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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왜, 태평양전쟁인가”

 

격동의 근현대사와 관련된 전시, 교육프로그램 등이 결합된 역사문화공간으로 운영하기 위해 지난해 12월 개관했다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나는 이곳에서 홍보영상물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일본의 2차 대전 참전을 지칭하는 ‘태평양전쟁’이라는 용어가 버젓이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담당자의 답변은 더 걸작이다. “박물관에 관여한 학자들이 모두 한국고대사를 전공한 교수들이라 근현대사에 어둡다”고 한다.

‘태평양전쟁’이라는 용어는 세계학계에서 공인한 명칭이 아니다. 일본의 외교관으로 31대 총리를 지낸 시데하라 기주로(幣原喜重郞)가 1951년 회고록에서 처음 쓴 용어다. 이후 일본의 사학자들은 이 말을 즐겨 쓰기 시작했다. 이 말이 널리 통용된 계기는 여러 학자들의 공동저작물 『태평양전쟁에 이르는 길(太平洋戰爭への道』이 출간되면서다.

일본은 1937년 7월 7일 베이징 북쪽의 노구교사건을 빌미로 중국 침략을 단행하였다. 12월 난징에 진격하여 야만적인 대학살을 자행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1개월 사이에 무려 30만 명을 살해하고 1만~2만 명의 여성을 성폭행했다는 난징대학살은 일본군의 잔인성을 드러낸 반문명적 살육이었다. 난징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의료활동을 하던 미국인 의사 로버트 윌슨은 이렇게 증언한다. “작금의 사태는 피와 강간이라는 커다란 철자로 쓴 현대판 단테의 지옥이다.”

대학살은 곧바로 미국에 알려졌다. 미국은 일본에게 중국침략 중지를 요청하였다. 일본이 거절하자 미국은 1939년 7월에 미일통상조약을 파기하였다. 1939년 9월에 2차 대전이 본격화하면서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등이 동남아시아 식민지에서 떠나자 일본은 이 공백을 노렸다. 중국 동남부를 점령한 기세를 몰아 동남아시아로 진격하였다.

문제는 전쟁물자의 보급이었다. 일본은 다량의 면화와 고철, 석유를 포함한 수입품 중 30% 이상을 미국으로부터 공급받았다. 1940년 7월 미국은 국가방위법에 따라 일본에 대한 수출을 금지하고, 1941년 7월에는 미국 내에 있는 모든 일본 자산을 동결했다. 일본은 동남아시아에서 승승장구하고 있었기에 미국의 이러한 조치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일본군 수뇌부들은 미국이 먼로주의를 지향했기에 전쟁에 적극 참여하지 않으리라는 안일한 예상을 하였다. 지구의 7분의 1을 점령한 일본은 속전속결로 미국을 제압하면 자신들의 대동아공영권을 달성하리라 계산하였다. 그 결과, 1941년 12월 7일 진주만을 공격함으로써 미국과 전쟁에 나선 것이다. 대가는 주지하다시피 원자폭탄 2개다. 곧 태평양전쟁이라는 말은 2차 대전이 일본과 미국의 싸움이라는, 자신들의 우월성을 드러내기 위한 표현이다.

일본은 멀리는 1931년 만주사변에서, 가깝게는 1937년 중일전쟁으로 중국을 공격하면서 전쟁을 시작하였다. 2차 대전은 미국과 함께 일본만이 주인공이 아니다. 끈질기게 저항하여 끝내 온전한 식민지를 거부한 중국이 있고, 연합국의 일원인 영국과 캐나다가 있으며, 독일과 이탈리아라는 개전국이 있다. 미국에 당한 피해는 자업자득이다.

‘태평양전쟁’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일본의 왜곡된 역사관에 동조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절대 써서는 안 될 용어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담당자의 답변도 바로 잡아야 한다. 김왕식 관장은 홈페이지 인사말에서 학계에서 정립된 역사 서술을 기본으로 우리의 근현대사를 진솔하게 드러내고자 했다는데, 근현대사 전공자가 없다니 어찌된 일인가. 김 관장의 답변을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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