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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영원히 기억되어야 할 ‘포철맨’

타계한 박태준 포스코(옛 포항제철) 명예회장은 자타가 공인하는 ‘철의 사나이’이자 영원한 ‘포철맨’으로 기억될 것이다. 84세를 일기로 영면한 고인도 육군소장, 4선 국회의원, 집권당 대표, 국무총리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지만 제철입국의 초석을 다진 근대화의 역군으로 국민들의 마음속에 남기를 원했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만큼 박 명예회장과 포스코는 바늘과 실에 비유될만큼 일심동체의 관계를 맺어왔고 그때문에 정치적 격랑속에서 부침도 함께 겪어야 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우리나라 산업화에 공이 큰 분이 우리 곁을 떠나게 돼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고 애도했다. 전경련과 대한상의 등 재계는 “우리나라가 무역 1조달러라는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박 명예회장이 보여준 불굴의 정신”이라며 “철강산업의 발전에서 박 명예회장의 업적을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지나침이 없다”고 업적을 기렸다. 이처럼 박 명예회장이 경제인으로서 남긴 족적은 무쇠처럼 단단하게 경제발전의 버팀목으로 자리하게 될 것이다.

육사 6기 출신인 고인은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등 군사정권과 연을 맺으면서 포철의 성공신화를 이룩했지만 정치인으로서는 파란만장한 역정을 거쳐야 했다. 일본에서 성장해 와세다 대학 기계공학과에 입학했으나 해방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한 고인은 5.16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비서실장에 발탁되면서 첫 인연을 맺었다.

고인은 육군소장 예편후 대한중석 사장으로 임명됐으며, 그의 탁월한 경영능력을 높게 평가한 박 전 대통령의 특명을 받아 종합제철소 건설작업에 착수했다. 대일 청구권 자금을 제철소 건설자금으로 전용하자는 자신의 발상을 성사시킨 고인이 1970년 제철소 착공에 들어가면서 “실패하면 바로 우향우해서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어야 한다는 각오로 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는 ‘제철보국(製鐵報國)’ 정신은 포철맨들 사이에는 아직도 일화로 남아 있다.

고인이 1980년 신군부가 주도한 국보위 입법회의에 경제분과위원장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3당 합당 이후 민정계의 수장으로 당시 김영삼 대표최고위원과 맞서다 민자당을 탈당하면서 맺은 악연은 문민정부 출범 후 포철 명예회장직 박탈과 수뢰 및 뇌물수수 혐의 기소, 4년여의 일본 ‘망명생활’로 이어졌다. 이후 고인은 “정치에 환멸을 느꼈다”며 현실 정치를 외면하고 ‘철강인’으로 되돌아왔다. ‘짧은 인생을 영원한 조국에’라고 밝힌 고인의 좌우명을 되새기며 영면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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