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훈업무는 삼국시대에 상사서(賞賜署) 공덕부(功德部)가 설치된 이후 중단 없이 계속 존재돼 왔다고 한다.
삼국시대인 신라 진평왕 46년(624년)에 재정을 담당했던 창부내에 상사서란 보훈관서가 설치됐는데 이는 고구려 백제와의 전쟁의 과정에서 상사의 업무가 빈번해지고 더욱 절실히 요구된 데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상사의 가장 많은 대상은 전쟁에서 공을 세운 사람이며, 두 번째로는 국민의 귀감이 될 만한 사람이었다. 현대의 용어로 말하자면 사회발전공로자와 같은 사람인 것이다.
상사의 세 번째 대상은 귀순자로서 삼국전쟁의 과정에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적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어 귀순자에게 상사를 하게 됐던 것 같다.
신라시대의 보훈담당관서에서 전공자, 사회발전공로자, 귀순자에게 상사하는 내용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본인에게 관직과 관등을 제수하거나 이를 올려주는 경우로 대체로 1등급 오르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공훈의 정도에 따라 2등급과 3등급이 오르기도 했다.
경제적 예우로는 토지를 하사한 것으로 무열왕때 백제를 징벌한 뒤 돌아온 김유신에게 토지 500결을 하사했고 문무왕 2년 고구려를 공격하고 돌아온 김유신과 김인문에게 재화 노복을 하사한 것은 그 한 예라 할 수 있다.
또한 전사자를 기리기 위한 법회를 불교사찰에서 거행했는데 진흥왕 33년 10월에는 전사 사졸을 위해 7일간 팔관회를 개최하기도 했으며 척경비를 세워 전공을 기념하고 국가에 대한 충절을 유도하기도 했다.
진흥왕 14년(553년)에 시작해 17년만에 완공한 황룡사와 같은 호국도량을 건립하기도 했다. 황룡사 9층탑은 이웃나라의 외침을 막고 이웃나라를 아우른다는 염원아래 건립된 것으로 신라 국민의 호국사상의 결집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신라의 보훈업무는 국민정신을 한데로 모아 이를 계승한 수많은 화랑들을 배출했으며 그러한 토대위에 삼국을 통일했다.
고려의 보훈업무를 살펴보면 첫째는 직업보도 업무로 공신 자신이나 자손, 공을 세우고 죽은 공신과 그 공신의 부모와 선조의 관직을 높여주는 가록, 공음, 추증이 있다.
둘째는 경제적 예우로 신왕조 수립에 힘쓴 조신과 병사들에게 공로에 따라 토지를 지급한 역분전, 훈전, 공음전, 사패전, 식읍 등의 제도이다.
셋째는 교육보호 업무로 훈계를 가진 사람의 자손은 국자학, 태학, 사문학의 입학시 특전이 부여됐다.
넷째는 기념사업 업무로서 공신당을 설치해 이곳의 동서벽에 삼한공신을 그려놓고 하루 밤낮동안 법회를 벌이고 성(姓)을 하사하는 등 보훈업무는 점차 발전됐다.
조선시대에도 필요시 공신도감 설치 그리고 상설기관으로 충훈부, 표훈원, 군공청 등을 두고 국가차원에서 보훈시책을 시행했다.
이러한 보훈부서의 기능은 우리의 자주성이 약화되거나 상실된 때에는 기능이 약화되거나 기구가 축소되기도 했다. 고려말 몽고의 침략을 받아 원나라의 신탁통치하에 있던 충선왕 때에 고공사는 인사를 다루던 전조(銓曹)에 예속됐다.
그러나 수년 뒤 공민왕이 집권해 반원정책을 전개하던 공민왕 5년에는 다시 고공사가 독립됐다. 조선의 경우도 이와 다르지 않다.
충훈부를 기공국으로 격하시키고 독립된 기구에서 의정부에 예속시켰던 때는 일제가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갑오경장을 일으켜 조선정부를 좌지우지하던 1894년이었다.
그러나 고종이 대한제국을 설립하고 광무개혁을 전개해 나가던 1900년에 기공국이 표훈원으로 격상됐다가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됐던 1905년에는 표훈원의 기능이 약화됐으며 한일합방 때는 표훈원이 완전히 없어졌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주권의 행사를 제약받았던 때는 보훈기구의 기능은 예속·축소됐으며 자주적으로 국가의 발전을 이루려고 하던 때는 항상 독립적 확대적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선조들의 보훈제도를 통해 오늘의 보훈제도가 나가야 할 방향을 찾아 볼 수도 있겠다.
보훈시책은 언제나 국가의 자주적 발전과 더불어 독립적이고 확대적인 기능을 담당해 왔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