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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희칼럼]외국 기자들이 본 ‘6월 항쟁’ 전후의 서울

한국 민주화에 기여한 수많은 외국 언론인들
어려운 시절 함께 이긴 고마움 결코 잊지 못할 것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6월 민주항쟁 20년 기념행사의 하나로 지난 8일부터 이틀 동안 서울에서 국제 언론인 세미나를 열었다.

이 행사에는 20년 전, 서울에서 특파원 생활을 했던 여러 나라 기자 25명이 초청되었다. 지금 그들의 대부분은 현역에서 은퇴했다. 그들은 20년 동안 한국이 너무 달라진데 대해 한결같이 경탄했다. 지면 관계상 몇 사람의 이야기를 요약한다.

▲지정남(전 LA타임스·재미 동포) - “1987년 6월 17일, 시청 앞에서 이 한열 군의 장례식이 열렸다. 조선호텔 룸에서 기사를 작성 중인데 맞은 편 성공회 종루에 달린 스피커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가 보니 어떤 사무실에 성공회 신부 여럿이 모여 있었다. 이들은 바로 얼마 전 시위학생 몇 명을 숨겨주었는데 경찰이 이를 알고 학생이 숨은 방을 습격한 것이다. 신부들은 경찰을 그곳으로 안내한 자를 붙잡았다. 그 젊은이는 방독면을 썼고 LA타임스 기자 완장을 두르고 있었다. 나는 동료 외신 기자와 함께 그를 추궁했다.

그는 1982년 마약 판매 사건으로 경찰에 체포당한 뒤부터 경찰 첩자 노릇을 했다고 자백했다. 1991년 김영삼의 측근인 서 아무개가 강원지역 보궐선거에 출마했다가 자신의 참모가 폭로한 부패 혐의로 도중하차한 사건이 있었다. 그 폭로자가 바로 그 때의 가짜기자 전대월이었다”

▲브루스 더닝(전 CBS) - “1974년 8월 15일, 장충동 국립극장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박 대통령 부인 육 영수 여사가 어떤 한국인에 의해 피격 사망했다. 우리는 당시 상황을 촬영했으나 정부가 필름을 압수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는 사전 검열을 받지 않은 필름은 해외 반출이 금지돼 있었다. 프로듀서와 나는 강당을 재빨리 빠져 나와 공항으로 직행했다. 우리는 무사히 한국을 떠날 수 있었다”

▲오노다 아키히로(전 교도통신) - “유신체제 반대 항의는 휴일에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3.1독립선언 기념일’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나는 이날 언덕 위에 있는 어떤 목사님 집(고 문 익환 목사)을 방문했다. 하지만 반정부 성명이 발표될 것을 우려한 당국은 목사를 가택 연금한 상태였다. 얼마 있다가 낯익은 목사님의 얼굴이 보여서 말을 걸자 검은 점퍼를 입은 4~5명의 건장한 남자들이 나타나 내 두 팔을 붙들고 언덕 아래의 좁은 골목까지 끌고 갔다.

나는 당시 한국어를 조금 알아듣는 수준이었다. ‘당신, 일본 기자지,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고 있겠지, 일본 사람이 오늘 같은 날 한국에서 어떻게 되도 모른다’고 리더 같은 한 남자가 낮은 목소리로 위협했다. 그리고 내 가슴을 한번 치고는 비꼬는 듯한 웃음을 지으며 언덕 위 감시소로 들어갔다. “

▲하사바 키요시(전 아사히) - “1987년 8월 22일 대우조선 데모로 한 노동자가 사망했다. 재야단체는 그 노동자를 ‘민주 국민장’으로 장례를 치르기 위해 전국 노동자들에게 총파업을 호소하였고, 정권은 봉쇄에 들어갔다.

나는 체류 기간이 끝나 곧 일본으로 돌아갔는데 그 때 한 변호사가 노동자의 ‘국민장’과 관련, 체포되었다. 나는 그 변호사가 노무현 변호사였다는 사실을 그가 대통령이 된 다음에야 알았다.

그 때 그 작은 섬에서 땀과 눈물을 흘리며 노동자와 함께 싸웠던 무명의 변호사가 뒷날 대통령이 되리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이것만 봐도 한국인이 그 동안 이룩한 것들의 크기를 새삼 마음속 깊이 실감한다.”

▲노먼 토프(전 아시아 월스트리트 저널) - “한국이 이룩한 정치·경제·사회적 성공을 보고 있으면, 오늘날의 성공을 위해 한국이 오랜 시련을 겪었다는 사실을 잊기 쉽다. 언젠가 젊은이들이 과거 힘들었던 시절의 한국을 알지 못하는 때가 올지도 모른다.

아니 아마 그렇게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2004년 서울에서 넉 달을 머물며 영자 신문 편집을 자문한 적이 있었다. 그 때 남산의 정보부 건물을 리모델링해 호스텔로 쓴다는 발표가 있었다. 그 건물은 지난날 민주인사에 대한 취조와 고문의 장소였다. 그런데 내가 만난 젊은 기자는 그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흔한 공원의 관리사무소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우리의 민주화 발전 과정에는 양심적인 많은 외국 언론인들의 도움이 있었다. 어려운 시절, 남의 나라 민주화를 위해 고생했던 그들을 우리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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