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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편만(遍滿)한 압박, 그리고 김수환 추기경

우리 양심을 비춘 시대의 빛
사랑으로 세상 안은 참어른

 

1987년 남영동 공안 분실에 잡혀간 서울대생 박종철, 그는 운동권 친구의 은신처를 캐묻는 경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한데 진실을 은폐하고자 했던 경찰의 사인 발표는 가관(假觀)이었다. ‘퍽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것이었다. 집권세력이 우리 모두를 청맹과니로 생각했던 것일까, 누구도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치졸(稚拙)한 설명이었다. 하지만 당시 5공화국 정권의 폭압(暴壓)으로 우리 모두는 침묵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대생 아들을 자랑스러워했던 아버지에게는 한줌의 유해(遺骸)만이 안겨졌다. 고문치사(拷問致死)의 흔적을 감추려했던 경찰이 서둘러 화장을 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아들을 가슴에 묻으면서, 한편 아들의 유해를 임진강에 뿌렸다. 그리고 한마디를 했다. ‘종철아! 잘 가거라, 내는 할 말 없데이.’ 너무도 소중했던 아들의 억울한 죽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슬픔 그리고 그 원망마저도 안으로만 삼키며 ‘말 없는 말’을 했던 것이다.

모두의 침묵 속에서도 유독 한 무리의 촛불이 진실을 밝히고자 했었다. 바로 김수환 추기경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의 준엄한 일침(一鍼)이 있었다. “이 정권의 뿌리에 양심과 도덕이라는 게 있습니까? 총칼의 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희 젊은이, 너희 국민의 한 사람인 박종철은 어디 있느냐?’ ‘그것은 고문 경찰관 두 사람이 한 일이니 모르는 일입니다’하면서 잡아떼고 있습니다. 바로 카인의 대답입니다.’

발뺌으로만 일관하던 경찰의 허위(虛僞)는 점차 밝혀졌고, 마침내 물고문에 의한 죽음의 진실이 드러났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한줌일망정 우리의 양심이 살아 있었던 것이다.

아들을 잃었기에 애간장으로 흐르는 비통함이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 역시 소시민이기에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도 있었다. 그래서 그저 간결하게 ‘할 말 없다’고 응결(凝結)되어 더 깊어지는 억울함이 있었던 것이다. 그 아버지의 ‘소리 없는 울음’에 우리 모두는 신촌에서, 시청에서 함께 울었던 것은 비통하지만 무력했던 우리 모두의 위로였을 것이다.

이후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관철하는 등 집권자의 허망한 욕심을 좌절시키는 일정 성과도 있었다. 아버지의 ‘말 없는 말’ 그리고 ‘소리 없는 울음’에 격발(擊發)되어, 우리 모두가 비겁함을 벗어 던졌던 결과였을 것이다.

또한 온갖 압제에도 그 아버지의 진정을 끝까지 지켜냈던 우리 시대의 양심, 어두울수록 그 빛의 가치를 더했던 김수환 추기경 그리고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진정한 용기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우리의 자랑스러운 살아 있음이었다.

난 교회의 사회적 사명으로서 디아코니아(diakonia, 참여)를 중시한다. 사랑과 평화는 굳이 하늘나라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도 진정한 사랑과 평화의 구현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기에 이를 위해 끊임없이 참여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사명이 디아코니아이다. 오래 전 박종철 고문치사와 관련하여 김수환 추기경 그리고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보여준 청징(淸澄)한 양심 그리고 굳건한 용기야말로 진정한 디아코니아의 전형(全形)인 것이다.

디아코니아의 사명을 생각하며 늘 떠올리는 찬송가의 한 구절이 있다. ‘약한 자 힘주시고, 강한 자 바르게, 추한 자 정(淨)하게 함이 주님의 뜻이라. 해 아래 압박 있는 곳, 주! 거기 계셔서 두 팔로 감싸주시어 정의가 사나니.’

이 세상의 참 교화를 위해 든든하게 두 팔로 감싸주시던 어른이셨다. 예전 박종철 죽음의 이면에 도사렸던 칠흑(漆黑)같은 압박을 따끔한 일침으로 경계하셨고, 마침내 진실을 살려주셨던 어른이셨다.

우리 시대의 참 어른 김수환 추기경을 보내는 날, 잔뜩 찌푸린 하늘은 어른이 발하던 그 빛의 사라짐으로 느껴졌고, 내 마음엔 주름만이 더해졌다. 특히 우리 사회에 다양한 압박들이 여전히 편만(遍滿)하기에 어른의 빈자리가 더 허허(虛虛)로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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