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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에세이]지식인의 죄

 

주여!

이 땅의 지식인 됨을 용서하십시오.

글을 써서 세상을 속인 죄를 고백합니다.

요란한 직함으로 삼천리 금수강산의 돌을 비명으로 더럽힌 죄 용서하십시오.

기이한 돌과 뼈 조각으로 민중을 현혹한 죄, 용서하십시오. 죽림이니 자연이니 하며 제 멋에 겨워 제게 주어진 일 회피한 죄 용서하십시오.

쌀 한 톨, 실오라기 하나, 벽돌 한 장 만들지 않고도 목숨과 이름 부지한 죄를 고백합니다.

공론이란 미명 아래 패거리 지어 싸움박질한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웃 나라가 우리를 넘볼 때 나라 문을 여니 닫니 하면서 시간 끌며 때를 놓친 죄를 용서하십시오.

자신의 부와 권력에 눈멀어 나라를 야수에게 넘겨주고도 나라를 위한다고 기시며 가문을 유지한 죄 용서하십시오.

나라를 잃고 나선 아무도 목숨 내놓지 않아 자기라도 바친다며 이름 남긴 죄 용서하십시오. 그러면서 무고한 백성 목숨까지 함께 가져 간 죄 용서하십시오. 가재 팔아 독립운동 한다며 목숨 부지한 죄 용서하십시오.

전위정당이니 대중조직이니 하며 혼자 눈꼴시게 논 죄 고백합니다. 아나키즘이니 생디칼리즘이니 하며 비겁하게 위험을 비틀어놓은 죄 용서하십시오.

어지러운 분파로 나라를 조각조각 내 놓고도 찬탁이나 반탁이니 하며 전 민족을 전쟁으로 내 몬 죄 용서하십시오.

나라 다스린다며 전쟁복구한다며 적산과 원조 물자 나눠 몇 배불릴 때 바로잡지 못한 죄 용서하십시오.

평화통일 주장하던 동료 사법살인 방조한 죄 고백합니다.

학생들의 피를 헛되게 하고 총칼 앞에 무릎 꿇은 죄 용서하십시오.

보릿고개 넘어 외화벌이 하던 광풍아래 몸 사르던 노동자 끌어안지 못한 죄 고백합니다.

민주주의라는 이름 아래 독재 권력 비호하던 죄 용서하십시오.

자유경쟁이란 이름 아래 독점 재벌 면죄부 주던 죄를 용서하십시오.

애국이란 이름 아래 악한에게 최후의 도피처를 제공해주던 죄를 고백합니다.

무엇보다 명분도 실리도 없다는 쪽팔림이 무서워 나침판의 자침 같은 긴장을 포기하고 명분을 찾아 실리를 찾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끊임없이 동요한 죄를 용서하십시오.

산꼭대기 낙락장송으로 고고하게 서서 거만하게 아래 동네 내려다 본 죄 용서하십시오.

산골짜기 골짜기 내려오며 온갖 쓰레기 끌어안지 못하게 홀로 피해온 죄 고백합니다.

산 중턱, 자락 웅덩이 가득 채우며 기다리지 못하고, 뛰어내려야 할 폭포수를 비겁하게 피해 온 죄를 용서하십시오.

들판 가로지르며 외롭게 핀 풀, 꽃 들 어루만지지 못하고, 마을 지나며 헐벗은 자 껴안지 못한 죄 고백합니다.

이윽고 땅 끝까지 와서도 자신을 정화할 갯벌에 몸 담그지 못한 죄 고백합니다.

가장 낮고 넓고 깊은 바다에 이르러서도 차분히 가라앉지 못한 죄 용서하십시오.

그리하여 당신께서 저를 데워 높은 하늘로 자유로운 바람처럼 구름처럼 쉬이 데려갈 수 있도록 몸 낮추지 못한 죄 고백합니다.

이제 매일 아침 기약 없이 광활한 대지를 향하여 외치는 저의 기도를 당신께 드립니다.

냉혹한 자본과 권력의 동토로부터 차가운 이성의 배를 타고 죽음의 해협을 넘어 낮고 넓고 깊은 심장의 바다로 옵니다.

아득한 근원의 귀의처로부터 생명의 은하수를 건너 더운 가슴으로 오소서.

그리하여 찬 이성, 더운 가슴으로 되살아 저들을 세우고 기르며 더부살이와 더불어 숲을 이루어 숨쉬듯이 절로 살아가기를 원하오니 오시어서 지혜를 주옵시고, 저를 통하여 영광 받으시옵소서. 당신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윤한택 <경기문화재단 전통문화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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