 않았을 것임을 짐작케 한다. 그는 언론인이자 역사가였으며 권력의 탄압에 조금도 굴하지 않는 우뚝 선 산이었고 당대 언론의 우렁찬 목소리였다. 1974년 동아일보가 탄압을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이 지난 27일 기자회견을 열고, 9월 2일부터 총파업을 하겠다고 예고했다. 보건의료노조는 18일부터 26일까지 진행한 쟁의행위 찬반투표에서 89.8%라는 압도적인 찬성표로 파업이 가결됐다고 발표했다. 총 조합원 5만 6091명 중 4만 5892명이 투표(투표율 81.82%)했고, 이중 4만 1191명이 찬성했다. 이에 따라 노동쟁의조정 기한인 다음 달 1일까지 정부-노조 간의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다음 달 2일 오전 7시부터 파업이 시작된다. “더 이상 참고 버틸 수 없어 피눈물을 머금고 9월 2일 파업을 예고했다”는 노조 측의 ‘호소’에 공감하는 국민들이 많다. 자금까지 파업에 지극히 비판적이었던 국민들이었음에도 조합원들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것이다. 코로나19와의 처절한 사투를 벌이고 있는 보건의료인들의 노고를 누구라서 부정할 것인가. 코로나19 이후 국민들은 최일선에 있는 보건의료인들을 응원하는 한편 극한 상황에 처한 근무환경을 걱정해왔다. 실제로 보건의료인들은 부족한 인력으로 한계점에 도달한 상황이라고 밝힌다. 현재 코로나19 전담병원에서는 간호사 한 명이 확진자 15~20명을 돌보고 있다고 한다. 인력이 부족하다…
옛날 아프리카의 한 왕국에서 사내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아이를 받던 산파는 아이를 떨어뜨릴 뻔합니다. 흑인의 나라에서 태어난 하얀 피부의 아이. 백인보다 더 희디흰 피부였습니다. 부모는 아이를 숨겨서 키우기로 합니다. 왕국에서 ‘하얀 피부 인간’은 저주였습니다. 같은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하얀 피부 인간의 신체, 혹 신체 일부를 지니면 돈과 행운이 따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전문 사냥꾼들이 돌아다니며 하얀 피부 인간을 납치해 주술사에게 팔아넘겼습니다. 주술사는 주술의식 후 시체를 잘라 팔았습니다. 왕족임에도 불구하고 숨겨 키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저주는 계속됩니다. 아이는 피부뿐 아니라 털까지 하얀색이었는데 눈동자마저 하얗게 변하더니 시력이 나빠졌습니다. 글을 읽기 힘들게 되자 여러 악기들을 갖고 놀게 된 아이. 어느 날 아이는 부모에게 가수가 되고 싶다고 말합니다. 눈물 마를 날 없었던 부모는 아이의 손에서 모든 악기를 빼앗습니다. 왕국에서 가수는 천민이나 하는 짓이었습니다. 설사 가수가 되더라도 왕국 밖으로 나간 알비노를 기다리는 것은 납치에 의한 불구, 혹은 죽음뿐일 테니까. 숨어 자라던 아이, 친구도 없던 아이는 악기
저녁 먹고 유튜브를 보다가 우연히 이바라기 조선학교 여학생 합창단의 노래를 들었다. 제목은 <저고리>. 화면 중간중간에 옛날 흑백 필름이 나온다. 8.15 일본 패망 직후 동포들이 조선학교를 개교하던 시기. 일본 정부의 폐교 압력과 경찰의 물리적 탄압을 뚫고 (온전히 자력으로 설립한) 학교를 지키기 위해 안타깝게 싸우는 장면들. 위는 흰 저고리 아래는 검은 한복 치마 입은 소녀들이 머리를 질끈 묶었다. 하나의 입으로 ‘우리 학교’에 대한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 티 없는 아이들의 표정 아래에는 그러나 모국을 떠나 떠도는 디아스포라의 슬픔이 어쩔 수없이 배어있다. 가슴 한 구석이 싸했다. 그러다 갑자기 몇 달 전 기억이 떠올랐다. 작년부터 우리 학과에 일본에서 여학생 2명이 유학을 왔다. 한 명은 아키다견(犬)으로 유명한 열도 북쪽의 아키다 현에서. 다른 한 명은 한반도와 마주보는 동해 연안의 도토리 현에서. 부모형제 떠나 먼 땅 기숙사에서 먹고 자며 공부하는 이 아이들이 안쓰러울 때가 많았다. 첫 학기 초에는 아직 외국인등록증이 나오지 않은 탓에 카드도 없고 휴대폰도 없는 아이들 대신해서 교재를 사주기도 했다. 그중 한 학생 A와 면담을 한 게다.
모든 학문을 다 잘 알면서 자기 자신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무지한 자이다. 아무것도 모르지만 자기 자신과 자신의 영적 자아를 알고 있는 사람은 충분히 깨달은 사람이다. 인간이 자연을 향해 도대체 나는 무엇인가 하고 질문해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 자신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류시 말로리) 폭력을 휘두르고 싶어지면 사람들 앞에서 즉시 떠나라. (소로) 명예의 길은 왕궁으로 통하고, 행복의 길은 시장으로 통하며, 선의 길은 황야로 통한다. (중국 속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내적 세계는 너무 넓어서 연구하고 싶은 생각조차 들지 않는 큰 바다와 같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 속에 들어가 그때까지 헛되이 외부 세계에서 찾아 헤맸던 하늘의 은신처를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류시 말로리) 인간에게는 언제나 모든 불행에서 벗어날 수 있는 피난처가 있다. 그것은 곧 그의 영혼이다. 만일 인간으로서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는다면, 자신의 슬픔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느끼게 될 것이다. 살아서 선을 쌓자 이게 아니라, 사는 것이 곧 선이야. 이렇게 살아나가는 게 곧 이기는 것이야. 사람은 죄를 알지 않고
언론중재법이 오는 30일 국회 본회의를 앞두고 있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국민 다수가 찬성한다”며 밀어붙일 태세다. 국민의힘은 법안 저지를 위해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을 통한 의사진행 방해)를 예고하고 있지만 수적 열세를 극복하기가 쉽지 않아 언론중재법 통과는 사실상 본회의라는 절차만 남았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여당은 언론개혁과 가짜뉴스를 근절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언론중재법은 이 같은 취지를 넘어 권력 감시와 비판이라는 언론 본연의 기능,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느냐의 문제로 비화됐다. 핵심은 언론의 고의·중과실에 따른 허위 보도 시 피해액의 5배까지 배상토록 한다는 내용이다. 민주당은 법사위를 거치며 법안이 약화됐다고 하지만 ‘명백한 고의 중과실 추정’의 ‘명백한’과 ‘허위·조작 보도로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를 입은 경우’에서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를 입은 경우’를 삭제하는 등 언론 자유를 더 포괄적으로 위협하는 쪽으로 강화됐다. 특히 5배의 징벌적 손해배상은 언론사의 존폐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특히 지방 등 재무구조가 상대적으로 열악한 언론사에는 더욱 그렇다. 기자나 경영자 모두의 손발을 묶는 결과를 낳는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