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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에세이]깊은 계곡을 따라 흐르며

 

다친 다리를 절며 찾아간 산은 이미 여름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 달 전만해도 나무들은 겨우 내내 움츠렸던 몸을 봄기운에 씻어내고 있었는데 봄은 벌써 지나고 있었다. 모질고 혹독했던 겨울 외로움과 두려움으로 견디며 기다려 맞이한 봄이건만 그 설렘을 지나는 이들과 나눌 사이도 없이 봄이 지나고 있었다.

 

나뭇잎들은 벌써 여린 모습을 벗고 푸르렀다. 내 인생의 지난 날들처럼 짧기 만한 봄에 마음 한 구석이 시려온다. 휑하니 바람이 지나는 듯하다. 짧은 날들이다. 짧은 봄이다. 고단한 삶 깊은 외로움에 마음 절이다 떠나보낸 사랑을 그리워하던 날들처럼 봄은 지나고 있었다.

 

설렘과 추억들이 깊은 회한으로 남아 눈물짓게 하던 순간처럼 봄은 지나고 있었다. 햇살에 스며들던 봄 숲에 내리던 새벽이슬처럼 미처 봄을 느낄 사이도 없이 그렇게 지나고 있었다.

숲은 여름으로 치닫고 나는 지팡이에 의지한 채 그 숲으로 들어갔다. 온 몸이 땀으로 젖어들었다. 숲 사이로 바람이 불어와 땀을 식혀 주었다. 바람을 타고 온 것일까. 골짜기를 흐르는 물소리가 들려왔다. 들려오는 물소리를 따라 나무들 사이로 난 작은 길로 들어섰다. 눈 여겨 보지 않았다면 잡풀 무성하여 찾을 수 없었던 길이었다.

 

흐르는 물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면 찾아들을 수 없는 길이었다. 물소리를 따라 들어서자 숲으로 들어서자 잡풀만 무성해져 길이 아니게 된 길이 거기 있었다. 길이란 그런 것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길이라고 할지라도 지나는 이들이 없으면 길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인생길처럼 말이다. 사랑이 떠난 인생길이란 이미 사람이 살아갈 길이 아니다. 그러 살아가는 것일 뿐이다.

 

 잡풀 무성하여 잊어진 길을 서성이고 있을 뿐이다. 잃어버린 길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었던가. 골짜기를 흐르는 물줄기는 때로 졸졸졸 흐르고 때로 콸콸 흐르며 여기 길이 있으니 길을 따라 오라고 말하고 있었다. 지팡이에 의지하여 절며 내려간 계곡에는 겨우 내내 깊은 땅 속을 지나온 맑은 물이 차고 넘치도록 흐르고 있었다. 지팡이를 바위에 기대 놓고 앉아 흐르는 물에 손을 담갔다.

 

찬 기운이 마음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다. 온 몸이 시려왔다. 그 시림은 내 영혼에 까지 이르렀다. 잠들어 있던 영혼을 일깨웠다. 온 몸이 저려왔다.

흐르는 물을 바라보았다. 고요히 흐르고 있었다. 앞서 흐르던 물도 뒤를 따르던 물도 서로 앞을 다투지 않고 어울려 하나 되어 흐르고 있었다.

 

그래 흐르는 물은 앞을 다투지 않는다. 나도 저렇게 흐를 수 있을까. 욕망과 탐욕으로 살기 가득한 이 세상에서 저렇게 다투지 않고 유유히 흘러갈 수 있을까.

재화든 사람이든 제가 소유하고 싶은 것을 가지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하는 이 세상에서 저 맑은 물처럼 다투지 않고 하나 되어 흐를 수 있을까.

자신이 얼마나 많은 생명들의 생명을 해치고 또한 깊은 상처를 주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가득한 이 세상에서 저렇게 아름답게 흘러갈 수 있을까. 제 생각과는 다른 것들은 모두 꺾고 찍어내는 것이 인생길을 살아가는 가장 훌륭한 지혜라고 믿고 있는 이들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저렇게 다투지 않고 함께 흘러갈 수 있을까. 함께 흘러가 이 숲의 모든 생명들을 살려낼 수 있을까. 깊은 상처를 입은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을까.

흐르는 물을 바라본다. 물길을 따라 많은 나무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소나무 전나무 붉은 가문비나무 그리고 여러 종류의 참나무들이 거기 있었다. 흰 참나무도 보이고 붉은 참나무도 보였다. 제법 키가 자란 고사리들과 여러 종류의 양치식물들도 있었다. 그뿐인가. 이름 모르는 수많은 풀들이 바람에 몸을 가벼이 흔들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거기 수많은 생명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수많은 생명들이 함께 살아가며 숲을 이루고 있었다. 그렇게 함께 어울려 숲을 이루며 수 천 년 수 만 년 아니 수 억 년을 살아오고 있었다. 때로 감당할 수 없는 지독한 해충과 무서운 질병이 숲을 덮쳤지만 숲은 아름다움과 깊음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숲이 한 종류의 풀, 한 종류의 나무, 한 종류의 생명으로 이루어졌다면 살아남지 못했으리라. 그러나 숲은 언제나 수많은 생명들로 이루어져 한 종류의 나무들만을 공격하는 해충과 질병의 공격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 숲에서 맑은 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깊은 계곡을 따라 흐르고 흐르며 산 아래 사람 사는 세상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욕망과 탐심으로 살기 가득한 세상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그래 그렇게 흐르고 흘러 세상에서 쫓겨난 외로운 이들의 마음을 위로해주렴. 그래 그렇게 흐르고 흘러 세상에서 제 생각에만 사로잡혀 살아가는 이들의 마음을 씻어주렴. 가서 흐르는 물처럼 살아가라고 말해주렴.

그 사이 하늘이 어두워졌는지 깊은 숲에 어둠이 깃든다. 빗방울이 떨어진다. 푸르러진 나뭇잎 사이로 빗방울이 떨어진다. 계곡을 흐르는 물줄기에도 빗방울이 떨어진다. 나는 비에 젖어 들며 오랫동안 깊은 계곡을 흐르는 물줄기를 바라보았다.

하늘도 땅도 숲도 나무들도 꽃들과 이름 모를 풀들도 빗방울도 바람도 그리고 나도 거기 함께 있어 함께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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