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욱하게 안개가 낀 아침이었다. 강변을 눈앞에 둔 우리 집은 때때로 이런 짙은 안개가 새벽을 드리웠다. 출근 시간이 되었다. 나는 신발장 앞에 섰다. 여러 켤레의 구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 중의 하나를 골랐다. 유난히 사연 많은 구두였다. 그 많은 사연을 안고 나는 이 구두를 신고 이곳 저곳을 나다녔다. 그러나 나는 이 오래 된 구두를 버리지 못했다. 나는 숄더백을 메고 그 낡은 구두를 신었다. 마침 현관문에서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에 올 사람이 누굴까? 이 안개 짙은 아침에… 나는 의문을 품고 대문을 열었다. 허름한 늙고 깡마른 한 노인이 안개 속에 서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턱수염이 더부룩한 노인이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구두를 닦으러 왔소.” 노인은 의외로 당당하였다. 목소리에도 보이지 않는 힘이 서려 있었다. 나는 무엇에 끌린 듯이 노인을 집안으로 불러들였다. 마침 화단 앞에 간이의자가 보였다. 나는 그 의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기면 괜찮겠어요?” 노인은 말라비틀어진 얼굴에 은근한 눈초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비로소 안개 속으로 그 남루한…
Q. A조합은 재건축 조합으로, B건설사와 2015년경 공사도급계약을 체결하면서 ‘공사대금은 연면적을 기준으로 평당 450만 원의 비율로 산정하되, 착공일까지 물가변동이 있을 경우 금융물가지수 또는 건설공사비 지수인상률을 적용하여 공사계약금액을 조정한다’고 약정하였다. 그 후 사업시행변경인가가 예상보다 늦게 나 위 공사도급계약 체결일로부터 약 4년이 경과한 2019년 중반에 착공이 가능하게 되었고, 이에 A조합과 B건설사는 공사계약금액을 조정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금융물가지수와 건설공사비 지수인상률 중 어느 것을 적용할지에 관하여 극심한 입장대립이 있었다. A조합은 대의원회의 사전심의 없이 바로 임시총회를 개최하여 B건설사와의 공사도급계약 해지를 의결한 후 2019년 8월 1일쯤 B건설사에게 ‘공사도급계약을 해지한다’고 통보하였다. 참고로 A조합의 정관은 ‘대의원회는 총회에 부의되는 안건을 사전심의 한다’고 정하고 있고, A조합과 B건설사 사이에 작성된 공사도급계약서를 보면, ‘A조합은 계약 해지 사유가 판명된 경우 60일의 이행기간을 정해 B건설사에게 서면으로 이행할 것을 통보한 후 이 기간 내에 이행되지 않은 경우 계약 전부 또는 일부를 해지할 수…
오리 망아지 토끼 /백석 오리치를 놓으려 아배는 논으로 나려간 지 오래다/오리는 동비탈에 그림자를 떨어트리며 날어가고 나는 동말랭이에서 강아지처럼 아배를 부르며 울다가/시악이 나서는 등뒤 개울물에 아배의 신짝과 버선목과 대님오리를 모다 던져버린다//장날 아츰에 앞 행길로 엄지 따러 지나가는 망아지를 내라고 나는 조르면/아배는 행길을 향해서 크다란 소리로/매지야 오나라/매지야 오나라//새하려 가는 아배의 지게에 치워 나는 산으로 가며 토끼를 잡으리라고 생각한다/맞구멍난 토끼굴을 아배와 내가 막어서면 언제나 토끼새끼는 내 다리 아래로 달어났다/나는 서글퍼서 서글퍼서 울상을 한다. 아배는 아버지를 말한다. 매지는 망아지(말의 새끼)의 평북 방언이다. 이 시는 아버지와 유년의 생활들을 그리고 있는 시다. 동물들은 아이들의 놀이기구이자 친구와 같은 떨어질 수 없는 놀잇감 같은 거였다. 농촌생활의 풍경이 자연스럽다. 순박한 놀이가 그렇고 애틋한 사랑의 연계가 일어난다. 백석 시에서 특유한 시적긴장감과 가족이라는 것, 그리고 고향이라는 것, 삶의 연장선에서 가난하지만 정겹고 그리움들이 역설적으로 펼치고 있다. 아버지의 자애로움이 그리움들로 상기되는 때, 필자의 부친도 삶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 농단사건을 계기로 우리에게도 익숙해진 ‘탄핵(彈劾)’. 사전적 의미는 “보통의 파면 절차에 의한 파면이 곤란하거나 검찰 기관에 의한 소추(訴追)가 사실상 곤란한 대통령 등을 국회에서 소추하여 해임하거나 처벌하는 일”을 말한다. 법률적 탄핵제도는 그리스·로마시대를 시작으로 14세기 말 영국의 에드워드 3세 때에 확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영국에서 발달하여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대통령 등의 ‘권력남용’을 견제하는 특별한 제도로 정착되었지만, 정작 영국에서는 내각책임제의 확립으로 일찍이 없어졌다. 