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3.03 (화)

  • 구름많음동두천 9.3℃
  • 흐림강릉 2.8℃
  • 맑음서울 11.6℃
  • 구름많음대전 11.7℃
  • 구름많음대구 10.9℃
  • 구름많음울산 7.7℃
  • 구름많음광주 14.8℃
  • 맑음부산 11.4℃
  • 맑음고창 12.8℃
  • 흐림제주 11.6℃
  • 맑음강화 8.6℃
  • 구름많음보은 10.9℃
  • 맑음금산 11.4℃
  • 흐림강진군 12.3℃
  • 구름많음경주시 9.2℃
  • 흐림거제 10.3℃
기상청 제공

제 작년 언제쯤이던가. 추웠던 기억이 있다. 정확한 날짜가 기억나지 않는다. 겨울이 깊어가는 길목의 어느 언저리쯤이었다. 하늘 높이 솟아 있는 숱한 참나무들을 뒤로 하고 합천 해인사 앞에 서 있었다. 반듯하게 잘 닦여진 길 끝에 해인사의 심처로 들어가는 문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 사찰 밖의 참나무들 곁에 서서 바라보니 문 안에 문이 있고 그 문 안에 또 문이 있는 형국이었다. 그 문으로 들어가 사찰을 돌아보고 나올 때는 어스름 내린 저녁 무렵이었다.
날씨가 추웠기 때문이었을까. 산 중의 저녁이 서둘러 오기 때문일까. 잠시 전까지만 해도 몰려다니며 소란을 피우던 관광객들도 학생들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저녁 어스름 아래서 주변은 고요하다. 산사는 고즈넉하다. 그 고즈넉함을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잠시 내가 나 아닌 다른 이들의 생으로 다녀 온 듯하다.
밖에서 바라보았던 것처럼 안에서도 바라본다. 문 밖을 내다본다. 안에서 보아도 문 밖에 문이 있다. 문 밖에 문이 있고 그 문 밖에 또 문이 있다. 문안에 또 다른 문이 있고, 그 안에 또 다른 문이 있다. 문들이 줄지어 서 있는 듯하다. ‘산 중에 수많은 길이 있지만 부처님께 오는 길은 오직 이 길 뿐이에요’하고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어쩌면 저렇게 반듯이 닦아 놓았을까. 그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기도 하다. 신비롭기까지 하다. 마음에 전율이 일 정도로 모습 또한 단아하다. 참 재주도 용하구나. 어쩌면 저렇게 단정하게 문 안에 문을 세웠을까.
산중에 찾아온 저녁 어스름 안으로 어둠이 들어온다. 어둠이 드리운다. 어둠 속에서 곧게 뻗은 참나무들이 오랜 동안 세월의 풍상을 견딘 장승처럼 보인다.
산중에 드리운 어둠 속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긴다.
숲 사이로 길이 나있다. 숲 사이로 난 그 길을 따라 그저 걸어가면 되는 것이다. 길을 따라 걸어가면 가고자 하는 곳으로 갈 수 있는 것을 때로 다른 길이라도 있는 것처럼 애써 길을 찾을 때가 있다. 바보 같은 짓이다. 숲과 숲 사이로 오롯이 놓여 있는 길을 따라 걸으면 되는 것이다. 나무들의 수런거리는 이야기들을 들으며 나무와 나무 사이로 수줍은 듯 드러나 있는 길을 따라 걸어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맞닿아 있는 길과 길을 따라 걸어가면 제 삶의 길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제 삶의 길을 만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 걸어가면 되는 것이다. 마음 기울여 제 삶의 소리를 들으며 걸어가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제 삶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문 안에 문이 있는 해인사의 문을 지나듯 그렇게 간단할 수는 없는 일이다. 길 안에 길을 품고 있는 산 중의 길을 지나듯 그렇게 손쉬울 수는 없는 일이다. 부처님께 이르는 해인사의 문이야 몇 개만 지나면 되는 일이고 끊임없이 이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산중의 길도 끝을 드러내기 마련이지만 삶의 길이야 그렇지 않다. 삶의 길은 끝없이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삶의 길은 길을 따라 걷는 것이 아니다.
삶의 길은 마음을 따라 걷는 것이다.
삶은 마음 길이다. 삶은 마음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걷는 것이다.
그리움을 품고 있는 삶이 그리움을 만나듯이 말이다.
그리워하지 않는 것을 어찌 만날 수 있단 말인가.
사랑을 품고 있는 삶이 사랑을 만나듯이 말이다.
사랑하지 않는 것을 어찌 만날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이 무엇을 만났는지도 느끼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 만날 수 있겠는가 말이다.
바라 볼 수 있는 제 삶이 없는 것을 무엇을 통해 바라보고 만나겠는가 말이다.
산을 마음에 품은 자가 산을 만나듯이 제 삶을 품은 자들만이 제 삶을 온전히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네 삶이라고 다른 이들이 가르쳐준 삶이 아니라 제가 느끼는 제 삶을 온전히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네 생각이어야만 한다고 세상이 넣어준 생각이 아니라 제 마음으로 느끼는 제 생각을 온전히 지니게 되는 것이다.
어수선하고 복잡한 도시의 한가운데를 지나며 여러 해 전 산중의 일을 기억한다.
그날은 바람이 많이 불었다. 미처 제 갈 곳으로 가지 못한 마른 낙엽들이 바람을 타고 날아오르며 내 앞에서 춤을 추었다. 저물어가는 저녁 해의 기운 때문인가.
그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가슴이 시리도록 아름다웠다.
그래서 눈물이 났던가.


최창남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