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그러니까 1948년 7월 24일은 대한민국의 첫 정·부통령이 취임한 날이다. 이에 앞서 1948년 7월 20일에는 헌법에 따라 초대 대통령과 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가 국회에서 실시됐다. 이 선거에서 이승만은 출석의원 196명 중 180표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고, 부통령선거에서는 이시영이 133표를 획득해 62표를 얻은 김구를 누르고 부통령에 당선됐다.
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삼한갑족(三韓甲族:신라·고려·조선 3조에 걸쳐 문벌이 높은 명문)인 경주이씨 백사공파 집안 출신으로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11세손이다. 백사공파는 이항복 이래 연이어 9명의 영의정과 1명의 좌의정을 배출한 조선조 최고의 명문이다. 이시영의 아버지 이유승(李裕承)은 고종 때 이조판서를 지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나라가 망하자 이시영의 여섯 형제는 지금의 서울 중구 일대 2만여 평이 넘는 땅과 물려받은 전 재산을 남김없이 처분한 뒤 1910년 12월 60여명에 이르는 대가족을 열두 대의 마차에 나누어 태우고 서울을 출발해 만주로 망명을 떠났다. 이 망명을 주도했던 인물이 넷째인 우당 이회영(友堂 李會榮)으로, 이시영은 다섯째였다. 제11대에서 14대까지 국회의원을 지낸 이종찬 전 국가정보원장이 우당 이회영의 직계손자다.
한 달여 만에 서간도 유하현 삼원보에 도착한 이들은 신흥무관학교를 설립, 여기에서 배출된 3천여 명의 독립군들이 봉오전투와 청산리전투에서 일본 정규군을 대파한 핵심전력이었다. 이들 여섯 형제와 가족들은 대부분 일본 경찰에 체포돼 고문 끝에 옥사하거나 굶주림과 병으로 죽고 해방 후 이시영만 살아서 귀국할 수 있었다. 그 이시영 초대 부통령이 지금 수유리 북한산 기슭에 쓸쓸히 잠들어 있고, 99세의 늙은 며느리가 그 묘소를 지키며 어렵게 살고 있다. 대한민국이 제대로 된 나라라면 건국 부통령을 이렇게 대우해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