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저녁, 주말을 이용해 아내와 함께 화성행궁(華城行宮)으로 마실을 갔다. 화성행궁 광장에서는 수원화성문화제 폐막식이 열리고 있었다.
다소 붐볐지만 아내와 함께 앉을 수 있는 무대 전면의 자리를 쉽게 마련할 수 있었다.
화성시 무용단의 축하공연, 중학교 여학생의 가요 열창했등등. 기성 가수의 뽐내기 공연이 아니었다.
다소 미숙할지라도 우리 이웃의 장기자랑이기에 더욱 정겨웠다. 아내와 난 한가롭게 무대를 지켜보며 연신 흐뭇해했다.
사회자의 익살스런 소개로 한 무리의 아주머니들이 등장했다. 바로 못골시장 상인들로 구성된 불평합창단이었다.
생업에 종사하면서 틈틈이 짬을 내서 연습을 했기에 기실 합창 공연은 그다지 볼품이 없었다.
합창단은 서너 곡을 불렀는데 모든 곡이 단원의 자작곡이었다. 당시 주변이 산만해 정확한 제목을 기억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대략 ‘못골시장에 자주 오라’는 그리고 ‘우리 시장에는 정이 있다’는 시장으로의 초대를 담은 노래였다.
가사에 담긴 초대의 말투도 정중했지만 이들의 안무는 가히 압권(?)이었다.
모두가 절도 있게 맞춰지지 않았다. 또 단순 동작임에도 이를 따라 하지 못하는 단원도 있었다. 그러기에 더 정겨운 아줌마들이었다.
분명 시장으로 와야 한다는 애절한 호소였다. ‘시장에 손님이 없기에 우리의 생계가 어려워지고 있다. 이미 오래 전 대형마트로 썰물 빠지듯 일거에 손님이 빠져나갔다. 그리고 이제는 동네 곳곳으로 스며든 기업형 슈퍼마켓(SSM)으로 그나마 남은 손님마저도 빼앗기고 있다. 이제 재래시장 상인의 생존권은 고사 지경이다.’
이러한데도 그 온갖 사정과 호소가 격정적 외침으로는 표현되지 않았다. 오히려 차분한 목소리 그리고 부끄러운 몸짓으로 잔잔하게 전해졌다. 그러나 그 여운은 더 오래 남았다.
폐막식이 시작되기 전에 자리를 떴다. 불평합창단이 내게 남긴 여운이 의례적인 폐막식 말의 성찬으로 없어질 것을 염려했다. 과감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인근의 못골시장으로 향했다. 수원천변을 따라 걸었다. 일요일 오후라곤 하지만 대부분의 가게가 문을 닫았다. 지동시장, 미나리광시장을 지나 마침내 못골시장에 도착했다.
시장을 한 바퀴 돌았다. 하지만 그다지 사람은 많지 않았다. 난 애초 계획에도 없던 족발과 튀김을 샀다. 괜히 먹지도 않을 거면서 많이 산다는 아내의 구박에도 굳이 넉넉하게 샀다. 여전히 행궁 앞마당에서는 폐막식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상당히 떨어져 있음에도 행사장의 소리가 크게 울렸다. 아내와 난 수원화성박물관 앞 잔디에 앉았다.
그리고 못골시장에서 구입한 튀김과 족발을 안주 삼아 술을 마셨다.
수원화성문화제, 모두가 어울리는 하나 되는 축제여야 했다.
한데 불평합창단의 처연(?)한 울림에 격동해 못골시장을 찾고 그 한산함에 왠지 모를 허전함을 느꼈다. 그리고 수원 신도시의 애초 설계자, 정조대왕을 떠올렸다.
정조대왕이 수원을 신도시로 개발하면서 가장 신경을 쓴 것은 수원의 경제였다. 만석거(萬石渠), 만년제(滿年堤), 축만제(祝萬堤, 오늘날 서호) 등 저수지를 만들어 영농을 크게 진흥했다.
그러면서 수원의 상공업도 매우 중시했다. 남과 북으로 크게 가로지르는 신작로(新作路)를 만들어 온갖 물자가 교류되는 조선의 중심상권을 도모했다.
하지만 애초의 웅대한 설계는 오늘 날 그저 흔적으로 일부 남아 있을 뿐이다.
수원천에 연이어 있는 여러 시장이 그것이다. 흔적은 있으련만 그 시장에서 흥청거리는 생동감은 예전만 못하기에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모든 재래 시장의 운명이 수원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예전 사람이 모이는 곳이면 반드시 있었던 수 많은 업종의 가게들. 구멍가게, 문방구, 책방, 쌀가게, 철물점, 전파상, 사진관, 이발소, 양복점, 양화점, 약국, 방앗간, 전당포 등등. 이제 이런 가게를 우리 인근에서 쉽게 찾지 못한다.
그리곤 그저 한곳 대형 할인매장으로 몰려가기만 한다.
지난 일요일 불평합창단의 질박(質朴)한 외침이 내게 그리고 우리에게 재래시장과 영세상인을 생각하는 일 계기였듯이 조용하지만 큰 반향으로 넓게 번지길 바란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재래시장이, 그리고 온 동네의 영세 가게들이 넉넉한 풍성함을 누리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