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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링필드와 ‘역사의 복수’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앙코르 와트가 올해를 마지막으로 개방이 중단된답니다. 그 동안 저희 고려사 팀 답사에 자주 참여하지 못하셨으니 이번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비용은 우리가 글 써서 쌓아둔 것에서 절반을 지원합니다”
작년 하반기 출신 학교의 고려사 팀 간사가 불쑥 한 통의 전화를 걸어왔다. 그랬다. 그것뿐이었다. 보기 어려운 진기한 곳이고, 어렵게 공부하는 후배 연구자들에게 따뜻한 말 한 마디 건네지 못하고 지내는 미안함을 덜어볼 속셈 그리고 절반 비용. 아무런 준비 없이 캄보디아, 베트남 답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우리의 답사 코스는 베트남 남부 호치민시(구 사이공)를 경유하여 캄보디아 씨엠립에서 앙코르 와트를 답사한 뒤, 다시 베트남 하노이, 하롱베이를 돌아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 일행이 씨엠립에 도착하여 숙소에서 짐을 풀고 한참 술판을 벌이려고 벼르고 있을 때, 낯익은 출신학교 근대사 교수가 찾아왔다는 전갈이 왔다.
이 객지에서 한편 반가우면서도 어쩐 일로 왔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우리 팀의 인솔자인 지도교수와 절친한 동료 교수인데, 한일 역사교과서 공동위원회 한국 측 대표로 일행을 이끌고 베트남을 거쳐 이곳에 도착했다고 하였다. 사연인즉, 평소 당뇨병으로 고생을 하고 있었는데, 출국을 서두르다가 약을 깜빡 잊고 온 것을 알고, 국제 장거리 전화를 통하여 마침 뒤따라 이 지역을 방문하려던 우리 지도교수에게 그 배달을 부탁하였다는 것이다. 이 일정을 맞추기 위하여 애당초 베트남을 먼저 답사하고 캄보디아로 오게 되어 있던 우리 답사 코스가 뒤바뀌었다는 사실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개인적 관계가 공식 일정을 바꾸어놓았으니 기분이 개운할 리는 없지 않겠는가? 도대체 한일 근대 역사교과서를 쓰는 데 캄보디아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더구나 우리는 목매단 회사에 금쪽같은 휴가를 내어 사비로 왔는데, 국고로 이 무슨 명목의 관광이란 말인가? 그들의 설명은 일본과 한국 사이의 제국주의와 식민지 경험을 이 동남아시아 두 국가가 공통적으로 안고 있어서 그 비교 연구 차 왔다는 것이었다. 아무런 준비 없이 온 나보다는 명분이 있어서 부끄러운 마음으로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정작 답사를 해 나가면서, 앙코르 왕국이 우리 일행의 전공 시기인 고려 왕조와 시기적으로 겹치며,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여러 식민지를 경영한 최대의 중세 제국이었음을 알고, 내 부끄러움은 미안함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더구나 내 직업의 소재가 전통문화유산이니 그 위에 직무유기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책임감까지 더해졌다.
나아가 폴 포트 정권의 크메르 루즈에 의해 자행되었다고 막연히 알고 있었던 킬링필드가 사실은 미국 식민지 지배에서 일차적으로 저질러졌고, 그 동기가 부여된 폴 포트 정권에 의해서는 2차적으로 내전의 형태로 진행되었다는 것을 알고, 역사학 관련 박사로서의 학문적 자존심마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씨엠립을 떠나오기 전날 밤 다운타운에 나가 거리의 이동식 책 가게에서 폴 포트 전기를 골랐는데, 그 주인은 그를 존경한다며 아주 자랑스럽게 나에게 소개하였다.
또 일설에 의하면 폴포트가 아유타야 왕국에게 철저하게 짓밟혀 망가졌던 앙코르 왕국의 후예이며, 근년의 킬링필드가 지금 캄보디아의 다수를 이루고 있는 당시 침략자 아유타야 종족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이루어졌다고 하니, 그 진위는 차치하고라도 ‘역사의 복수’가 정말 그렇게 가혹한 것인가 하는 섬찟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아들을 숨겼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밥퍼온 사원을 소개하면서 가이드가 들려준 전설은 거대 제국의 멸망이 내부에서 그것도 왕 부자 사이의 균열에서 초래되었다는 교훈적 사례를 하나 더 보태주었다. 왕자가 장차 나라에 큰 화를 끼칠 것이라고 예언한 승려를 칼로 처형한 왕이 악몽에 시달리자 사연을 알게 된 왕비가 그 왕자를 이 사원에 숨겼는데, 그는 뒤에 이웃 나라 아유타야 국으로 보내져 거지 행세를 하다가 그 나라 공주의 눈에 띄어 장군으로 발탁되고 급기야 앙코르 왕국 정벌의 선봉이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 미국과 쏘련의 간섭에 의한 한반도의 분단, 그리고 한국전쟁으로 이어져 온 우리 근현대사를 일본과 한국이 공동으로 써보고자 했던 그 위원회에서 베트남과 함께 캄보디아를 그들의 비교 연구 대상으로 삼아 답사했던 그 큰 뜻을 조금이라도 이해했는지 모르겠다. 아마 그들도 현지답사를 통해 진실에 좀 더 접근하고는 예상했던 것보다 엄청난 사실을 발견하고 내심 놀라지 않았을까 추측하며 미안한 마음을 조금 덜어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윤 한 택 <경기문화재단 전통문화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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