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자회담 미국 수석대표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가 번개처럼 평양을 다녀왔다. 하나의 사건이다. 마카오의 방코델타아시아 은행(BDA)에 묶여 있던 북한 자금이 미국 정부와 러시아 정부의 극적인 공조로 4개월 만에 간신히 주인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나타난 발 빠른 동작이다. 북한이나 미국이나 뭔가 큰 변화를 바라고 있다는 조짐이다. 두 나라 사이의 긴박한 교섭 과정을 남한이 구경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입장은 달라진 것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연초 신년사에서 “남북정상회담은 6자회담에서 어떤 결론이 나가 전에는 어렵다고 본다”고 말해 국내 평화파의 반발을 사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5월 말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는 “내 임기와는 관계없이 남북정상회담이 6자회담 결과를 더욱 공고히 하고 진전시키는데 필요한 것”이라고 말하고 회담 시점에 대해 “임의로 앞당기기도 어려운 일이지만 6자회담 진전을 위해서 그 뒤로 늦춰서는 안 되는 일”임을 강조했다. 말이 너무 어렵다.
노 대통령은 남북관계 개선과 6자회담 진전이라는 두 바퀴를 함께 굴려야 한다는 병행정책을 구사하고 있다. 그는 핵 문제는 북·미 사이의 현안인데 남북 관계만을 섣불리 진전시켰다가는 미국의 오해를 살 수도 있다고 보는 모양이다. 그는 남북관계만 따로 가자면 ‘국민적 동의’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한겨레 인터뷰). 바로 이 점이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차이점이다. 김 전 대통령이 국민적 동의를 얻어 방북했던 것은 아니었다. 물론 남북관계 개선을 반대하는 여론도 있다. 노 대통령은 소신파이다. 그가 ‘국민적 동의’를 말하는 것은 정상회담 생각이 없다는 뜻으로 보인다. 통독 이전 동서독은 국정 책임자가 바뀌어도 서로 오가며 여섯 차례 정상회담을 가졌고 그 중간에 외국에서 만나 비공식 회담도 했었다. 서독은 동독을 경제적으로 도와주기 위해서 일부러 반체제 인사들을 보냈고, 체포되면 매년 연말에 가서 그들을 돈을 주고 데려 오기도 했다. 동서독은 물론 우리와는 달리 동족 간 전쟁을 치룬 사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서로 원수처럼 지내기는 마찬가지였다. 2차 대전 패전국인 독일의 통일이 우리보다 일찍 이루어진 것은 양측 지도자들의 강한 통일 의지가 크게 작용한 결과였다.
힐 미국무성 차관보의 방북은 북한에게는 ‘불감청 고소원(不敢請 固所願)’이었을 것이다. 힐 차관보는 '2.13합의'가 이행되기 전에는 방북할 계획이 없다고 말해 왔다. 그런데 BDA의 북한 자금이 러시아 은행으로 넘어가는 단계에서 북한은 힐을 초청했고 힐은 북한 땅을 밟았다. 북한은 미국의 대북 정책변화를 힐을 통해 직접 확인하고 싶었고, 미국 또한 직접 평양을 들어가 핵 폐기 의지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부시 대통령의 임기 안에 핵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미국의 의지와 북의 관계 정상화 의지가 일치한 것이다. 그래서 그의 방북으로 북·미 사이는 서로 믿음을 갖게 된 것으로 평가된다. 더구나 북한의 염원이던 '북미 관계 개선과 비핵화 동시이행', '국제금융거래 정상화' 그리고 6자회담 틀 속에서의 '북·미 양자 대화 지속' 문제도 포괄적으로 풀자는데 일단 합의했다. 놀랄만한 진전이다.
이제 북·미 관계는 ‘적과 적의 관계’에서 ‘대화 가능한 관계’로 한 단계 올라섰다. 그런데 노 대통령이나 우리 정부는 북·미간의 ‘통 큰 거래’를 강 건너 불 보듯 한다. 평화파는 노 대통령이 북한에 대해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으면서 동시에 미국에 대해서는 할 말은 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것이 햇볕정책이다. 노 대통이 대선 정국에만 몰두하는 것 같다. 그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북·미 간 중재자 역할을 하는 것을 국민들은 더 바랄 것이다. 그러나 노 대통령에게서 그런 노력을 하고 있다는 모습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빌의 방북 사건을 계기로 노 대통령은 북한을 뜨겁게 껴안아야 한다. 북한을 더 이상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미국보다 한 발짝 먼저 가는 것은 옳은 일이다. 민족이익을 위해서다.
북·미 관계 정상화나 핵 문제 해결은 우리에게는 평화의 보장이다. 그러나 남의 도움으로 얻어지는 평화는 깨지기 쉽다. 진정으로 남북간 평화를 만들어내자면 우리도 나름의 역할을 맡아야 한다. 그 방법은 바로 남북 정상회담에서 나온다. 지금이 바로 남북정상이 만날 호기이다. 뜻이 맞으면 길도 열린다. 대북 영향력을 미국에 내주지 않으려면 노 대통령은 서둘러 북한에 특사를 보내야 한다. 싫건 좋건 두 지도자가 만나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