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前 上書’라는 옛말을 쓰는 까닭은, 선생님을 향한 그리움을 지극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다른 말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스승의 날’에 안부 여쭙습니다. 그간 강녕하시온지요?
耳順이 넘은 제자를 아직도 젊은 대학생인양 챙겨주시는 선생님을 마주할 때면 ‘스승의 은혜’라는 상투적인 표현이 실핏줄에까지 따스한 기운이 퍼지는 행복의 언어가 됩니다.
선생님을 처음 뵌 때가 1970년이었던가요? 세상은 독재로 어지러웠고 양심적 지식인들조차 목을 어루만지며 입을 닫던 어두운 시절이었습니다. 70년 서울대 종암동 캠퍼스 교양과정에서 선생님의 경제학 강의를 들었을 때의 떨림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선생님께서는 미국 유학파 40대 학장이셨습니다. 짧게 자른 머리와 짙은 눈썹, 형형한 눈빛의 젊은 경제학자가 성장일변도 경제정책의 한계와 그 속에서 고통 받을 수밖에 없는 서민들의 삶, 그리고 지식인의 역할을 엄격한 음색으로 거침없이 토해내실 때 우리들은 숨을 죽였습니다. 달변이랄 수 없는 느릿한 어조로 성장과 분배의 균형을 말씀하실 때면 쩌리쩌릿한 충격과 함께 습관적으로 주변을 살폈던 기억이 납니다.
71년 대학에는 현역군인이 교관으로 들어왔고, 일주일에 3시간씩, 그리고 방학동안의 집체 군사훈련이 대학생들의 ‘필수교양과목’이 되었습니다. 우리들 생각으로 대학의 병영화는 ‘민주주의의 죽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총학생회장을 맡고 있던 저는 여린 심성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싸움의 선봉이 되었습니다. 긴 세월을 노숙과 친구 집을 전전하며 두려운 눈들을 피해야 했습니다.
어려운 시절에 선생님께서 주신 사랑을 잊지 못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에 ‘정의’의 이름을 주시며 격려해 주셨고, 먹고 입고 자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우리를 보시며 안타까움에 발을 구르셨습니다. 살벌한 위험을 감수하시며 감시의 눈을 피해 제자를 도와주셨던 그 많은 ‘그림’들을 어찌 잊겠습니까? 강제해직되어 야인으로 살아가실 때도 선생님께서는 후학들의 공부를 제일 먼저 살피셨습니다.
저는 평생을 선생님 삶의 軌跡을 살피며 살았던 것 같습니다. 못난 제자가 그나마 헛된 욕망에 흔들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던 힘을 선생님께서 주셨습니다. 스스로에게 더할 수 없어 엄격하고 성실한 공부로 담아내시는 선생님의 선구자적 지성의 그늘에서 ‘지식의 힘’을 깨쳤고, 실천하는 지식인의 역할을 돌아보았습니다.
여든을 훌쩍 넘으신 연세에도 청년실업과 민생경제의 해법을 찾는 학문적 노력은 물론, ‘연탄 나눔 운동’까지 계속하시는 선생님 모습을 보면서 결코 늙지 않는 선생님의 영혼과 기품을 생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