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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에세이]숲길에 기대어

 

작년 가을 햇살을 받을 때마다 은빛으로 빛나며 출렁이던 나뭇잎들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산 아래 사람 사는 세상에서부터 차 올라와 산 정상까지 덮었던 눈이 녹아 내린지도 제법 오래건만 쉐난도(Shenandoah)의 숲은 아직 쓸쓸했다. 4월의 끝을 지나고 있건만 숲길은 아직 외로웠다. 빈 나뭇가지들만이 찬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움츠린 때문인지 나무들도 외로워 보였다. 아직도 이 숲을 떠나지 못한 채 그 곁에 머물러 있던 겨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는 빛바랜 겨울이 숲길 서성이며 아직은 지나는 이 없는 길을 지나고 있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하얀 얼굴이었다. 나도 바라보았다. 숲처럼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

나처럼 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지난 가을 온 산을 불태우듯 타오르던 나뭇잎들을 한 잎도 남겨두지 않고 거두어 간 이 겨울도 나처럼 여린 새싹 움트는 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제 갈 길로 떠나기 위해 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숲길을 따라 걷는다. 저만치 의자가 보인다. 지난 가을 오랜 동안 앉아 쉬었던 의자이다. 겨우 내내 찾은 이가 없는 듯 쓸쓸해 보인다. 낙엽조차 떨어져 있지 않다. 물끄러미 바라본다. 샛노란 은행잎들과 붉은 단풍잎들 떨어져 내리던 지난 가을 등 깊이 기대어 앉았던 내 모습이 아직도 거기 남아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떨어지는 나뭇잎들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아름다웠던 지나간 날들인 것처럼 넋 놓고 바라보던 내 모습이 그 곳에 그대로 남아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를 바라보며 ‘이제야 오느냐’고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바람이 홀로 숲길을 지키고 있던 빈 의자를 쓸고 지나갔다. 등받이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따스한 느낌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져 왔다. 지난 가을처럼 등 깊이 기대어 앉았다. 바람이 다시 불어 왔다. 바람에서 마른 나뭇잎 냄새가 났다. 바람도 외로운 모양이었다.

숲을 바라보았다. 완전히 밑둥치까지 파여 껍데기만 남아 있는 나무가 보였다. 둘레만 해도 두 아름은 족히 될 듯 보이는 큰 나무였다. 하지만 이제는 또 다른 삶을 살아가기 위해 제가 온 곳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흙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 곁 나뭇가지에 다람쥐 한 마리 앉아 도토리를 먹고 있다. 그것만이 제 할 일이라는 듯 열심히 먹고 있었다. 그것만이 아직도 봄을 맞지 못한 이 깊은 숲에 봄을 오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 이 숲에도 봄이 오겠지. 모든 것이 다 떠났으니 이제 이 숲에도 봄이 오겠지. 모든 것을 다 잃어 버렸으니 이제 이 숲에도 봄이 오겠지. 숲은 언제나 제가 지닌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잃어버림으로 새로워진다. 숲은 제가 품어 키운 제 것을 잃어버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싸워 지키려 하지 않는다. 잃어버린 것에 순응하며 변화한다. 잃어버려야 새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숲만이 아니다. 숲에 깃들어 사는 생명들은 모두 알고 있다. 풀도 나뭇잎도 꽃도 나무도 알고 있다. 다람쥐도 새도 사슴도 너구리들도 알고 있다.

오직 사람만이 모를 뿐이다. 사람만이 잃어버림의 의미를 모른다. 잃어버릴 줄 모른다. 두려워한다. 그래서 늘 싸운다.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싸우고 잃어버릴까 두려워 싸운다. 그 뿐인가. 잃어버릴 때를 대비하여 더 많이 가지기 위해 싸운다. 빼앗아 쌓아 놓는다. 싸우는 것 밖에 배운 적이 없는 탓이다. 싸우는 것 밖에 해 본 일이 없는 탓이다. 세상이 그런 것을 그들만을 탓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슬프기도 하다. 우리의 삶이 결코 새로워지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잃어버릴 줄 모르는 삶이 새로워질 리가 없기 때문이다.

바람이 불었는가. 나뭇가지 하나가 어깨 너머로 넘어왔다. 가지를 들여 본다. 곁에서 들여보니 길을 지날 때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가지마다 새싹들이 움트고 있다. 새싹들이 쑥쑥 움트고 있다. 봄이다. 봄은 이미 가지마다 차올라 있었다. 봄은 이미 골마다 스며들어 있었다. 숲은 봄기운으로 가득 차 있었다. 새 봄이 숲에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나는 다친 다리를 의자 위에 올려놓은 채 오랫동안 새 봄을 맞고 있는 숲을 바라보았다. 숲이 새로워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새 도토리를 다 먹은 다람쥐가 밑둥치만 남은 나무를 넘더니 숲으로 사라졌다.

길의 끝으로부터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봄 숲이 그리워 찾아 온 사람들이었다. 아이를 데리고 온 젊은 부부가 빈 나뭇가지만 무성한 숲길을 걸어오고 있었다. 내가 걸어온 길을 따라 오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내 앞을 지나 굽이친 길의 반대편 끝에 도달할 때까지 바라보았다. 나뭇가지 사이로 사라지기도 하고 나타나기도 하던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았다. 그들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길의 끝에 다다라 산허리를 돌아간 것인지 숲 속으로 들어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오랫동안 그들이 지나간 길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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