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단은 올해를 ‘현대문학 100주년’으로 삼고 기념행사를 가졌다. 1908년 육당 최남선이 최초의 월간 종합지인 ‘소년’ 창간호에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한 것을 시원으로 본 것이다. 또 같은 시기에 소설로 성가를 올린 것이 춘원 이광수이고, 문학평론의 새 지평을 연 것이 영문학자 최재서였다. 세 사람은 분명 조선을 대표하는 문인이었다. 문제는 그들이 일제 감정기인 1930~40년대에 친일문학을 선도하면서 일제 식민지의 공범자 노릇을 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현대문학 100주년에 대한 찬반논의가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시인이자 수필가인 윤재근씨는 ‘월간문학’의 기고에서 최남선, 이광수, 최재서를 부일(付日)세력으로 단정하고 그들이 문단에 등단한 1908년을 우리 문학 100주년으로 삼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이 아니더라도 최남선은 일본의 침략전쟁을 성전(聖戰)이라고 찬양하면서 시국 가요를 작사하고 학생들의 학병 지원을 종용한 바 있다. 이광수는 조선인 전부를 일본화하고 일본의 문화를 세계에 발양(發揚)하는 문화전선의 병사가 되라고 했다. 또 최재서는 “조선어는 문화의 유산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고민의 종자였다. 이 고민의 껍질을 깨뜨리지 못하면 우리의 문화적 창조력은 정신의 수인(囚人)이 될 뿐이다.”라고 강변했다. 일부에서는 그들의 친일 행각이 일제의 강압에 의한 불가항력이었을 것이라며 “나무만 보지말고 숲을 보라”는 동정론을 제기하고 있다. 작고한 사상계 발행인 장준하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1957년 최남선이 타계하자 사상계 최남선 특집호를 내고, 권두언에서 “민족이 가장 암담한 절망의 골짜기에 처해 있을 때에도 선생은 우리의 가장 친근한 벗이요, 경애하는 스승이었다. 한때 선생의 지조에 대한 세간의 오해도 없지 않지만 본의는 이 민족의 운명과 문학의 소생에 있었다.”며 최남선의 친일을 타의에 의한 것으로 봤다. 친일 단죄론과는 큰 차이가 있다. 역사는 그것을 보는 사람의 수준만큼 보인다고 했다. 과연 우리의 역사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