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를 짓는 일이란 인간 생명을 지키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농사꾼은 인류의 행복을 짊어진 사람들이다. 마을 앞에는 이조시대에 호조에서 농사를 관장하고 일찍이 경지정리를 한 들판이 지금은 시흥시 곡식창고라고 할 수 있는 호조벌이 있다. 호조벌은 넓어서 안현동, 은행동, 미산동, 포동, 매화동, 연성동을 걸치고도 또 여러 동이 걸쳐 있다. 안현동 앞 호조벌은 앞방죽, 오구재, 응담말, 개자리 등의 아주 토속적인 이름을 가진 논들이 있다. 지금은 농사짓는 일도 기계화돼 손쉽게 농사를 짓지만 1970년대 만해도 소가 논을 갈고 써레질하며 농사를 지었다.
시아버님은 집에서 기르는 암소에 멍에를 씌우고 쟁기를 달고 논으로 나가셨다. 그런 날은 여물에 콩이나 보리를 더 넣어 구수하게 쇠죽을 끓여서 먹이고 소를 부리셨다. 집집마다 소를 끌고 나와서 3월 중순이나 4월이 되면 호조벌은 여기저기서 “이랴, 이랴, 워, 워”하고 소 모는 소리가 왁자해 생동감이 일었다.
부녀자들은 점심과 새참을 해서 나른다. 때가 되면 남보다 뒤질세라 서둘러 음식이 든 광주리를 이고 논으로 나서는데, 논에서는 이제나 저제나 하고 새참이나 점심이 나오기를 기다린다. 논길에 할머니, 중년 부인, 젊은 새댁, 갓 시집온 새각시들이 나오는데, 알록달록한 옷차림으로 벌판이 환해진다. 논둑엔 부부, 모자 간, 혹은 부녀 간에 정답게 앉아 광주리를 펼쳐놓는다. 그리고 근처의 논을 향해 “어이, 막걸리 한 잔하고 하세”하고 서로 불러들여 함께 음식을 나누며 정을 나눴다. 아낙네들은 밥거리를 이고 가는 길에서 이웃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며 슬픈 일 기쁜 일을 나누고 다른 마을 아녀자들과도 알게돼 인사를 나눈다.
지금 생각하면 힘들고 가난했지만 인정이 넘치고 정답게 살던 시절 이야기다. 써레질해서 물이 찰랑찰랑한 논은 마치 바다와 같고, 반짝이는 물살 위로 황새가 긴 다리를 세워 나르고 써레질로 집 잃은 개구리들이 간을 끊이는 듯 애절하게 혹은 합창이라도 하듯 울어대는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기도 한다.
농기계의 현대화는 농민들을 참으로 편하게 한다. 트랙터, 경운기, 이앙기 등 농기계는 몇 날 며칠씩 논을 갈고 써레질하던 일을 웬만하면 하루에 다 해치우기도 한다. 봄내내 논에서 살아야 하는 농민들의 수고를 덜어 농민들도 많은 시간적 여유를 갖게 한다. 시간과 능률을 올려주는 농기계는 현대를 살아가는 농촌에 없어서는 안될 기계들이다. 이렇게 각 농가마다 농기계를 보유하면서 옛날의 그 풍경은 다시 보기 힘들게 됐다. “이랴, 이랴” 소 모는 소리 대신 “털털털, 타타타” 기계음이 시끄럽게 온 들판을 차지하고 있다.
이제 호조벌에는 밥거리 내오던 여인들도, 소 모는 농부도 집 잃어 우는 개구리 합창도 온 데 간 데 없어졌다. 다만 중국집에서 달려오는 오토바이가 혹은 봉고 트럭이 논둑을 가로 지르며 “짜장면 시키셨어요?”하고 논에다 대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 벌판의 새로운 풍경이다. 이렇게 시대는 변하고 우리들의 정서도 바꿔간다. 이 호조벌에 서면 시대가 변하는 것과 같이 논에서 일어나던 일들이 아련히 스쳐 지나간다.
▲ 한국문인협회 시흥시지부장 ▲ 시집 <산풀향 내리면 이슬이 되고> <연밭에 이는 바람>
/이연옥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