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연선생일기(秋淵先生日記)’가 화성시에 의해 번역본으로 출판됐다. 이 일기는 추연 우성전(禹性傳·1542-1593)이 42세 되던 1583년 6월 1일부터 43세 때인 1584년 8월 30일까지 약 15개월 동안 보고 듣고 경험한 사실을 날짜별로 정리하여 기록한 것으로 역사적 가치가 높다. 추연은 이 일기를 쓰는 동안 여러 관직에 있었기 때문에 ‘사환일기(仕宦日記)’의 일종이라고도할 수 있다. 추연은 우언겸과 연안 김씨 사이에서 삼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으나 백부 우준겸에 입양됐다. 추연의 본관은 단양이고, 시조는 고려 현종 때 정조호장(正朝戶長)을 지낸 우현이며 고려말 경상도원수(元帥)와 조선 태종 초에 검교좌정승(檢校左政丞)을 지낸 우인열을 분파시조로 하는 정평공파의 17대 손이다. 성리학의 개척자 역동(易東) 우탁, 공양왕 때 단양부원군을 지낸 우현보 등 역사적 인물을 배출한 명문 출신이기도하다. 1562년 당대 석학 퇴계 이황의 문하에 유학할 때 유성룡과 김성일을 만나게 되고, 이때 학문과 우애의 깊이를 더하였다. 1568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추연은 홍문관 정자(正字)와 수찬(修撰)을 역임하던 중 양부상을 당해 3년간 시묘살이를 하고, 35세 되던 1576년 수원부 호매절면 외촌에 사는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수원현감으로 나갔다. 재임 동안 선정을 베풀어 이임할 때 주민들이 거사비(去思碑)를 세웠다. 관직에서 물러나 수원으로 낙향해 학문에 전념할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추연은 경기지역에서 수천명의 의병을 모집해 추의군(秋義軍)을 결성, 강화도에서 큰 전공을 세웠다. 그는 1592년 인천도호부사(仁川都護府使)로 임명되기도 하였는데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싸운 그의 애국지심은 군사(軍史)에 길이 남을만 한 일이었다. 1793년 12월 정조는 추연에게 문강(文康)이란 시호를 내리고, 후사가 없었던 추연의 대를 잇게 하기 위해 윤영길을 사후 양자로 입양시켰다. 추연은 그의 부인 양천 허씨와 함께 화성시 매송면 어천리 능골에 잠들고 있고, 직계 손인 조선 후기 재야 실학자 취석실(醉石室) 우하영의 묘도 같은 곳에 있다. 두 사람의 묘역에 대한 성역화 움직임이 있었으나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지지부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