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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에세이]부용지를 지나며

 

참으로 많은 날들이 지났다. 깊고 깊은 시간의 강이 흐르고 흘러 십 대의 어린 소년이었던 나는 어느새 오십을 넘긴 초로의 나이가 되었다. 제 사랑을 마음에 품고 창덕궁 후원의 깊고 아름다웠던 숲을 걸었던 청년은 어느새 새까맣던 머리카락이 희어져 있었다. 세월의 무게처럼 내려앉은 흰 서리를 머리에 가득 인 채 돈화문을 마주 보고 있었다. 길고 길었던 세월의 강을 건너 아주 오래 전 지나왔던 그 시간들 앞에 다시 서 있는 듯하였다. 오래 전 그 날들로 다시 돌아간 듯싶었다.

삼십 년 가까운 세월 동안 마음으로만 걸었던 길이 문 안으로 보였다. 그 길이 나를 다시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는 걷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며 다짐했던 길이 다시 내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난하고 고단했던 삶을 따뜻하게 품어주던 숲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슴의 사랑 말없이 지켜보던 부용지(芙蓉池)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숲을 지나던 바람도 부용지에 가득하던 연잎들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잊으려고 애썼던 모든 것들이 거기 그대로 있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천천히 돈화문을 지났다.

오래 전 그 모습 그대로인가.

기억할 수 없다. 새로 단장을 했는지 예전의 모습 그대로인지 기억해 낼 수 없다. 묻고 싶은 마음을 바람에 흘려보내며 앞을 바라보니 커다란 나무들이 나를 맞는다.

그래 이 나무들이 있었지. 이렇게 큰 나무들이 있었지.

수령이 수 백 년이 되었다는 회화나무들이었다. 새로 단장을 한 듯 깨끗하고 단정하게 보이는 지붕과 담들과는 달리 이 나무들은 오래 전 모습 그대로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나도 나무를 바라보았다. 짧기만 한 삶에 무슨 말이 그리도 많이 남았는지 가슴은 터져 나갈 듯 출렁이고 있었다. 오래 전 이 길을 떠난 후 지나 온 삶의 날들 동안 내 가슴 깊이 젖어 들었던 수많은 느낌들이 되살아났다. 깊은 슬픔과 고통, 회한과 쓸쓸함, 분노와 좌절, 사랑과 열정, 혁명과 투신 그리고 잠 못 이루던 수많은 밤들에 대한 기억들이 다시 떠올랐다.

회화나무는 말이 없이 나를 지켜보며 어서 가라고 길을 재촉했다. 때마침 바람이 불어와 내 등을 떠밀었다. 나는 지팡이에 의지한 채 내 앞에 놓인 길을 따라 갔다. 나무들 내게 수런거리며 살아가는 일의 놀라움을 말해주던 후원 숲으로 난 길을 따라 걸었다. 부용지의 연잎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사랑을 잃지 말라고 속삭이던 바람이 머물고 있는 후원 깊은 숲에 닿아 있는 길을 따라 걸었다.

햇살은 뜨거웠다. 평일인데도 창덕궁을 찾은 이들이 적지 않았다.

저들 중에도 나처럼 수 십 년 만에 다시 찾아 온 이들이 있을까. 잃어버린 제 삶의 흔적을 찾아 길을 나선 이들이 있을까. 다친 마음 추스르며 길을 걷고 있는 이들이 있을까. 잃었던 제 삶 다시 만나며 눈물 흘리고 있는 이들이 있을까.

아름다운 연못이 보인다. 연잎 아름답게 떠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부용지였다. 바람만 머물고 있던 부용지에 앉아 제 사랑을 느끼던 젊은 날의 내가 그대로 앉아 있는 듯했다. 아니 젊은 날의 나처럼 젊은이들이 앉아 있었다.

나도 저런 모습이었을까. 나도 저들처럼 저렇게 앉아 있었을까.

부용지 곁에 오래도록 서 있었다. 오래 전 그날처럼 숲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왔다.

숲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걸었다. 숲은 이미 여름이 깊어지고 있었다. 조금 가파른 길을 따라 오르자 옥류천에 닿아 있는 길이 보였다. 길은 지난 가을 떨어져 내린 낙엽으로 가득했다. 낙엽들은 바싹 말라 있었다. 밟을 때마다 바스락 하고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그 소리가 마른 잎 바람에 떨어지며 나뭇가지에 부딪히는 소리 같았다. 지나 온 삶이 못내 아쉽고 아쉬워 안쓰럽게 뱉어내는 짧은 한숨 소리 같았다. 깊은 아픔에 내어 지르지 못한 비명 소리 같았다.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허리를 구부려 낙엽을 만지니 그저 부서져 내렸다.

지나온 내 삶의 시간들처럼 부셔져 내렸다. 지난 삶의 잔해들이 내 앞에 놓여 있었다. 그 길의 끝에 수 천 년을 사는 주목나무가 있었다. 옥류천이라는 아름다운 이름 때문이었을까. 지난 세월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을까. 여러 그루의 주목나무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그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주목나무를 남겨 두고 나선 길의 굽이에 나무 의자가 놓여 있었다. 몸 기대어 다리를 쉬었다. 깊어진 여름 숲에서부터 어스름이 깃들기 시작했다. 저녁은 내게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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