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소리에 눈을 떴다. 근처 밤나무에서 조잘대는 작은 새 두 마리가 어찌나 시끄러운지 더는 누워있을 수 없어 벌떡 일어나 창문을 연다. 훅 밀려드는 새벽의 신선한 공기 속으로 밤나무 꽃의 특유한 향이 밀려든다. 커피 한 잔을 들고 하루가 다르게 짙어지는 들판을 본다. 먼 곳의 개 짖는 소리와 과수원 약 뿌리는 소리 그리고 이른 출근에 나선 이웃이 가로막힌 차를 빼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것을 이방인처럼 바라본다. 가까이 보이는 초등학교에 있는 접시꽃도 활짝 피었다.
탁구공만 하게 자란 배와 철조망을 타고 올라 보랏빛으로 핀 나팔꽃이 새벽이슬에 한결 싱그럽다. 낯설지 않지만 왠지 낯설게 느껴지는 풍경 속으로 생각을 몰아넣는다. 밤꽃이 필 때면 빗장을 채우고 동네 아낙들을 단속해야 한다는 말처럼 밤꽃엔 사랑을 불러들이는 마법이 숨어있나 보다. 딸이 여섯인 우리 집도 늘 분주했다. 2년 터울로 낳은 딸들을 단속하느라 아버지는 늘 바쁘셨던 것 같다. 푸르뜸 사내와 눈이 맞은 언니는 아버지의 눈을 피해 밤 마실을 나서곤 했다. 어린 나를 데리고 아래 집에 마실 다녀온다고 허락을 받고 나와서는 적당히 따돌리고 언니는 푸르뜸 사내를 만나곤 했다. 잠깐만 기다리고 있으면 과자 사가지고 금방 온다고 해 놓고는 밤이 늦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남의 집 처마 밑에 쪼그리고 앉아 무섭기도 하고 모기에 물리기도 하면서 언니를 기다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언니는 결국 들통이 나 쫓겨나기도 했지만 언니의 연애담은 한동안 동네사람의 입방아에 오르내렸고 그럴 때마다 엄마는 창피해서 못 살겠다며 언니를 쥐어박곤 하셨다.
나의 비밀을 살짝 들춰보면 초등학교 시절 같은 반 녀석이 아버지의 담배를 몰래 들고 나와 밤나무 밑에서 한 개비씩 나눠 피고는 한참을 쿨럭였고 어지러움을 견디지 못해 밤나무를 끌어안고 빙빙 돌던 기억이며, 신혼여행 다녀오던 날 시댁 뒤란에서 밤송이를 까면서 시어른께 듣던 총각시절 남편의 바람기에 아차 싶었던 때가 새록새록 떠오른다. 살면서 남편이 얄미울 때, 트집이 잡고 싶을 때 가끔 써먹기도 하지만 유월이 되면 그리움들이 봇물처럼 번진다. 감꽃을 주워 목걸이를 만들고 옆집 마당에 떨어진 노랗게 익은 살구를 서로 주우려고 달려들고 솎아낸 풋 복숭아를 벅벅 문질러 닦고 감미료를 발라 먹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입안에 신 침이 가득 고인다.
밤꽃이 피었다. 가시에 찔린 기억도 있고 알밤처럼 탱글하게 윤기나는 그리움도 있다. 가슴 찔린 아픔도 혹은 밤나무 밑을 지나다 툭, 떨어진 밤송이에 맞아 쩔쩔매던 순간도 삶의 과정일 것이다. 꽃을 피우고 한여름 찌는 더위와 태풍 그리고 폭우를 지나쳐 비로소 하나의 알밤으로 거듭나듯 계절에 순응하고 세상에 길들여지면서 사는 것 또한 지혜임을 생각하는 유월이다. 새가 깨워준 아침, 녀석들은 여전히 분주하다. 이 나무 저 가지를 옮겨 다니며 뭐 그리도 할 말이 많은지 조잘대고 나뭇잎을 뒤척이던 바람 초록 물이 듬뿍 들어 창 안으로 달려온다. 밤꽃이 지는 속도로 내 상상도 옮겨갈 것이고 푸른 함정에 빠진 내 그리움 또한 유월의 노래로 퍼질 아름다운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