제도의 발전도 사실 미국에서 이루어졌다. 또 한국을 비롯 대통령제를 선택한 나라들 대부분 미국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대통령으로부터 견제와 균형을 이루는 장치의 하나로 사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미국의 역대 대통령 가운데 탄핵으로 물러난 대통령은 몇 명이나 될까? 결론부터 말하면 단 한명도 없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탄핵안이 제출된 대통령은 11명이나 된다. 첫 번째 공식 탄핵 절차는 1843년 전 타일러 대통령을 상대로 진행됐다. ‘독단적국정운영’이 이유였다. 이중 탄핵안이 개시된 대통령은 1868년 앤드루 존슨 대통령, 1974
한국 정치사에 험난한 시대의 국회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적이 한 두 번 아니다. 그러나 20대 국회도 이루 말할 수 없는 토론과 협상의 실종이라는 실종대표 국회정치라는 생각이 든다. 어느 정당을 편협되게 언급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타협이나 협상을 뒤로한 한국당과 황교안대표는 오로지 보수결집을 위해 밖으로만 도는 것 같다. 장관 한명의 임명에 반대하여 야당대표가 삭발하는 초유의 사태도 일어났다. 여당 역시 타협과 협상의 기지를 발휘하여 흩어진 민심의 통합된 협심과 경제 주체들이 활발하게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것이 급선무인데도 그렇지 못하다. 분양가상한제로 공급 자체를 막아버렸으며 교육부는 외고 자사고 폐지 방침으로 강남 부동산을 또 한 번 광풍으로 밀어 넣었다. 개인과 공동체 모두에게 결코 이념도 이익도 공감도 주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보수는 주로 공동체의 자유와 선택을 중시한다. 그것은 시민에게 자유를 줄 때 국가의 제도가 물 흐르듯이 흘러간다. 그리고 선택이 있을 때 비로소 인간의 삶이 가치를 향유할 수 있다. 진보는 개인의 공평과 평등을 좋아한다. 그것은 자유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불평등이 생긴다. 그 불평등을 해소하자
여백 /김청미 이건 당최 뭔 말인지 모르것고 요건 설명이 장황혀서 없는 것 같은디 아이고 참말로 차라리 일을 하고 말제 뭣헐라고 이런 것을 한다고 날밤 꼬박 샘서 쓰고 지우고 그라다 보믄 생기는 것이 맞긴 헌 거여 읽고 나서 가슴이 찡함서 무릎을 탁 치게 하는 그것이 니가 보기에 있는 것 같냐? -시집 ‘청미 처방전’ / 천년의 시작·2019 시인이 시를 쓰는 이유는 시인의 수만큼 각양각색일 것이다. 한 번에 주루룩 써내는 시인이 있는가 하면 몇 달, 몇 년을 고심하면서 한 편을 퇴고하는 시인도 있고 왜 그렇게 어려운 걸 죽을 때까지 놓지 못하고 하느냐고 하면 이유는 없고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서 쓴다고 답하는 시인이 많다. 나는 시인을 천형을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늘이 시인에게 내린 형벌, 죽을 때까지 네가 보고 말해야 하는 것을 세상에 써서 내놓으라고 낙인을 찍어버린 사람. 그러니 시를 써서 무엇이 생기지 않아도, 밤을 꼬박 새우면서 써 봐도 그 다음날 바로 찢어버린다 해도, 그 무릎을 탁 치게 하는 한 편을 위해 쓰고 또 쓸 수밖에 없다. 니가 보기에 있는 것 같냐? 네, 그 한 편을 위해 오늘도 쓸 수밖에…
장사의 속성은 이윤을 남기는 것이니 모조품을 파는 행태를 탓할 수 만은 없다. 문제는 모조품을 정품인 것처럼 속여서 파는 부도덕한 상행위에 있다. 정품과 모조품의 가격차이만큼 발생하는 부당이익을 취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도 이해할 여지는 있다. 모조품을 정품으로 (잘못)알고 판매하는 경우다. 그러나 알면서도 정품으로 속여서 장사하는 경우는 다르다. 게다가 처음부터 작정했다면 엄벌에 처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 몰염치범들이 경기도 공정특별사법경찰단(공특사경)에 의해 무더기로 적발됐다. 김영수 도 공특사경 단장이 19일 발표한 ‘위조상품 유통·판매 기획수사’ 결과를 보면 상행위에서 후안무치(厚顔無恥)의 전형을 보는 것 같아 속이 쓰리다. 김 단장은 이날 “해외로부터 불법으로 밀수한 15억 원 상당의 모조품 유통·판매업자 12명을 검거했다”고 밝혔다. 이 가운데 1명은 검찰로 송치했고 나머지도 수사를 마무리하는 대로 검찰에 넘기기로 했다. 이들은 당연히 통관절차를 거치지 않았고 정식 상표 등록도 하지 않았다. 법은 안중에도 없었다. 이번에도 공특사경의 치밀한 기획수사가 돋보였다. ‘역시’라는 칭찬을 들어 마땅하다. 공특사경은 지난 9월부터 3개월 동안 명품감별 전문
