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만 만(萬), 큰 덕(德)이란 이름처럼 많은 덕을 쌓고 행한 여류 자선가 김만덕이 타계한지 196년째가 된다. 그녀는 1739년 제주도 동복마을에서 아버지 김응렬, 어머니 고씨의 삼남매 중 외동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전라도를 오가며 해상교역을 했다. 제주에서 생산되는 미역·전복·굴 등을 전라도에 내다 팔고 그곳에서 생산되는 쌀을 사다 제주도에 팔았다. 그러나 김응렬은 김만덕이 열 한 살 때 해상 사고로 죽고, 1년 반 뒤에는 어머니까지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퇴기 월중선 슬하에 들어가 기녀(妓女)가 됐다. 기녀로 이름을 날렸지만 사회로부터 천시받는 신분 차별은 견디기 어려웠다. 그녀는 관아를 찾아가 기적에서 빼줄 것을 요구했지만 거절 당했다. 이에 굴하지 않고 양녀(良女)로 환원시켜 주면 불쌍한 이웃을 돕겠다고 약속하고 겨우 기적에서 빠져 나왔다. 그녀는 20살 때 결혼하기로한 고선흠이 갑자기 죽자 결혼을 포기하고 아버지 뒤를 이어 장사길에 나섰다. 제주 특산물을 서울지방에 내다 팔고, 기녀시절의 경험을 살려 양반층 부녀자들을 상대로 옷감·장신구·화장품 등을 팔아 제주 갑부가 됐다. 그녀의 진가는 1790년(정조 14)부터 1794년까지 계속된 흉년 때 드러났다. 제주도 3고을에서 600여 명이 굶어 죽는 기아사태가 벌어지자 정조는 긴급 구호미를 보냈으나 1795년 양곡을 실은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허사가 되고 말았다. 당시 54세이던 김만덕은 자신의 재산 1천금으로 육지에서 500석의 곡물을 사들여 7척의 배로 실어다 50석은 친척과 평소 은혜를 입은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450석은 구호미로 헌납했다. 정조는 그녀에게 상을 내리고 소원을 물었는데 금강산 구경이라고 대답했다. 정조는 행수내의녀(行首內醫女) 벼슬을 내리고 금강산 구경을 시켜 주었다. 그녀는 그때 수원을 거쳐 갔는데 당시 영의정이던 채제공과 만난 것도 이때였다. 수원 태생의 여류 자선가 백선행(白善行)은 교육을 위해 전 재산을 바친 것이 다를 뿐 역경을 딛고 사회에 공헌한 공덕은 둘이 똑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