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 소회로 글을 시작하고 싶다. 지난 4년 동안 지역의 한 시민단체 대표로서 지방정부의 시정, 의정에 대한 감시와 비판을 주로 하는 시민운동을 해오면서 때로는 인간적으로 괴로울 때도 있었고, 개인적으로는 미안할 때도 있었다. 스스로를 되돌아봐도 건조했고, 많이 까칠했던 것 같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요소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 사회적인 존재로 더불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은 사랑이 으뜸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람이 어떤 일을 하더라도 인간에 대한 예의와 존중을 기본으로 하면서 사람중심으로 사고하고, 행동해야 하는 것이 우선일 거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국가에 대한 헌신이든, 사회에 대한 봉사든, 지극히 작은 단체를 위한 섬김이든 사사로운 이(利)가 먼저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애(愛)가 먼저일 때 참 아름다운 모습일거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진정으로 헛되지 않는 삶의 수고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파괴되고, 사랑의 다리가 끊어지면 오해와 원망, 미움과 증오가 더해지고, 불행해지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다.
사람들은 또 자기가 신앙하는 종교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 약간은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종교에서 강조하는 요소 중 하나가 사랑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기독교와 천주교는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을, 불교에서는 ‘지혜의 길과 자비의 길’로 부족한 식견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요즘 종교인들과 관련된 추문과 민망한 일들을 듣고 보면서 느끼는 것은 사람이 종교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어쩌면 쉬울 수도 있고, 아는 걸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에 종교가 많은 역할을 하면서도 긍정의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일부로부터는 폄훼를 당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되는 경우가 있다.
사랑은 무엇일까. 필자는 사랑은 수고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기 때문에 수고가 없는 사랑은 거짓이라고 느낀다. 거창하게 국민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국민을 위한 수고가 아니라 실제적으로는 사적인 이를 탐하고, 당리당략과 국민이 공감하지 않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애쓰는 정치인들을 볼 때는 분노를 넘어 안쓰러움과 연민이 느껴질 때도 있다.
언젠가 한 종교인의 죽음이 한국사회의 이슈였던 때가 있었다. 법정스님의 입적이었다. 종파를 초월해 법정스님을 추모하고, 신드롬에 가까울 정도로 사회적 분위기가 그 분의 삶을 되새겼다.
왜 그랬을까. 그 분은 평생을 무소유 정신을 실천했고, 맑은 가난으로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평소에 불교의 가르침대로 살았고, 그 무엇을 자신의 것으로 가져 본 적이 없다. 유품인 책 몇 권은 약속한대로 신문배달원에게 줬고, 산에 나무 한그루 더 태우지 않도록 간소하게 다비시켜 달라고 했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가볍게 떠나셨다.
그 분은 살아계실 때, 이런 말씀도 하셨다. “습관적으로 절이나 교회는 다니지 말아야 한다. 왜 절에 가고, 교회에 가는지 깨어 있어야 삶이 개선된다”, “어떤 절이나 교회를 물을 것 없이 신앙인의 분수를 망각한 채, 호사스럽게 치장하고 흥청거리는 것이 이 시대의 유행처럼 되고 있는 현실이다. 풍요 속에서는 사람이 병들기 쉽지만, 맑은 가난은 우리에게 마음의 평화를 이루게 하고, 올바른 정신을 지니게 한다”라고 했다.
그런 점에서 어쩌면 그 분은 한국사회를 위해 평생 의미 있는 수고를 하시다가 가셨다고 볼 수 있다. 종교인으로서 자신의 수행은 물론 사회봉사라는 수행을 업으로 삼았던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삶의 수고를 헛되지 않게 할 수 있다면 그처럼 복 있는 일은 없을 거라고 여긴다.
시민운동이라는 것도 결국은 사회의 건강한 발전과 사람을 위한 일이고, 모두를 살리는 일일 때, 그 수고는 가치가 있고,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면서 나와 너는 낯선 타인이 아니라 우리라는 울타리 안에서 함께 행복해지는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사랑하는 이웃인 것을 받아들이고, 함께 노력할 때, 진정한 만남과 나눔이 있는 세상이 되어갈 것이다.
헛되지 않는 수고가 있다면, 헛된 수고도 있다. 우리가 하루하루 사는 일이 수고인데, 그 하루하루가 헛된 수고가 된다면 헛된 인생이 되는 것이고, 그 하루하루가 헛되지 않는 수고가 된다면 헛되지 않는 인생이 되는 것 아닐까. 그렇게 헛되지 않는 수고를 하다가 인생의 겨울 문턱에 이르러 뒤돌아봐도 후회로 남지 않을 오늘을 살고 싶다. 그렇게 살고 싶은 소망의 새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