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4일 孝의 원찰(願刹) 용주사에서 사도세자의 넋을 달래는 범종소리와 함께 제향을 올리는 행사가 있었다. 식전 행사로는 융릉, 융릉 재실터, 건능 초장터 참배에 이어 용주사에서는 홍살문 복원식에 이어 호성전((護聖殿) 제막식이 있었다.
용주사에 홍살문이 있었던 것은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신 호성전을 두었기 때문이며 이번 제향을 기념으로 새로 복원됐다고 한다. 제막식에 이어 국보 제120호 용주사 범종 타종으로 제향행사가 시작됐다.
용주사 주지 정호스님의 봉행사, 사도세자 행장 낭독, 헌다례, 부모은중경 봉독, 추모사, 추모시, 추도시, 진혼무, 살풀이….
모든 의식을 마쳤는데 정조대왕이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그리워하며 지은 시(時)를 경기문화의전당 전무송씨가 봉독하는 과정에서 “혼정신성(昏定晨省) 다하지 못한 어버이 사모하여 오늘 또 화성을 찾아와보니, 원침엔 가랑비 부슬부슬 내리고 재전에서 배회하는 그리운 마음 깊구나, 사흘 밤 견디기는 어려웠으나 그래도 초상화 한 폭은 이뤘다네, 지지대 돌아가는 길에 머리 들어 벽오동 같은 구름 바라보니 속마음 일어나누나…”라는 구절을 읽어 내릴 때 행사장 분위기는 숙연해지면서 비운에 죽은 사도세자의 넋을 위로해 드리기도 했다. 이날 제향은 한마디로 246년전 창경궁 휘녕전 앞뜰에서 뒤주에 갇힌 채 8일 만에 세상을 떠난 사도세자의 영혼을 기리는 행사였다.
용주사는 1789년 10월 사도세자의 현릉원이 완공되고 난 후 그를 위해 세워진 사찰로 당시 8만7천량의 엄청난 시주를 받아 242칸으로 완성된 원찰이었다. 조선시대 억불숭유(抑佛崇儒)정책, 즉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나라정책이었는데 정조가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위로하고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마음에서 이 원찰을 건립한 것은 그 당시 대단한 결단이었다.
1790년 용주사가 건립된 이후 사도세자의 기일이었던 윤5월21일에는 항상 제향을 올렸고 정조는 자신의 부모에 대한 효성심을 세상에 널리 알리기 위해 부모은중경판(父母恩重經版)을 용주사에 하사하여 효의 본찰로 삼게 하였다. 그후 사도세자의 넋을 기리는 제향이 왕실과 백성들의 뜻으로 매년 지속해 오다가 일제의 한반도 강점으로 그 맥이 끊어지고 말았다.
일제에 의해 사라졌던 사도세자 제향이 이번 용주사에서 100여년 만에 작년에 이어 올해 대규모로 제향의례가 이루어졌으니 정말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용주사 정호 주지스님에게 큰 고마움의 뜻을 전하고 싶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 있다.
사도세자와 수원시 그리고 화성시는 지역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너무나 밀접한 관계가 있다. 지금이야 두 지자체가 나뉘어져 있지만 지난 1949년 8월 15일까지는 하나의 행정구역이었다. 수원도호부와 화성유수부의 이름으로 불리었던 이 도시는 1760년 사도세자 재위 당시 온양온천을 가기 위해 지금의 융건릉 재실로 사용하고 있는 수원도호부 관아로 내려와 이 지역 선비와 노인들과 만나 민심을 보살피는 자리도 마련했고 잔치를 베풀기도 했다.
사도세자의 수원 백성들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알고 있었던 정조대왕도 당시 사도세자를 만났던 모든 사람을 불러 잔치를 베풀어 줬던 역사적인 뒷얘기도 있다. 그래서 언젠가는 수원과 화성은 통합이 되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 지역민의 여론이기도 하다.
이번 제향 행사를 보고 또 한가지 느낀 점은 지난 2001년 필자가 경기문화재단에 있을 때 추진했던 일인데 정조대왕의 효심을 살려 전국적으로 효 사상 실천운동을 전개하자는 뜻에서 용주사 앞 3천여 평의 부지에 효 박물관과 효행원을 짖고 수원 화성행궁과 융건릉 그리고 용주사를 잇는 효 문화 관광벨트를 조성해 효 사상도 살리고 관광객도 유치하기로 했던 계획이 어떻게 흐지부지 된 것 같아 아쉬운 마음 금 할길 없지만 용주사에서 융건릉 일대가 효행 역사공원이 조성될 계획이라는 얘기를 듣고 언제 될지는 몰라도 전국적으로 효 문화 실천운동은 현 시점에서 아주 절실한 국민운동으로 승화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홍기헌 <수원시의회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