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8년 11월 28일 밤,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의 어느 상가. 문상객 손학규씨(그해 6월, 경기도지사 선거 실패)가 조금 늦게 온 노무현 의원(서울 종로)과 겸상을 했다. 술을 한두 잔 마신 노 의원이 손 씨에게 말을 걸었다.
“손 장관(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정치적으로 그만큼 큰 것은 다 내가 그때(1993년 광명 보궐선거) 광명에 안 나갔기 때문 아닙니까. 원래 내가 광명으로 나가려 했죠. 여론조사도 내가 손 지사보다는 몇 십 % 앞섰던 거 아닙니까.
그때 내가 안 나가서 손 장관이 개혁성향의 교수라면서 표를 몰아갔지만 내가 나갔더라면 턱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손 전 지사는 소이부답, 술잔만 기울였다(한겨레).
손학규 전 지사는 한나라당 탈당 이후 노 대통령으로부터 ‘보따리 장사’라는 비판을 받았다. 노 대통령은 심지어 그가 어떻게 범여권이냐며 그의 정체성을 더 따지기도 했다. 장고를 거듭해오던 손 전 지사는 친구 김근태 의원의 권고를 받아 마침내 범여권의 대통합 대열에 합류했다.
그리고 1일 ‘민심의 바다’ 첫 기착지인 전남 장성으로 떠났다. 그는 용산역에서 ‘실업 없는 나라’ ‘사교육비 부담 없는 사회’ ‘구김살 없는 노후 생활’ ‘시름없는 내 집 마련’이라는 4무(無) 민생 공약을 발표했다. 네 구호의 첫 글자를 따면 ‘실사구시’이다. 그의 이번 ‘민심 대장정’일정은 16일 간이다.
손 전 지사의 가장 큰 약점인 탈당 사건은 분명히 개혁진보진영에게는 뜻밖의 원군이나 친정인 한나라당에게는 ‘배신’이 틀림없다. 그리고 국민은 지난날의 이인제를 연상할 수도 있다. 탈당이라는 옥의 티를 어떻게 지울 것인가는 오직 그 자신의 몫이다. 그가 문민정부에서 잘 나가는 정치인이었다는 것은 노 대통령의 언급에서도 나타나 있다.
그는 지금 정치적 변신 속에서 모 아니면 도를 잡아야 하는 한 마디로 말하면 ‘진퇴유곡’에 들어서 있다. 이럴 때는 생즉사(生卽死), 사즉생(死卽生)의 각오로 전진하는 길밖에 없다. 하늘의 뜻이 있다면 그는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손학규 전 지사는 탈당 이후 무리 없이 범여권의 ‘원 오브 뎀(여러 명 중의 하나)’에 끼어들었는데 여론지지율은 늘 선두를 지키고 있다.
그는 노무현 시대의 새로운 화두인 ‘인문학적 소양’도 풍부하다. 겸손도 아는 듯 하다. 그런 그가 지지율이 높은 것은 이밖에도 호남인의 정서와 좀 관련이 있는 듯 하다. 그곳에는 시대를 읽는 지혜가 넘쳐난다. 선거 때만 되면 전략적 선택을 잘 한다. 노무현 후보는 이 선택에 따라 당선되었다.
손학규 전 지사는 여야 유력후보군 가운데 유일한 경기도 출신이다. 거기다 명문고교인 경기고교 (평준화 이전)출신이다. 대선 사상 경기도가 향우에게 주목하는 일도 처음일 뿐만 아니라 모교 동문들의 관심도 높다. 직접선거에 의한 경기고교 출신 대통령은 아직 없기 때문이다.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에는 ‘걸유(乞宥)’라는 말이 나온다. 걸유는 어떤 관리가 그 지역 재임 중에는 선정을 베풀었지만 뒷날 실수로 인하여 정치적으로 억울한 처지에 처하게 되면 고을 사람들이 일종의 진정서를 작성해서 용서를 빌었던 구명상소를 말한다.
손 전 지사는 경기도 지사 시절, 상당한 업적을 남겼다고 자부한다. 그가 진정으로 재임 중 경기도민의 마음을 얻었다면 도민들이 ’더 이상 탈당을 탓하지 말라‘는 걸유 운동에 나설 수도 있다. 사실 한나라당과 범여권은 정책면에서는 별반 차이가 없다.
정책은 대동소이하다. 다만 국가보안법과 재벌정책 두 가지는 서로 크게 다르다. 손 전 지사는 먼저 이 문제들에 대해 확실한 입장을 밝히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우리는 21세기 들어 두 번째로 대통령을 뽑는다. 대선 때마다 우리 사회는 격변을 겪는다. 새로운 시대정신(Zeit Geist)이 나타난다.
이번 대선의 의미를 민주화 20년에 대한 결산, 신자유주의의 세계화에 대한 결산 그리고 5.16부터 시작된 산업화와 민주화를 모두 포괄하는 근대화에 대한 결산이 될 것이라고 전망하는 학자도 있다. 연세대학 김호기 교수의 진단이다. 그는 민주화 시대는 이번 대선으로 종언을 고하고 세계화 시대는 열렸는데 이 새로운 시대를 슬기롭게 이끌어갈 시대정신이 아직 잘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손학규 전 지사는 이 시대정신을 찾아서 남쪽으로 간 것으로 보인다. 호남을 민심탐방의 시발지로 삼은 것도 올바른 선택 같다. 민주개혁 후보에 대한 지지의 바람은 늘 호남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민심의 바다에서 진정한 시대정신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