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관광부는 '5월의 문화인물'로 시인 정지용(鄭芝溶. 1902-?)을 선정하고 기념사업을 펼친다.
충북 옥천 출신으로 옥천공립보통학교를 나온 그는 휘문고보에 입학해 홍사용, 박종화, 김영랑, 이태준 등의 선후배를 만나 글을 쓰기 시작했으며 박팔양 등 8명과 함께 동인지 '요람'을 냈다.
1922년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첫 시 '풍랑몽'을 썼으며 이듬해 휘문학교의 교비생으로 일본 교토(京都)의 도시샤(同志社) 대학 영문학과에 입학했다. 재학기간에 시 '석류' '바다' 등을 썼으며, 1926년 '학조' 창간호에 '카페 프란스' 등 9편의 시를, '신민' '문예시대'에 '홍춘' '산엣색시 들녘사내' 등을 발표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그는 1929년 귀국한 뒤 박용철, 김영랑과 동인지 '시문학'을 창간해 순수 시운동의 물길을 텄으며, 1933년 '가톨릭청년' 창간부터 편집고문을 맡아 신앙시를 발표했다. 이어 이태준, 이무영, 김기림 등과 반 카프적 입장에서 순수문학의 옹호를 위해 '9인회'를 만들기도 했다.
첫 시집 '정지용 시집'(1935)에 수록된 '향수' 등은 일찍이 우리 민족이 체험하지 못한 모국어의 섬세한 아름다움을 개척해낸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일제시대에 '문장'의 심사위원으로 참여해 뒷날 '청록파'를 형성한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을 발굴하기도 했다.
1941년에 펴낸 두 번째 시집 '백록담'에서는 백록담으로 상징되는 조국의 자연에 대한 깊은 탐험을 내면의 언어로 형상화시키는 경지를 보여줬다.
해방 후 이화여전 교수를 사임하고 경향신문 주간직을 맡아 '지용시선'을 펴냈으며, 1947년 다시 이화여대 교수로 복직했다가 1년만에 그만두고 경기도 고양군 녹번리(현재 서울 녹번동) 초당에서 시작에 전념했다.
1948년에 37편의 시, 수필, 기행문이 수록된 '문학독본'을 출판했으며, 이태준이 북으로 넘어가자 "소설가 이태준 군 조국의 서울로 돌아 오라"는 글을 썼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서울을 빠져나가지 못한 그는 정치보위부에 체포,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납북된 것으로 알려진다. 전쟁 중 사망한 것으로 전해지나 그의 마지막 행적은 아직도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월북시인으로 낙인 찍혔다가 1988년 남한에서 작품이 해금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