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하늘 밝은 달 되어 주신 선생님
“임신기간, 임신징후, 발정상태 등 여자와 암소는 생리적인 면에서 거의 같다.” 고3 대가축 과목 첫 시간, 새로 부임하신 선생님의 말씀 한마디에 교실은 일대 소동이 일어났다.
사춘기인 그때 모든 신경이 이성에 집중돼 있는데 그런 센세이셔널한 말씀을 하셨으니…. 선생님은 수의사이시고 농촌을 살리기 위해서 민간 협동조합운동을 주도하시다가 뒤늦게 교직에 들어서서 하남시의 남한고교를 거쳐 부임하셨다.
우리는 선생님으로부터 대가축, 협동조합 등 두 과목을 배웠다.
선생님은 늘 젊은이의 비전과 자기계발,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삶이 성공의 바탕이 된다고 말씀 하셨다. 당시 나는 육종학자가 꿈이었다.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같이 공부하고 방학 땐 서울 유명학원에서 과외공부를 했다.
그러던 11월의 어느 날 우리들 중 네 명이 선생님의 강권으로 몇 년 만에 치러지는 농협중앙회 신규 직원 입사시험을 치렀고 두 명이 합격했다.
선생님은 자신의 일처럼 좋아하셨다. 그리고 야간대학에 다니며 공부해도 될 만큼 포기할 수 없는 직장이라는 설득에 따라 직장생활을 시작했는데 첫 발령을 강원도 영월로 받게 되면서 3년이 지난 후에야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선생님이 몇 년 후 교감으로 승진하셨다는 얘기를 들었다. 꽤 많은 시간이 흘렀고 WTO 농산물개방을 앞두고 ‘쌀을 지키자’는 운동이 국가적 어젠다로 떠올랐던 어느 날 선생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지금 KBS에서 자네가 인터뷰 하는 걸 보고 어찌나 반가운지 전화했네. 그렇잖아도 궁금했었는데 반갑네!” 선생님은 도 교육위원회에 계시다고 했다. 선생님은 이어 장학관을 거쳐 일선 교육장이 되셨고, 이후 교육감 선거에서 교육감으로 당선되셨다.
1997년 IMF 사태는 국가적인 홍역이자 내 개인적으로도 상실의 시대였다. 두 딸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인천으로 발령나 이사를 갔는데, 교장을 지내신 선친 때문에 전학의 후유증이 컸던 터라 집 근처 지점으로 자원했다. 걸어서 출근하는 재미에 익숙할 무렵 대출사고가 터졌다. 지점장인 내가 책임지고 수습한다는 것이 이리저리 엉키면서 몇 년간 큰 고생을 했다.
그 후 간신히 사태가 수습되고 우리 지역 책임자로 부임하자마자 선생님 내외분을 모신 자리에서 큰절을 올렸다. 선생님은 내 손을 덥석 잡으시면서 눈물을 흘리셨다. “자네가 큰 고생을 하고 있다고 해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르네, 그런데 이렇게 건강한 모습을 다시 보니 기쁘기 한량없군!” 지금도 찾아 뵈면 “직원들에게는 늘 따뜻하게 대하고 용기를 주는 일이 사장의 가장 큰 일일세. 건강을 위해서 부부가 같이 할 수 있는 운동을 하게!”라며 꼭 필요한 말씀을 하신다.
선생님 댁에 갈 때마다 1천 평이 훨씬 넘는 정원을 한 바퀴 돈다. 이제는 나무들도 수 십 년 지나 목향이 정원에 그득하고 ‘군자삼락’의 비석이 교육계 거목의 댁이라는 걸 지나는 행인들에게 알려 주고 있는 듯하다. 나의 스승님은 민선 2~3대 경기도교육감을 지낸 조성윤 선생님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