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의 시인 정지용(鄭芝溶.1902-?)의 생몰 연대에 남아 있는 의문부호를 지울 수도 있을 증언자료가 북한에서 입수됐다.
박태상(48.문학평론가) 한국방송대 국문학과 교수는 29일 정지용의 마지막 행적을 밝혀줄 자료로 시인 박산운이 북한의 '통일신보' 1993년 4월 24일, 5월 1일, 5월 7일자에 3회에 걸쳐 연재한 회고문 '시인 정지용에 대한 생각'을 일본 총련계의 조선대 김학철 교수로부터 입수, 국내 학계에 처음으로 공개했다.
박산운의 회고문은 1992년 여름 북한에 살고 있는 정지용의 셋째 아들 구인(69)씨가 자신을 도 방송위원회에서 중견기자로 일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하면서 편지를 보내왔다는 글로 시작된다.
박산운은 이후 구인씨가 다시 찾아와 "자기 아버지의 최후를 목격했다는 소설가 석인해 교수의 집이 어딘가고 물어 이튿날 그를 데리고 석 교수 집으로 찾아갔다"면서 "이야기는 정지용이 최후를 마친 1950년 가을 전쟁시기로 옮아갔다"고 회고문에 적고 있다.
이때 석 교수는 "그날이 그해 9월 21일이었나 본데..."라며 당시를 회상한다.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그는 전쟁이 터지자 남으로 내려가 문화공작대의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오던 도중에 동두천에서 정지용을 만났다는 것이다.
친분이 있던 두 사람은 오랜만에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동두천 뒷산을 넘었는데 그 산이 '소요산'이라는 말을 들은 정지용은 이름이 매우 풍류적이라고 껄껄 웃었다고 한다.
박운산은 "9월 21일 아침에 강원도 태백산 줄기를 타는 동쪽으로 길을 잡고 (정지용과) 함께 오고 있었는데 불시에 미국 놈들의 비행기가 하늘을 날며 날아왔다. 일행을 발견한 비행기는 곧바로 기수를 숙이더니 로케트 포탄을 쏘고 기총소사를 가하였다"고 석 교수의 증언을 소개했다.
석 교수는 "비행기가 사라진 뒤 정지용을 찾아보니 기총소사에 가슴을 맞고 미 숨져 있었다"면서 "그 때 정황이 허락치 않아서 할 수 없이 동무(구인씨)의 아버지 시신을 대충 묻고 통일이 되는 날 친구들과 함께 찾아가 봉분을 해드리자고 했는데 참... 안됐소..."라고 말한 것으로 회고문에 기록돼 있다.
이후 구인씨도 1995년 6월 '통일신보'에 "아버지가 북으로 오던 중 경기도 동두천 소요산 기슭에서 미군 비행기의 기총탄을 맞고 숨을 거뒀다"고 밝힌 바 있으나 사망시기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남한에서는 정지용이 평양교화소(교도소)에서 폭격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 1990년 사망한 계광순 전 국회의원은 1950년 12월 펴낸 회고록에서 "정지용이 우익활동 혐의로 1950년 7월 북한군에 의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으며 이후 평양교화소로 이감돼 춘원 이광수와 같은 방을 썼다"고 밝힌 바 있다.
계씨는 그해 9월 23일 유엔군의 폭격 때 자신은 평양 감옥을 탈출했지만 정지용은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