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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포럼]부모님은 왜 정물화를 좋아하셨을까

미술은 관념이 아닌 일상 자신이 희망하는 삶 자체
‘식탁그림’ 정물화 재인식 중산층 꿈 이미지 대변

 

아버지는 빈 벽을 그냥 놔두지 못하셨다. 그 분은 늘 무언가를 열심히 걸었다. 달력뿐 아니라 좋은 사진이나 그림이라고 생각하신 것들을 싸구려 액자에 담아 걸고 보시는 것을 그만큼 좋아하셨다. 아름다운 풍경이나 화사한 정물화가 담긴 사진이미지들이다. 대개 신문이자 잡지에 실린 사진이미지를 뜯어다 만든 액자들이다.

이름다운 그림이란 구원 같은 것인가 보다. 집 안에 멋있는 풍경이나 정물 그림을 걸어둔다고 하는 것은 일종의 보상심리이자 그림 속의 대상을 일상 안으로 수렴해 소유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전에 동양의 산수화나 서양이 풍경화란 것 역시 이상적인 자연풍경, 아름답고 환영적인 실제 자연을 내 것으로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 아래 발현된 것이다.

그 자연을 내 것으로 갖고 싶고 그 안을 소요하고 싶다는 욕망을 이미지로 실현한 것이라는 얘기다. 그래서 지금도 사람들은 그런 그림을 집 안에 걸어두고 싶어한다. 별반 아름답지 않고 다소 난해하고 보기에 불편한 현대미술이 외면당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혹 현대미술이라도 걸어두고 오래도록 보는데 지장이 없는, 없다고 여겨지는 작품들만이 미술시장에서 허용된다.

문득 부모님의 작은 집 거실을 보는 순간 예쁜 정물화나 풍경화 한 점을 구해드리지 못한 점이 못내 가슴 아팠다. 조악한 사진과 달력들이 가득 찬 벽을 바라보면서 말이다. 부모님은 백자항아리에 가득한 안개꽃 그림을 원하셨다. 이른바 정물화를 좋아하셨던 것이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 독립된 장르로 확립되었던 정물화는 당시 중산층의 삶의 존재감을 증거해 주었다. 자신들의 실내를 장식하며 쉽게 보고 즐길 수 있는 조그마한 정물화가 인기였다.

당시 네덜란드는 식민지 활동에 힘입어 유럽에서 지도적인 해상국가로 자리잡은 때였으며, 유럽의 금융중심지였다. 이완된 형태의 국가동맹(네덜란드공화국)체제였기에 다양한 종교가 보장되었으며 따라서 예술활동 역시 상당히 자율적인 분위기 속에서 행해졌다.

그래서 그림 역시 취향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자본 투자의 대상으로 인식되었다. 그리하여 도시 귀족이나 예술후원자만이 아니라 농민이나 수공업자 역시 그림을 보고 즐기며 수장하였다. 그 당시 정물화는 ‘식탁그림’을 지칭하는 용어였다고 한다. 식탁 위에 다양한 사물들이 배치되어 있는 것을 그린 그림이라는 얘기다.

식탁이란 인간 삶에서 기본적인 먹거리가 놓여지는 생존의 공간이다. 그곳에 올려지는 것은 삶을 영위하는데 결정적으로 필요한 것들이다. 식탁이라는 받침대, 좌대 위에 올려진 음식 내지 장식적인 사물들이 미술의 주제가 되고 인물이나 역사화와 같은 차원에서 그 존재성을 부여받게 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먹고 사는 것이 종교나 신화보다 더 중요해진 삶이 되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비로소 인간 삶을 규정짓는 틀이 자본주의적 세계관으로 전환하는 분기점에 등장한 것이 다름 아닌 정물화였던 것이다.

사소한 사물들이 놓여진 식탁과 비근한 일상적 삶의 공간이 그림의 소재가 되고 여기에 의미가 부여되었다는 것은 미술이 그만큼 일상적인 삶의 지평으로 내려앉았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이제 미술은 더 이상 신화나 종교, 관념적 차원의 정해진 소재를 강제 받던 데서 벗어나 자신의 주변 세계, 일상적 삶을 이루는 사물들을 관심 있게 들여다보고 여기에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 같은 인식의 전환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정물화의 등장이다. 나는 그러한 정물화의 의미를 새삼 반추해본다.

한국 미술사에서 그 같은 정물화는 60년대 이후 지금까지도 중산층 이상의 삶을 꿈꾸는 이들이 원하던 이미지로서 자리하고 있다. 부모님이 원하시는 아름답고 화사한 정물화는 결국 자신들의 남루하고 비근한 일상에서 간절히 원하던 안락하고 풍요로운 삶의 이미지였을 것이다. 나는 그러한 부모님의 생의 욕망에 대해 너무 무지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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