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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에세이]나뭇잎이 전해준 이야기

 

숲은 낙엽들로 가득했다. 한 해도 되지 않는 짧은 삶을 살다간 나뭇잎들로 숲길은 가득했다. 주어진 삶 온전히 살아간 후에 지난 가을 몸 기대어 살아가던 나무에게서 떨어져 내린 나뭇잎들이다.

 

발갛게 물든 나뭇잎도 있고 노랗게 물든 나뭇잎도 있다. 잿빛으로 물든 나뭇잎도 있다. 지금은 잿빛이 되었지만 지난 가을에는 햇살을 받을 때마다 은빛으로 빛나며 보는 이들을 설레게 했던 나뭇잎이다. 나뭇잎들은 살아온 제 삶을 따라 물들어 있다.

 

잊을 수 없는 애절한 그리움을 품고 살아온 잎들은 발갛게 물들었고 깊은 사랑을 노래하던 잎들은 샛노랗게 물들었다. 마음에 고이 품어 둔 이야기가 많은 나뭇잎들은 은빛으로 물들었다.

지나간 시간들 때문일까. 유난히 모질고 추웠던 겨울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제 삶에 대한 회한 때문이었을까. 나뭇잎들은 모두 잿빛에 가깝게 변해 있었다.

나무 곁에 쪼그리고 앉아 제 삶을 온전히 살다간 나뭇잎들을 바라보았다. 지나온 여름과 가을 곁을 지나는 이들마다 따뜻하게 품어 주며 마음을 씻어주던 푸른 잎이 보였다.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 잎은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다. 바람을 따라 이리저리 흐르다 이곳까지 온 모양이다.

 

밤나무 가득한 이곳에 상수리나무 잎이 저 홀로 떨어져 있다. 가만히 주워들어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고개 기울여 바라보니 나뭇잎 여기저기에 이미 송송 구멍이 나 있었다. 질기고 단단하던 몸이었는데 지금은 온 몸에 크고 작은 구멍들이 나 있었다. 분해되고 있었다. 제가 왔던 곳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흙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또 다른 삶을 살아가기 위해 생명의 또 다른 과정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박테리아와 곰팡이들이 그들을 돕고 있었다. 다른 삶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그들의 몸을 분해하고 있었다.

나뭇잎도 박테리아도 곰팡이도 모두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나뭇잎의 크고 작은 구멍들에서도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다.

하기야 바람이 어디인들 가지 못할까.

바람을 따라 아직도 나뭇잎에 남아 있던 이야기들이 들려왔다. 제 몸 누렇게 변하고 크고 작은 구멍이 뚫려 분해되고 있는 이 순간에도 나뭇잎은 남 몰래 품고 있었던 마음의 이야기들을 전하고 있다.

사랑을 잃지 마세요. 다시는 사랑을 잃어버리지 마세요.

 

숲에서는 영원한 죽음이란 없지요. 죽음이란 생명의 다른 모습일 뿐이지요. 죽는다는 것은 생명의 다른 옷을 입기 위한 하나의 과정일 뿐이지요. 때로 영원한 죽음도 있지요. 영원히 다른 생명의 모습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영원한 죽음도 있지요. 사랑을 잃어버리면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되지요. 사랑을 잃는다는 것은 살아가야 할 마지막 숨결을 잃어버리는 것이니까요. 생명의 숨결을 잃는 것이지요. 그러니 사랑을 잃어버리지 마세요.

다- 시- 는-

사- 랑- 을-

잃- 어- 버- 리- 지- 마세요.

상수리나무의 잎이 제 가슴에 남겨두었던 말들이 바람을 타고 들려온다.

그렇겠지. 그렇겠지.

숲에서는 죽은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겠지. 산길을 구르는 마른 나뭇잎도 말라 죽은 나무들도 모두 살아 있는 것이겠지. 그들은 매 순간 다른 생명으로 살아나며 숲을 풍성하고 만들고 있는 것이겠지.

나는 바람에 내 마음도 함께 실어 보냈다.

잠시 물러섰던 구름이 다시 숲으로 밀려들었다. 구름은 빠른 속도로 숲을 감쌌다. 숲은 짙은 안개에 휩싸인 듯 했다. 모든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구름에 길을 잃어 숲에 갇힐까 저어됐다. 손바닥에 올려놓았던 상수리 나뭇잎을 공책에 얌전히 껴 넣었다. 길을 재촉했다.

 

길 앞 쪽에서 알 수 없는 기척이 들려왔다. 발걸음을 멈추고 귀 기울이며 바라보았다. 사슴이었다. 한 마리가 아니라 여러 마리였다. 사슴 여러 마리가 산길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저들도 구름에 길을 잃을까 저어하여 길을 서두르는 것일까. 앞 뒤 없는 생각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사슴이 산길에서 길을 잃을 리는 없는 일이다. 산이 제 집인 것을 말이다. 저 사슴도 죽으면 나뭇잎들처럼 분해되어 다른 생명으로 살아나겠지.

사람들처럼 사랑을 잃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나처럼 사랑을 잃고 긴 세월 세상에 갇혀 제 길 잃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구름은 점점 더 짙어졌다. 그 때문인지 사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멈추었다.

사슴이 밤나무 숲가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 같은 큰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름다운 눈이었다.

나도 사슴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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