웹툰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웹툰은 인터넷을 의미하는 ‘웹(web)’, 만화 ‘카툰(cartoon)’의 합성어다. 지금 전세계에 웹툰 열풍이 불고 있는데 그 진원지는 바로 우리나라다. 우리나라 웹툰은 K팝, K드라마 못지않은 한류열풍을 일으키며 인기를 누리고 있다. 실제로 네이버 웹툰의 경우 올해 전 세계 월간 순 방문자 수(MAU)에서 6천만명을 돌파했다고 한다. 이 많은 사람들이 한 달에 한번 이상 네이버웹툰 앱에 접속했다는 것이다. 전 세계 국가 중 구글플레이 만화 분야 매출 기준 1위다. 특히 동남아시아에서의 성장은 놀랍다. 네이버 웹툰은 태국과 인도네시아에서 현재 각각 1천680만명과 2천770만명의 가입자를 거느리고 있다고 한다. 국내 시장 역시 마찬가지다. 2013년에는 1천500억 원이었던 시장 규모는 지난해 8천800억 원으로 6배 정도 커졌다. 세계 시장의 성장률도 놀라울 정도다. 이에 정부는 세계 웹툰 시장을 겨냥, 웹툰 인력 양성과 창작, 전시사업 등을 할 수 있는 기반시설을 마련하고 있다. 현재 전국 광역시·도에는 웹툰캠퍼스(6곳)와 웹툰창작체험관(37곳)이 조성돼 있는데 오는 2023년까지 각각 15곳과 50곳으로 늘릴 예정이라고…
우리는 일생을 전진한다, / 내내 앞만 바라보고, / 뒤에 있는 것은 두려워 알려하지 않는다. 우린 모두 이름 없는 자들, / 우린 말이라 불릴 뿐이지. 울지도 마라, / 웃지도 마라, / 침묵을 지켜라, / 듣기만 해라, / 주는 대로 먹어라, / 명령하는 대로 가라, / 그런데 우린 누구 하나 똑똑하지 못하다. 왕의 말이었던 자는 / 고위직을 차지하고, / 공주의 말이었던 자는 / 황금 안장에 앉고, 농부의 말이었던 자는 / 지푸라기 안장에 앉았지. / 그들에게 불복했던 자는 / 항시 밖에서 잠잤지. 그러나 인간과 더불어 우리는 말로 남으리! (“Horses” 「말들」 전문) 21행의 위 시는 1990년 당시 알바니아의 공산주의를 고발하는 시이다. 무명의 25세 청년 시인 잭 마리나이(Gjeke Marinaj)가 발표하여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하였을 뿐 아니라 이 때문에 당국의 감시를 피해 국경을 넘어 미국 시민이 된 역사적 사건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이미 40여개의 언어로 번역되어 폭넓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으며 발칸에 대한 깊은 관심의 반영인 평화와 인류애에 기반한 그의 독보적인 이론 ‘프로토니즘’은 그를…
조선 정조에 의해 간행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는 4권 4책의 한문본과 1책의 언해본으로 구성돼 있는데 24가지 전투기술을 중심으로 한 실전 훈련서이다. 현대 스포츠가 고대의 전쟁과 전투에서 출발한 것을 감안하면, 이 책의 24가지 전투 기술이 오늘날 무도 경기 종목의 원류임은 새삼스럽지 않다. 이 책의 편찬을 총괄했던 백동수에 관해서는 만화 ‘야뇌(野?=주릴 뇌) 백동수’나 드라마‘무사 백동수’를 통해 일반인에게 알려지고 따라서 ‘무예도보통지’도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물론 픽션을 가미한 흥미 위주의 드라마이다 보니 백동수에 관한 사실이 상당 부분 왜곡된 것도 있다. 백동수는 무신(武臣)으로 당대 최고의 무예 고수일 뿐 아니라 실학자인 이덕무, 박제가, 박지원, 도화원 화가 김홍도 등과 절친한 친구였으며 이덕무가 자신의 글에 대한 평을 그에게 부탁할 만큼 문무를 겸비한 선비였다. ‘무예도보통지’는 백동수가 총괄하고 규장각 검서관 이덕무와 박제가가 공동으로 편찬한 것으로 돼있으나, 이들 외에도 도화원 화원들이 대거 동원됐고 실질적으로는 정조가 직접 총괄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이 책에는 492판의 그림이 나오는데 그 공격 자세와 품세가 모두 백동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