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인 수원화성(水原華城)의 축성 전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화성성역의궤’의 기록에 의하면 ‘수원부를 처음 옮겼을 때 옛 사직의 단을 팔달산 서쪽 기슭에 설치하였으나 성 쌓기에 이르러 돌 뜨는 일이 가까워지고 또 울타리와 제단도 이미 많이 기울어져 을묘년(1795년) 가을에 다시 새 터를 성북쪽 2리 쯤인 광교산 서쪽 기슭에 다시 설치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을 근거로 수원화성을 연구하는 사학자들은 수원화성 사직단을 발굴하기 위해 나름대로 많은 애를 써왔다. 지난 10월말 수원화성 사직단 터의 위치가 현재의 수원보훈지청 위쪽 광교산 자락이 유력하다는 말을 듣고, 필자는 수원화성을 아끼고 사랑하는 몇 분의 문화재관련 학자, 홍기헌 시의장 등과 함께 광교산 자락을 찾았다. 수원보훈지청 관계자들과 인근 주민들에게 수소문 했으나 아무도 아는사람이 없어 ‘화성성역의궤’에 있는 사직단 위치도를 단서로 해 보훈지청 위쪽 산자락 소나무 숲속에 방치되어 있는 사직단 터를 찾을 수 있었다.
당시 필자의 심정은 파랑새를 보았다는 기쁨보다 허전하고 착찹한 마음이 앞섰다.
사직단(社稷壇)은 토지를 주관하는 신(神)인 사(社)와 쌀, 보리, 콩 등 오곡을 주관하는 신인 직(稷)에게 임금이 백성을 위해 제사를 지내던 제단(祭壇)이다. 고구려는 고국양왕 9년(392년)에, 신라는 선덕왕 4년(783년)에 사직단을, 고려에서도 성종 10년(992년)에, 조선왕조를 건립한 태조 이성계도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궁궐, 종묘를 지을 때 사직단을 세웠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시대의 변천이나 국가의 흥망에도 불구하고 사직단의 전통은 변동 없이 지켜져 왔다.
조선시대 최고의 성군으로 추앙받고 있는 정조대왕이 수원화성을 축성하기 전 사직단을 먼저 세우고 가장 먼저 천지신명(天地神明)께 제를 올렸던 곳이 바로 수원화성의 사직단이다.
화성성역의궤 기록에 의하면 이곳 사직단은 ‘단의 높이가 3척, 동서의 길이가 10척, 남북의 너비가 8척으로 위쪽은 네모난 벽돌을 깔고 단 아래쪽 사면에는 대를 1층 쌓았으며, 대 아래 네 뜰엔 4면의 담을 두르고 각기 홍살로 작은 문을 설치했다’라고 되어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지상으로 쌓았던 단(亶)은 모두 무너지고 없어져 흔적조차 찾기 힘들고, 단 아래 부분만이 일부 남아있으나 그나마 인근 보훈원 거주민들의 휴식처로 이용되고 있다니 수원화성을 아끼는 한 사람으로서 차마 사직단 터를 똑 바로 바라 볼 면목이 서지 않았다.
탐방을 마치고 온 필자는 수원의 근간이 된 수원화성의 올바른 이해와 자랑스런 문화유산을 발굴보존 해 후손에게 물려주기 위해서는 수원화성 사직단이 반드시 복원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슴깊이 새겨보면서 당시 사직단에서 올렸던 제문으로 필자의 마음을 대신 하고자 한다.
“견륭 60년 세차 을묘 경술삭 18일 정묘에 통훈대부 행수원부 판관 홍원섭은 감히 광교산의 신령께 밝게 고합니다. 엎드려 생각 하건데 토지신은 백성의 주인이요, 곡식신은 백성의 근본이라, 땅이 진실로 맞지 않는다면 신령인들 어찌 감히 안정하겠는가. 새로 도읍을 지으니 사직단의 위치가 맞지 않으니, 맞는 곳은 어디인가. 광교산 기슭일세. 북쪽에 거쳐하여 높으니 진실로 사직의 처음 바탕이내. 좋은 날 신령스런 구역에 옛 것을 버리고 새로움을 도모하네, 두개의 단에 사직신 모시니 찬년동안 부유하게 하옵소서, 삼가 희생과 단술과 여러 가지 제물을 차려서 맑게 올리니 흠향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