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의 봄소식을 들은 지도 한참됐는데, 봄은 따뜻한 남쪽에서 노닥거리며 여유를 부리고 있다. 그러나 이제 뒷산등성이를 넘어오는 바람이 모질지는 않다. 봄은 겨우내 차가워진 대지를 천천히 데우며 여름을 숙성시킨다.
세상 만물들은 고유의 물성(物性)을 완성하는 데 숙성이라는 과정을 거친다. 김치나 간장, 된장도 효모들이 작용하는 시간을 가져야 비로소 제 맛을 내고 건강에 유익한 물질도 생성된다. 밀가루 반죽도 맛있는 빵이 되려면 미생물에 의해 특유한 맛과 향이 생성되는 숙성이 필요하며, 포도주는 숙성기간이 길수록 좋다. 흔히들 생선회는 낚시에서 바로 올렸을 때가 싱싱해 가장 맛있다고 한다. 그러나 미생물이 작용하는, 일정 시간이 지나야만 최고의 맛을 낸다. 돼지나 쇠고기 등의 육류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아우르고 융합하는 숙성을 거쳐야 비로소 각기 제 몫을 한다.
우리들의 세상사에도 숙성기간이 필요하기는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엇에 쫒기듯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하고 지나치게 조급하다. 그래서 우리는 중국인들처럼 만리장성이나 자금성 같은 거대 구조물은 만들 엄두를 내지 못한다. 이런 구조물은 몇 세대를 두고 여유롭게 작업해야 하는데, 우리처럼 빨리 끝을 보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조급함으로는 완성하기 힘들다. 조선시대의 경회루는 설계부터 완공까지 8개월 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 선조들도 꽤나 조급했던 모양이다. 조급함은 중요한 일들을 그르칠 뿐 아니라 자신의 일생마저 망칠 수 있다.
조급한 나머지 순간적인 화를 참지 못해 중범죄를 저지르기도 하고, 사회적으로 중대한 과오를 범하기도 한다. 조급함은 과속 운전으로까지 이어져 자신이나 타인의 생명을 잃기도 한다. 부부가 다투다 화가 난 상태에서 성급하게 이혼을 하면 반드시 후회하게 된다. 그래서 법원에서는 3개월간의 숙려기간을 줘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아이를 입양할 때도 파양으로 인한 아이의 충격 때문에 입양 전 숙려기간을 가진다. 조급하게 판단해 입양을 해 놓고는 여러 이유로 파양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더구나 조급함은 만병의 근원으로 뇌졸중, 심장병 등의 순환기 질환, 소화기, 내분비, 면역체계, 스트레스, 암 발생과도 관계가 깊다고 한다. 우리에게는 조급함을 억제하고 기다림의 여유를 가지는 마음의 숙성기간이 필요하다. ‘바쁠수록 돌아가라’고 했듯 순리(順理)는 여유 속에 있다. 그래서 요즈음은 천천히 여유를 가지자는 ‘느림의 미학’이라고 하지 않는가.
얼마 전 총선이 치러졌다. 급조된 정당에서 미숙한 후보들이 나와 숙성이 덜 된 정책들을 쏟아 놓았다. 인기를 위해 급하게 내놓을 것이 아니라 보다 숙성되고 유익한 정책들을 개발해 공약(空約)이 되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세상에는 흑과 백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흑과 백만으로 재단하기에는 세상은 너무나 다양하고 복잡하다. 흑과 백, 그 사이에 있는 여러 색까지 아우르는 숙성이 필요하다. 충분한 숙성이 보다 성숙한 사회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월간 한국수필 등단 ▲한국수필가협회 회원 ▲한국문인협회 가평지부장
/김용순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