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은 이제 국경을 초월한 다민족 매체의 상징이 됐다. 빠르고 유익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고도의 정보화 시대다. 과거의 전달매체가 이젠 손쉽게 방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통신망이 됐다. 이러한 문화 속에서 나름대로 블로그 운영을 하고 있다. 이웃 블로그 방문 중에 문득 맘에 와 닿는 ‘꽃냉이’라는 시를 읽으며 맘이 쏙쏙 저려왔다. 그 시를 지은 시인이 초등학교 4, 5학년 담임이셨던 선생님과 성함이 똑같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만난 ‘벽과의 동침’이란 시에 맘이 꽂힌다. 절묘한 표현인데 꽃냉이를 지은 시인이다. 갑자기 시인의 정체가 궁금해지면서 인터넷을 뒤졌다. 출생년도로 봐선 초등학교 담임선생님 년대인데 대학교 교수이다.
나의 담임은 사회의 첫 발걸음을 우리들과 함께 했던 소녀와 같은 선생님이셨다. 늘 어린 우리들에게 환상을 심어주고 아름다운 동화를 읽어줘 상상의 세계를 넓혀주었고, 야외수업으로 소래산을 올라 그림을 그린다거나 글짓기를 하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하곤 했다. 씻지 않는 아이들이 많아 손 검사, 이 검사를 하던 시절이다. 그 분은 학교 옆으로 흐르는 시냇물에 우릴 데리고 가선 각자 씻게 하거나 고운 모래로 이를 닦거나 손등을 씻어주기도 하던 선생님이다. 어느 날, 전화를 했다. 전화기를 통해 안내하던 분이 교수님 방으로 전화를 돌리자 바로 받으신다.
“안녕하세요, 교수님의 시들이 좋아 전화했어요.” “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예전에 교수님과 동명이인이신 선생님이 계셨어요.” 그러자 선생님은 선뜻, “어디 초등학교죠?” “경기도 시흥시요.” “학교 이름은요?” “네, 그 때는 소래국민학교라고 했지요.” “어머머, 그게 나야. 내가 거길 다녔잖니?” 그 때부터 선생님이 더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그럼 넌 누구니? 언제? 니들 만나니? 만나는 날 나도 알려줘라. 니들 정말 보고 싶다. 그럼 지금 나이는 어떻게들 되니? 이렇게 찾아줘서 고맙다.”
우리 동문들이 늘 궁금해하던 선생님은 참으로 다정다감한 분이셨다. 선생님이 이웃 학교로 전근을 갈 때 반 전체 아이들은 울음바다가 됐던 기억은 잊을 수 없다. 동창 모임이 있는 날, 선생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 왔다. 딱 잡아 40년 넘는 세월이 흐른 뒤 만남이다. 선생님은 여전히 여성스럽고 우리들과의 사이 너무도 긴 시간의 여백을 잔잔한 이야기로 쉼없이 풀어주셨다.
잔주름이 잡힌 우리들과 똑같이 선생님도 세월의 흔적을 그리고 계셨고 생기발랄하던 모습은 아니지만 확고한 음성과 빛나는 눈동자는 지금도 예전과 다름없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대학교수가 되기까지 다 이야기를 듣지 못했지만 선생님은 보통의 선생님이 아니신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간에 책도, 논문도 많이 쓰셨고 우리를 만난 후 대학총장까지 됐던 분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새록새록 생각나던 선생님을 ‘꽃냉이’를 통해 40년의 시간을 건넜으니 인터넷의 위력이 얼마나 큰가를 직접 느끼게 하는 사건이었다.
▲ 한국문인협회 시흥시지부장 ▲ 시집 <산풀향 내리면 이슬이 되고> <연밭에 이는 바람>
/이연옥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