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 온다. 하늘이 희뿌옇게 밝아오고 있다. 마치 눈 내리기 직전의 저녁 하늘같다. 어둠속에 묻혀있던 것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어둠 속에서 불쑥 걸어 나온 듯하다. 소나무, 전나무, 굴참나무, 졸참나무, 상수리나무이다. 그 외에도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무들이 보인다. 나란히 혹은 줄지어 서있다.
지난 밤 모두들 잘 지냈는가.
인적 끊겨 잡풀만 무성한 산길에서 손을 만난 듯 반갑다. 길 잃고 서성이다가 지나는 이들을 만난 듯 반갑다. 일제히 나무들이 빈 가지를 흔든다. 바람이 분다.
흔들리는 빈 가지에서 수많은 소리가 들려온다.
가을 어스름 인적 드문 산길에서나 들릴 법한 바람에 쓸려가는 낙엽 소리도 들려오고 저 멀리 아득한 곳으로부터 파도소리도 들려온다. 깊은 가을 어스름 집 앞 마당을 구르던 마른 나뭇잎들이 부서지는 소리도 들려오고 저 멀리 아득한 곳으로부터 북소리도 들려온다. 그 소리들이 유년 시절 오랜 동안 내 곁을 떠나 있다 돌아와 반가움에 나를 부르던 엄마의 목소리 같기도 하고 내 곁을 완전히 떠나시기 직전 내게 남겨주시던 마지막 목소리처럼 들려오기도 한다. 그 소리들이 변치 말자던 청년 시절 벗들의 목소리처럼 들려오기도 하고 세월이 지난 후 사는 것이 다 그런 것이니 이해해 달라며 떠나던 이들의 목소리처럼 들려오기도 한다. 어디 그 뿐인가. 그 소리들이 아주 오래 전 어린 시절 이제 사랑하지 말자던 이별의 소리처럼 들려오기도 하고 수 십 년의 세월을 지나 다시 만난 사랑으로 인한 가슴 절절한 탄성으로, 기쁨의 환호성으로 들리기도 한다. 그 사이사이로 나무들의 인사말도 들려온다.
안녕하세요. 지난 밤 잘 주무셨어요. 반가워요.
반가운 마음에 나도 나무들처럼 빈손을 흔들며 마주한다.
안녕. 지난 밤 별 일 없었지. 고맙구나.
나무들이 빈 가지들을 더욱 세차게 흔든다. 그 모습이 마치 환하게 웃는 듯도 하고 우는 듯도 하다. 손 짓 몸 짓 요란하게 흔들어 대며 수다를 떠는 목욕탕 집 여인네를 닮은 듯도 하다. 하고 싶었던 말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하지 못했던 말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제 마음에 쌓아 놓았던 말들을 쏟아 놓는다. 지난 세월 가슴에 켜켜이 쌓아 두기만 했던 말들을 바람에 쏟아 놓는다. 지난 밤 쌓아 두었던 짧은 이야기들도 은근슬쩍 내려놓는다.
수많은 마음의 말들이 들려온다. 나무들의 말이다.
그래요, 이제는 정말 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요?
그래요, 이제는 정말 제 마음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들을 수 있어요? 그 소리를 듣고 그 길을 따라 살아갈 수 있어요? 당신 자신은 알지도 못하는, 세상이 정해 준 삶의 가치와 목표를 따라 살아가는 삶을 이제는 그만두실 수 있나요?
그래요, 이제는 정말 행복할 수 있어요? 제 삶 하나도 행복하게 하지 못하면서 다른 이들의 삶을 행복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어리석은 생각에서 이제는 벗어 나셨나요? 나 하나만 참으면 모두가 행복할거라는 어이없는 생각에서 이제는 자유로워 지셨어요?
그래요, 이제는 정말 사랑할 수 있어요? 제 욕심으로 인해 사랑을 잃지 않을 자신이 있으세요? 사랑을 사랑 그 자체로 소중하게 품어 안을 수 있어요?
수많은 마음의 말들이 들려온다.
내 마음의 말들이 들려온다. 나무들이 일깨워준 내 마음의 말들이 들려온다. 나무들의 말을 들으며 내 마음이 거기 있음을 깨닫는다. 지난 밤 내내, 지난 세월 내내 마음은 그 자리에서 나를 향해 끊임없이 말하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오랜 세월 깊고 깊은 아픔으로 인해 잊으려고 했고 잊고 지냈던 마음이다. 그 마음을 듣는다.
수많은 날들이 지나고 이제야 내 마음의 말을 듣는다.
신념이나 목표, 오만이나 욕망, 아픔이나 절망, 슬픔이나 회한 등으로 인해 잃어 버렸던 마음을 다시 만난다.
‘사사사사사-’
‘타타타타타-’
창 밖에는 여전히 빈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린다. 아직도 못 다한 이야기들이 많은가 보다. 남아 있는 이야기들이 많은가 보다.
눈이 내린다. 어둠이 물러난 지도 한참 되었건만 밝아오지 않더니 눈이 내린다. 한 발 두 발 점점이 내려온다. 바람을 타고 흔들리듯 춤을 추며 천천히 내려온다. 소나무 위로도 전나무 위로도 굴참나무 갈참나무 상수리나무 위로도 눈이 내린다.
그들도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은 모양이다.
내 마음으로도 눈이 내린다.
새 두 마리 지나간다.
최창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